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77)

Un Ballo in Maschera (5)

“엇!!! 김....김 사장....”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커다랗게 뜬 그의 눈 속, 검은 동공 속에, 

작게 축소된 괴물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를 한 그의 얼굴은 험상궂었다. 그리고 얼굴 몇 군데에 오래전에 생긴듯한 무엇인가로 긁힌 상처들이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다.

나이는 40 중반 즈음 되어 보였다.

통이 넓은 양복바지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그 모습까지도 평범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가 나를 김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를 알고 있다!!!’ 

햇살이 닿자 피부가 간질간질 거렸다.

오랫동안 어둠에 숨겨져 있던 내 피부가 그 햇살에 놀란 듯 바싹 수축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병원 뒤쪽에 있는 인적이 드문 벤치에 홀로 앉아있었다.

뒤편 주차장에는 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었고, 이따금씩 차들이 들어와 주차하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결같이 어둡게 굳어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현실 세계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병원 건물 중앙 입구에서 그 사내가 빠져나왔다.

그의 손엔 캔 커피 두 개가 들려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게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고.....덥죠?”

나는 캔 커피를 내어준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캔 커피가 반이나 줄어들었음에도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나는 그가 내어준 캔 커피를 홀짝이며, 한참 동안 생각을 했다. 

어떤 말부터 그에게 해야 할지를...... 

그건 아마. 험상궂게 생긴 이 사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전반적인 그의 외모와 분위기가.....

평범한 사람 같진 않아 보였다.

어디선가 짙은 담배 냄새가 코에 흘러들어왔다.

옆을 돌아보니 그가 방금 담배에 불을 붙인 듯, 동그랗게 말려있던 담배 끝이 새빨간 불을 밝히며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고...아이고.....미안요....아직.....아픈 사람 앞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당황해하며, 서둘러 담배를 끄려고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피우세요.....”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나로부터 담배를 멀찌감치 숨기듯 뒤로 손을 가져갔다. 

“김 사장님. 참......다행입니다....”

담배를 피우며 한참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내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그에게 숨겨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2주 전에 깨어났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꾸밈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 표정에 내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억이.......이전 기억을 못한다고 들었는데.......지금은 어때요?”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참 다행입니다. 그땐......”

그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그는 무슨 실수라도 한 것처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날. 내가 사고 나던 날.....

나를......구해주신 분이죠?”

말을 하고 나서도 왜 갑자기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 건지, 나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놀란 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지금 그의 눈빛 속에 수많은 고민들이 빠르게 지나가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길 좀 해주십시오.

기억이...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옆에 있던 재떨이에 비벼 끄는 그의 얼굴에 무척 복잡한 감정들이 숨겨져 있어 보였다.

“으흐흠....그...그날.....”

오래전 기억을 되돌리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비가 참 많이 왔어요.

일이 있어, 독음산에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거기가,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 험하죠. 

한참, 반 이상을 올라가고 있는데.

멀리서 보니, 

위에서 SUV 한대가....

낭떠러지 쪽 가드레일을 박고, 중앙선을 넘어 

안쪽 가드레일도 박더니......

다시 낭떠러지 쪽으로 차가 가더군요.

근데 희한하게 김 사장님 차가 향하는

그쪽 낭떠러지 부분에만 가드레일이 없었습니다.

4~5미터 정도 되는 길이였는데....그 참...

그래서....

가만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내 차로 김 사장님 차를 막아 세웠어요.

다행이 김 사장님 차가 양쪽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속도가 많이 줄어있어서 가능했던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저로써도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차를 막아 세우고 내려서보니. 

김 사장님 차 운전석에 온통 피가 튀어있고,

얼굴엔 피범벅이 된 채, 이미 의식은 없어서,

바로 119를 불렀습니다.

나는 그때 김 사장님이 이미....

죽은 줄....알았습니다.”

그가 말을 끝내고, 

담배를 하나 꺼내려다 생각이 바꿨는지 길게 삐져나온 그것을 담뱃갑에 다시 밀어 넣었다.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그리고 선생님 차도 손상이 되었을 건데, 

보상은 어떻게 된 건지...

죄송합니다....

어떻게 처리가 된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네요.”

“하하.....아닙니다. 

내 차는 범퍼만 조금 밀려들어갔고, 

수리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신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보는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은 더욱 커졌다.

“어찌됐든 간에, 수술하고 나서 좀 힘들 거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김 사장님이 이렇게 다시 일어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기....선생님.

사고 난 그 날....

그날 처음 나를 만난 겁니까?”

사내에 얼굴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네에. 그때....참 어떻게 보면 인연이죠. 

하하하...

시간도 지났고. 어떻게 되었나 싶어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와본 겁니다.

아이구....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몸조리 하십시오.”

사내가 낡은 가죽 줄에 묶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눈엔, 

이런 그의 행동이 어설픈 연기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물어볼 말이 더 있었다.

“아이고. 날씨 참 좋다......”

그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나에게 웃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아래로 뻗어 있는 계단을 통해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기....그런데....

왜 나를 김 사장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당신.....도대체 누굽니까?

우리 알던 사이죠?

사고 나기 전에 우리 만났었죠?”

계단을 몇 발자국 내려가던 그의 발길이 갑자기 우두커니 멈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뒤돌아서 멈춰 있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김 사장님. 몸조리하십시오.”

그가 좀 전 보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계단을 한발씩 딛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어쩌면......잘됐어......다.....” 

