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77)

Un Ballo in Maschera (4)

눈이 스르륵 열리고, 

짙은 암흑이 찬란한 빛으로 물러나는 이 시간.

내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차디찬 땅속 지옥감옥에서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안도했다.

“으음......은설아. 오늘....얼마나 지났어?”

“열 시간 지났어요.”

습관이 생겼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처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항상 나는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를 묻는다. 

처음엔 일주일.....오일....사일........하루......그리고 몇 시간.....

홀로 암흑에 갇혀 있던 시간들이 조금씩 줄어갔다.

묵직했던 머리가 가볍게 느껴졌다.

머리에 손을 가져가 대보니 답답하게 내 머리 둘레를 압박하고 있던 붕대가 사라져있었다.

그리고...힘없이 축 처진 머리칼이 만져졌다.

“처제. 나 거울 좀......얼굴 보고 싶다....”

처제는 조금 머뭇거리다 백에 들어 있던 사각 손거울을 가져와 내 얼굴을 비췄다.

처제가 들고 있던 손거울을 건내 받고, 거울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들여다봤다.

귀신처럼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적당하게 도톰했던 볼 살은 누가 뜯어먹어 버렸는지 사라져있고, 새롭게 돋아난 머리칼이 서로 엉망으로 엉켜 짓눌려 있었다.

이제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황소가 그러하듯. 퀭한 두 눈만 멀뚱히 껌뻑이며 거울 속 괴물이 나를 경계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괴물 같다.....”

처제가 다가와 침대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앙증맞은 핑크색 작은 솔빗으로 엉켜있는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풀어주기 시작했다.

“언니, 학교 갔어요. 점심때 즈음 온데요.”

“지금....방학 아니야?”

“보충수업한데요. 12시까지....”

처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난꾸러기 어린아이의 엉켜있는 머리칼을 풀어헤치듯 그렇게 세심히 빗질을 하고 있었다. 

“처제.....졸업은.......3학기 남았나?”

“아니요. 2학기.....”

“나 때문에 복학 못했구나....”

“형부 그런 말 하지 말고, 

형부 몸 걱정이나 하세요. 

이게 뭐야.......바보같애.....휴.....”

처제가 빗질을 잠깐 멈추고 장난스레 나를 쏘아봤다.

화장기 없는 처제의 얼굴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예전 아내의 그 모습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어 나셨어요?”

병실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은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처제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처제 분 계셨네. 안녕하세요.”

그는 처음 내가 깨어났을 때,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내 뺨을 두드리던 바로 그 의사였다. 

“좀 어떠세요? 

며칠 전에 기본검사 한건 결과가 아주 좋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40대를 갓 넘긴 것 같은 그 의사의 시선이,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내게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하하.....감사한 건 환자분이 아니고....

제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깨어나셔서.....”

의사의 말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궁금한 게 많으시죠?

금방 일어나신 거 같은데, 좀 더 쉬세요. 

있다가 다시 한 번 들리겠습니다.”

의사가 병실을 빠져나가려다 뒤돌아섰다.

“아참. 처제 분.

저번에 말 한 거 생각해보셨어요?

우리 막둥이.....”

“네? 아.....그게.....”

처제가 당황해하며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병실에서의 오전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게 흘러갔다.

처제는 생글거리며 병실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어여쁜 고양이 같아 보였다.

지루한 시간을 그나마 말없이 참고 보낼 수 있었던 건,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처제의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어머! 형부 화장실 가시게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병실 바닥에 있는 남색 슬리퍼를 신으려는 순간 처제가 다가와 서둘러 신겨주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한테 가보려고.....

아까 오신 선생님 방이 어디야?”

더 이상 침대에 누워서 수없이 새겨진 물음을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같이 가요.”

처제가 내게 팔짱을 끼듯 부축해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가 조금 어색했다.

처제가 없었으면 아마 혼자 걸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았다.

병원 복도를 지나 간호사 데스크에 분홍빛 옷을 입은 네다섯 명의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앞에 다다르자.

바삐 움직이던 간호사들이 일시에 멈춰 나를 보고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머리를 위로 곱게 말아 올린 한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내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네네...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그 간호사에게 인사를 했다. 

그 간호사 곁에 있던 다른 간호사들도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은설 씨. 이제 김 치우 환자분 운동하나봐?” 

“네. 언니. 형부하고 데이트해요....호호호.....”

“호호호....”

처제의 말에 간호사들이 동시에 깔깔대며 웃었다.

강 동호 교수.

목재로 된 나무 문 앞에 이름 적힌 명패가 걸려 있었다.

부재를 표시하는 곳에 작은 슬라이드 화살표가 ‘내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제가 그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교수님. 계세요?”

“네 들어오세요.”

처제가 문을 열었다.

“아이고.....좀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어서 오세요....안으로......”

책상에 앉아 있던 의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제가 방 안쪽에 있던 소파까지 나를 부축해 자리를 잡는 걸 도와주었다.

“형부. 같이 있을까요?”

“아니. 아니.....괜찮아.”

“교수님. 말씀 끝나시면 병실로 전화 주세요.”

처제의 말에 의사가 웃으며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처제가 방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갑자기 긴장이 됐다.

의사가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사는 한동안 말없이 웃으며 나를 보고만 있었다.

“궁금한 게 많으시죠?”

“네.....”

“음.....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되나.....”

미소 짓고 있던 의사가 고민에 빠진 듯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김 치우 환자분은 뇌동맥류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마...뇌동맥류라는 걸 간혹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30대 젊은 분들도 심심찮게 발병 하니깐요.

