소설리스트

133화 (133/177)

Un Ballo in Maschera (10)

기대와는 달리 무료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토록 그립 던, 집으로 돌아 온지가 벌써 7일이 지났지만, 익숙했던 병실에서의 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내는 출근해서도 하루에 몇 번이나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보충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곧바로 돌아왔다. 

아내가 항상 집에 도착하는 오후 4시, 

두 손에는 항상 뭔가가 가득 들려 있었다.

아내는 매일, 몸에 좋다는 음식과 식재료를 사와 정성스레 저녁을 차려주었다.

아내의 그런 정성 덕분에 괴물 같던 내 얼굴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조금씩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답답함을 못 이겨 카페로 나가서 그냥 앉아만 있겠다고 해도 아내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가 학교에 있을 시간에는 항상 처제와 함께 집에 머물렀다.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면, 처제도 슬쩍 다가와 함께 TV를 보고,

내가 소파에서 낮잠을 자면, 처제도 거실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잤다.

아마도 아내가 처제에게 나를 지키라고 부탁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떠나있던 집에, 몇 가지 흥미로운 것들도 있었다.

지하주차장에 사고가 났던 은색 SUV가 말끔히 수리를 마친 채, 서 있었다. 

사고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차를 내가 어제 어디서 구매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또한, 사고 당시 이 차에 나와 함께 있던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스마트폰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전원을 켜보니 사고 당시 외부충격 때문인지 초기화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길게 한 줄로 액정에 금이 가 있는 노트북 또한 충격 때문에 모든 데이터가 지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 룸.....

드레스 룸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내의 부지런한 손길이 닿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옷걸이에 빼곡히 걸려있는 아내의 옷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상의는 가슴이 깊게 파여 있거나, 아내의 몸을 타이트하게 감쌀 듯 작아 보였고, 스커트는 너무나 짧은 것들이었다.

아내가 평소에 이런 옷들을 입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은설아....”

소파 안쪽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던 처제를 불렀다.

“네?”

“언니한테 연락 왔어? 언제 오는지?”

병실에서의 그 사건 때문에 처음 집에 처제와 단둘이 있을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시간이지나자 조금씩 잊혀져 차츰 괜찮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처제는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형부는 참 바보 같아.”

돌아오는 처제의 뜬금없는 대답에 당황했다.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와이픈데 좋지.”

처제가 무슨 말을 내게 하려는지 입술이 조금 열리다 이내 닫혔다. 

“답답하지 않아? 날씨도 좋은데 친구들하고 만나고 좀 그래.......나는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처제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다시 TV로 가져갔다. 

그런 처제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형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처제가 소파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제는 언제 준비를 했는지,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한 것처럼, 머리칼이 아래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가죽소재로 보이는 검은 핫팬츠에 데니안이 낮은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으며, 상체를 타이트하게 감싸는 아이보리색 긴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 블라우스는 가슴 바로 위부터 긴 소매까지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스루로 되어 있어, 처제의 빛나는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처제는 자신의 몸매를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꾸민 그런 옷차림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서 밖으로 나가면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처제에게 향 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화장도 평상시와는 다르게 너무나 짙었다.

늦은 밤.

술과 춤이 뒤섞인, 한껏 분위기가 달아오른 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흐트러진 여자의 모습 같아 보였다.

무척 진한 퇴폐미를 풍기는 옷차림이었지만, 처제가 입고 있으니 그렇게 천박해 보이진 않았다.

“어...어...”

“나.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려고요....”

“어.....내가 데려다줄까? 어디서 만나는데?”

“아니.....택시타고 갈래요. 그럼 갔다 올게요.”

“어...그래....”

처제는 서둘렀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처제의 검은 가죽 핫팬츠 아래,

처제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도톰하게 솟아올라 있는 엉덩이 바로 아래,

그 부드러운 살이 뒤로 밀려나, 타이트한 그 핫팬츠 아래에 삐져나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처제가 거실을 떠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무래도 내가 바래다주는 게 좋았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이내 후회가 되었다.

처제의 기분이 오늘 왠지 좋지 않은 것 같아 보여,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후 4시....

아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이미 되었음에도, 아내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의미 없이 뒹굴 거리던 거실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곧바로 아내의 향기가 가득 차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이 드레스 룸은 답답한 하루하루를 그나마 위로해주는 나의 안식처이자.......천국이었다.

나는 화려한 색상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던 아내의 옷들을 손으로 하나씩 훑어 나갔다.

그 감촉이 마치 아내를 부드러운 맨살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서랍을 열자 아내의 앙증맞은 속옷들이 색상별로 빼곡하게 들어가 들어있었다. 스타킹 또한 색상과 길이에 따라 정확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아내가 어떤 성격의 여자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아내가 너무 좋다.

매일 그랬던 것처럼 드레스 룸에서 하루의 마지막을 힐링하고나서 문을 빠져 나오는 순간.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져있는 캐리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의 빛깔을 닮아 푸르게 반짝이는 20인치, 24인치 그리고 티타늄 실버 색상의 24인치 캐리어.....

집으로 돌아온 뒤, 매일 이 드레스 룸에 들어와 시간을 보냈지만, 왜 지금에서야 이 캐리어가 내 눈에 띄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또 다른 나만의 보물을 찾은 것만 같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색상으로 보아 아마도 티타늄 실버색상이 내가 사용하던 것 같았다.

구석에 있던 그것을 드레스 룸 중앙으로 들고 나왔다. 캐리어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듯 묵직했다.