멀어져가는 그로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가 벤치를 떠난 지도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가 남겨놓은 구겨진 담배꽁초에 자꾸 눈이 갔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아마 지금 주머니에 담배가 들어 있다면, 당장에 피웠을 것 같았다.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에 돌아와 있다.

다섯 달 동안 의사마저 포기한 나를 아내는 묵묵히 나를 지켜주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내의 마음엔 얼마나 많은,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좌절이 머물다 사라졌을까....

아내의 그 연약하고 작은 가슴이 얼마나 무너지고.....무너졌을까....

눈가가 따가웠다.

“오빠!!!” 

아내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빠!!!”

환청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쫓아, 사람이 드나드는 병원 출입구 쪽을 바라보니, 거짓말 같이 아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내가 무척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달리 보면, 화가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오빠!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아내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왔다.

아내의 옷차림이 변해있었다.

깨어난 후, 처음 아내를 봤을 때.

아내의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그리고 가슴골까지 드려다보이는...

그런 노출이 심한 옷이 아니었다.

여느 학교여선생들처럼 단정한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아내의 뽀얀 무릎을 살짝 덮고 있는 하늘하늘한 살굿빛 A라인 스커트가 바람에 춤추듯 찰랑거렸다. 

아내는 내가 앉아 있는 곳에 바짝 다가와 팔짱을 끼고서 나를 내려다봤다.

아내의 표정을 보니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무서운 여선생님이, 사고를 친 반 아이를 혼낼 때 그런 것처럼....그런 눈빛이었다.

아내의 화장은 여전히 짙었다. 그리고 아내의 볼은 그때처럼 발그레했다.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 까지도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오빠는 정말......교수님이 아직까지는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은설이도 없이 이렇게 혼자 다니면 어떡해요?”

나를 보며 쏘아붙이는 아내의 얼굴 전체가 조금씩 붉게 변했다.

하지만. 내겐,

붉게 번지는 그런 아내의 얼굴까지도,

내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비야.

너는 화장 안 해도 예뻐....”

“네...네에?”

나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뜬금없는 소리에....

부드러운 솜털 위, 작은 갈색 가루가 꼼꼼하게 뿌려져 있던 아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아.....”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아내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굳어 있던 아내의 표정이 천사처럼 변했다.

“오빤....정말.......” 

내 앞에 서 있는 아내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골반 위 움푹이 들어가 있는 허리 곡선이 유난히 더욱 깊게 느껴졌다.

“우리 은비. 너무 말랐다.

머리는 언제 잘랐어?

예전엔....길었잖아....”

“어.....머리....이상해요?

보기 흉해요?”

“아니...예뻐. 인형 같아... 

예전하곤 너무 달라진 거 같아서...

머린 언제 잘랐어?”

“두어 달 전에.....”

나는 앉은 채, 다리를 양쪽으로 조금 더 벌리곤 아내의 허리를 두 팔로 깊게 끌어 않았다.

그러자 아내의 몸이 내게 조금씩 끌려 들어와 스커트를 입은 아내의 몸이 내 다리사이에 깊게 들어왔다.

아내의 폭신한 배가 내 한쪽 뺨에 깊게 닿았다.

내 얼굴이 눈 속에 파묻힌 것 같았다. 하지만 차 갑기는커녕 따스했다.

아내의 몸에 베여있는, 짙은 그 향기에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감겼다.

아내가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 선생. 이리로 오라니까....]

[돌아가세요]

[그 참....사람 성의를.....]

[아....아...]

[내가 꼭 이렇게 해야겠어요?]

[놔....놔요....이거....]

[얼굴이 반쪽이네.

그래도...그 얼굴은 그대로네?]

[하실 말 있으면 하시고 가세요]

[이 선생 우리 그때 이야기하던 거....

마무리는 지어야지..

그날 이후로 잠을 못 잤어요.

이 선생 생각 땜에....]

[분명히 말했어요. 

이거 놔요!]

[아이고...안녕하세요....선생님]

[어머!!!]

[뭘 그렇게....놀라십니까? 귀신 본 것처럼..

사람 무안하게....

한 6~7개월 만인가...

서방님은 누워있는데. 

병실을 무슨 신방처럼 꾸며놨네?]

[어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모양이네? 흐흐흐...

사장님이 모시고 오랍니다.....

사모님. 어서 준비하세요....]

[안....안돼요....]

[되고 안 되고는 선생님이 정하는 게 아니고요.]

[정말 오늘은 안돼요....]

[아니....사장님이...니 서방 챙기라고

그렇게 오래 기다려줬잖아.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제가 다시...연락하다고 전해줘요...]

[이 씨발년이. 좋은 말로 하니까...

야이 씨발년아!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때!

경주.....

너.....너만 아니었어도....

니가 그날....

그년, 그렇게 만들라고 말만 안했어도...

이거 봐봐. 이씨발년아. 

내 뱃대지....]

[흐으으......]

[내 친구 기억나지?

니가.....기억 못할 리가 없지... 

우리 셋이 보통사이 아니잖아? 흐흐흐...

그 새끼는 어떻게 됐는지 말해줄까?]

[흐흐흑.....]

흐느끼는 아내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날 일은 다음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조용히 따라오든지....아니면...

그 년....어디 있어?

니......]

눈꺼풀에 깊게 싸여있는 내 동공이,

어둠속을 어지러이 휘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