사람의 뇌에는 수많은 혈관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뇌에 있는 혈관 내부, 외벽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작은 손상이 발생 할 수 있습니다. 심하지 않은 손상은 대부분 자연적으로 치유되거나 손상이 멈추는 반면,

그렇지 않고, 손상이 더욱 심해지면, 혈류의 압박으로 손상된 부분이 조금씩 부풀어 오릅니다. 이걸 뇌동맥류라고 합니다. 

작게 부풀어 올라 있던 것을 방치해서 더욱 심해지면 작은 풍선처럼 꽈리 형태로 부풀어 오릅니다.

여기까지 오면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온 것이죠. 

혈관을 간신히 막고 있던 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부분이 터져버린다면......

거의 50% 육박하는 환자들이 병원에 실려 오다가 사망하거나, 병원에 도착해서 긴급 치료받는 도중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행히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장애 없이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경우는 20% 미만입니다.

그 만큼 뇌동맥류라는 병은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입니다.”

“교수님.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내가 뭐 한 게 있나요. 

수술한 거....말 곤.......그리고....

아내 분한테 감사하세요.

처음 교통사고로 병원으로 왔을 때,

손도 못 볼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로써도 거의 포기했을 정도였는데.

아내분이....

수술 꼭 해달라고 했어요.

환자분은 반드시 살아난다고......

그렇게 우시면서.....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플 정돕니다.

수술 끝나고 환자분이 회복실에 있는 동안.

아내분하고 처제분이....

내가 지금까지 20년 정도 병원에 있었는데.

그런 보호자분들은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병원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로.....

환자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부끄럽습니다만, 

수술하고 3개월 정도 넘어갔을 때인데.... 

아내분 모시고 이제 의학적으론 회복이 힘들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했다가....

아내 분한테 얼마나 호되게 혼났는지.....

하하하......”

“교수님.....기억이 나지 않아요.”

병실에 울리던 큰 웃음소리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의 표정까지 단번에 진지하게 변해있었다.

“네네.....그럴 수 있어요. 

환자분 발병부위가 신경에 바싹 붙어 있는....

아주 위험한 위치였습니다.

수술을 자칫 잘못하면, 사망하거나, 아니면 깨어나더라도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될 그런 위치였습니다.

다행인 건,

환자분께서 모든 기억을 잃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희망이 있다는 거죠.

우리의 뇌는 그렇게 약하고 단순한 구조 아닙니다.

인지판단을 할 수 없는 유아도....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심지어 냄새까지도 모조리 뇌에 저장합니다.

단지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것이죠.

환자 분의 기억이 다시 돌아올거다 아니다,

확신해서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가끔.....꿈을 꿈니다.

꿈 속에서.....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날 때도 있습니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과거의 내가 경험했던 것들인지......

모르겠습니다.”

“환자 분은 지금 5개월 동안 모든 신경들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멈춰있었습니다. 

환자 분이 꾸는 꿈이 과거의 실제 경험인지.....아니면 손상당한 뇌에서 만들어진 허상인지는 정확하게 말 할 순 없지만.....

학계에 따르면.

10년간 혼수상태로 생명을 연장하던 환자가 기적처럼 깨어나.....

의식이 없던 자신이 들었던 것들을 이야기 했는데. 그게 무의식에서 만들어진 상상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는 게 밝혀진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딸이 찾아와 며칠 있으면 결혼을 한다고....아빠한테 축하받고 싶다. 어서 깨어나라는.....이런 말들을 의식이 없던 환자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뇌는 신비합니다.

모든 신경들은 잠들어 버렸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순간조차도 끊임없이....멈추지 않고 일을 합니다.” 

한동안 그와 가벼운 이야기들을 그와 주고받았다.

“교수님. 다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처제 분한테 전화.....”

“아니요. 혼자 갈수 있습니다.”

책상에 있던 내선전화 수화기를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김 치우 환자분.

감사해야 할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네? 누구......”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우리 선배님인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찬찬히 합시다.”

그가 무슨 재미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어머! 형부! 왜.......혼자와요....”

소파에 앉아 있던 처제가 급하게 다가와 처음처럼 나를 부축했다.

“아니야. 이제 괜찮아.....”

“형부. 방금 어떤 분이 찾아 오셨는데요......”

“어? 누가?”

테이블 위에 박카스 한 박스가 놓여 있었다.

“남자 분이었는데요....처음 보는 분인데......

형부 교수님하고 상담하고 있다고 하니까. 

다음에 다시 온다고 하곤 나갔어요.

누구시냐고. 성함하고 연락처주시면 전해준다고 했는데도 그냥 가셨어요.”

“언제 쯤?”

“형부 들어오기 전에 방금요....”

서둘러 처제가 문밖으로 나갔다.

“어...저기.....저기 가신다....형부!”

처제가 문 앞에 서서 손가락 하나로 복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병실을 나왔다.

처제가 가리키는 방향에 짧은 머리를 한 줄무늬 반팔티를 입은 한 남자가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자의 모습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지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서둘러 그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형부!!!”

뒤에서 처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찾아온 그를 꼭 만나야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자연스럽던 빠른 발걸음이 점점 적응이 되어 갔다. 

그가 모습을 감춘 코너를 돌자......

그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는 위쪽에 달린 천천히 바뀌는 숫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12F.

엘리베이터 붉은 숫자가 12에 멈췄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엘리베이터에 막 올라타려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

“어!!!!”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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