이상하게도 TSA락이 채워져 있었다. 

내 생일 3자리를 맞추고 버튼을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아내의 생일로도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꿈적이지 않았다.

당황했다.

분명히 내가 쓰던 것이 맞는 것 같은데 3자리의 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멈춰있던 내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TSA락이 힘없이 풀려버렸다.

3자리 번호는 카페 오픈할 때 사업자등록이 완료된 날이었다. 

이 날짜는 내겐 너무나 중요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모르는 날짜였다.

심지어 아내까지도.....

캐리어가 완전히 열렸다.

순간 내 눈이 찌푸려졌다.

캐리어 안은 엉망이었다. 

마치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 성격상 절대로 이렇게 캐리어를 지저분하게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캐리어 속에는 구겨진 방콕 여행 책이 들어 있었다. 

그 책을 펼쳐보니, 펜으로 줄쳐 있는 부분과 군데군데 꼼꼼하게 필기 된 글씨가 보였다.

내 필체가 분명했다. 

그리고 찢겨나간 A4 용지들 사이 방콕에 있는 어느 호텔 바우처가 눈에 들어왔다. 

주요 관광지가 표시된 큰 사이즈의 방콕시내 지도가 온전한 모습으로 캐리어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같은 재질과 색상의 지도가 갈기갈기 찢겨나가 있었다. 

조각난 지도 위쪽에 굵게 프린터 된 글씨가 보였다.

‘Pattaya Tourist Map’

엉망으로 구겨져 거의 찢겨지기 직전인 하얀 A4용지를 집어 들었다.

[개새끼.....내가 반드시 죽여 버린다.....]

휘갈겨 쓴 그 하얀 A4 용지에 무엇인가로 젖어버린 것처럼 글씨가 얼룩져 있었다.

나는 멍하게 그것을 들여다봤다.

아내의 것으로 보이는 하늘색 캐리어 24인치는 TSA락이 열려있었다.

하지만 같은 색 20인치는 TSA락이 잠겨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들어있는 듯 캐리어를 흔들어보니 무엇인가 들썩거리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20인치 캐리어를 들고 나와 아무리 번호를 조합해도 열리지 않았다. 내 생일, 아내의 생일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까지도.....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끝내 열리지 않던 그 하늘색 20인치 캐리어를 그대로 두고 드레스룸 중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이 캐리어들이, 잃어버린 내 기억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진 않을까 생각했다.

순간, 무엇인가 번뜩 떠올랐다.

나는 펼쳐 놓은 캐리어들을 빠른 손놀림으로 정리해서 다시 원래 있던 구석 자리에 밀어 넣었다. 

드레스 룸을 빠져 나오면서도 몇 번을 반복해서 캐리어들이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있는지 재차 확인하곤 문을 닫았다.

다시 내가 향한 곳은 침실이었다.

아내의 얼굴의 아침마다 더욱 화사하게 변하는 화장대 옆,

서랍을 열자,

화려한 갖가지 보석들과 시계들이 각각의 케이스에 들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내가 결혼식이나 중요한 모임에만 사용하는 아끼는 그런 것들이었다. 

서랍 가장 바깥쪽에 있던 종이 상자를 열었다.

같은 디자인이지만 색상만 다른, 예쁜 커버로 둘러싸인 여권 두 개가 사이좋게 포개어져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집어 열었다. 

여권 첫 장에 긴장한 모습의 내 얼굴 사진이 보였다.

여권은 너무나 깨끗했다.

여권 발급일이 1년 좀 지나 있었다.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다 영어로 된 파란색의 스탬프 두 개가 찍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태국 수완나품공항 이민국’

내 여권에 찍힌 스탬프는 오직 이것 하나였다.

아내의 여권을 펼쳤다.

아내의 여권은 다소 사용감이 있어 보였다.

여권 발급일이 이미 5년이 지나있었다.

내 것과는 달리 각양각색의 출입국 스탬프들이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파란색의 스탬프가 여러 번 보였다.

아내의 여권 용지가 점점 깨끗해질 무렵,

‘태국 수완나품공항 이민국’

아내의 여권을 들고서, 다시 내 여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좀 전에 확인한 스탬프와 아내의 것을 비교하기 위해 같은 스탬프가 찍혀 있는 면을 동시에 펼쳐 놓았다.

태국 입국일이 동일했다.

하지만 태국 출국일은 달랐다.

아내가 먼저 출국한 날짜 정확히 일주일 후에 나는 태국 수완나품 공항을 떠났다. 

여권 두 개를 들고서 반복해서 확인했지만, 여권에 찍힌 태국 출국 날짜는 분명히 달랐다.

나는 다시 두 여권을 종이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 케이스를 닫으려는 순간, 내 손이 멈칫했다.

나는 다시 아내의 여권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그 스탬프가 찍힌 면이 지나가고 공란으로 비워진 깨끗한 면이 몇 장 지나갔다. 

때타지 않은, 완벽하게 깨끗한 한 면에 영어로 된 파란색 스탬프 두 개가 찍혀 있었다.

‘태국 수완나품공항 이민국’

그 출입국스탬프는 2개월 정도 전에 찍힌 것이었다.

아내의 여권 첫 장,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지금보다도 조금 더 어려 보이는 화려한 아내의 사진 속, 그 커다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오빠. 왔어요!!!”

“은설아? 어디 있어?”

은설아 나 이거 좀 들어줘.....”

갑자기 거실에서, 

나와 처제를 찾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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