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77)

Un Ballo in Maschera (2)

하나씩 떠오르던 그 낡은 흑백 사진들이 이제는 수십 장, 수백 장이 동시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음....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주세요]

[어머! 이건 주문 안 했는데요?]

TV에서나 볼 수 있는 늘씬하고 아름다운 한 여자가 카페 창가에 앉아, 내가 내어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느새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에요?]

[항상 이런 식으로.......여자 손님들한테.....그러시는 거냐구요!]

[오빠. 사랑해요]

[오빠....나......처음....처음이에요]

[오빠! 오빠! 이번 주에 우리 집에 인사하러 가요.]

기억 속에서 잘게 부셔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연결되고.....다시 이어져갔다. 

침대 곁에 가만히 서있던 여자의 걱정스런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드디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은설아.....처제.......”

“왜 울어요.......형부.....”

처제가......하얀 티슈를 뽑아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은설아....오늘 며칠이야?”

내 물음에 처제가 목이 메인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5개월......형부 사고난지......5개월이......지났어요......”

처제의 말에 깜짝 놀라 숨이 막혀왔다.

다섯 달 동안 이렇게 산송장처럼 병원에 누워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들며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 다섯 달 동안 아내와.....처제는.....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줬다.

얼마나 힘 들었을까.....

처음 눈을 떴을 때,

처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몸의 모든 신경이 죽음의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음에도, 천박한 내 몸뚱어리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썩은 정액덩이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아내나 처제가 번갈아가며 더러운 그것을 깨끗이 닦아냈을 것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사고가 났어요. 교통사고. 폭우가 내리는 산길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처제가 말했다.

“조금만 늦었어도.......어느 분이 그곳을 지나다 절벽으로 향하는 형부 차를 막아 세웠어요. 그 분 차로....그 분이 아니었으면......

그 분 덕분에 곧바로 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걸 발견하고 바로 수술을 한 거예요”

조금씩 말라가는 처제의 눈가가 또다시 흥건히 젖어갔다.

“힘 들었지? 고맙다. 처제가 고생 많이 했다.” 

“아니요. 아니요......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그리고...나의 아내. 

은비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언니 오늘 연수 있어서 부산에 내려갔어요. 

형부 깨어났다고 언니한테 연락했어요. 

언니......지금 오는 중이에요.

조금 있음 도착할 거예요.” 

처제는 그런 내 마음을 벌써 읽었는지, 아내가 오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예전 기억 속에 얼핏 떠오른 그 모습처럼 처제가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처제의 눈가엔 여전히 굵은 눈물방울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잠이 쏟아 졌다.

지금 오고 있다는 아내의 얼굴이 너무나 보고 싶은데. 또 다시 쏟아지는 잠을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사물을 분간 할 수 없는 짙은 연기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파스텔 유화처럼 흩뿌려진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멈춰있던 그 그림 속의 화면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섞여 있던 뿌연 색상, 정 중앙에 살색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덩어리져있던 그 살색의 윤곽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사람의 형체를 한 머리와 사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달라붙어 움직이고 있었다. 

한 형체가 엎드려 있던 사람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자신이 있는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사람의 얼굴이 뒤로 바짝 들어 올려졌다.

엎드려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활짝 열린 입술에 발려진 붉은 흔적만 또렷이 보였다. 

두 사람은 뒤엉켜 성행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얼굴이 뭉개져 있었다. 

눈도 코도,,,,입도......초점이 나간 것처럼 뭉개져 누구인지 분간 할 수 없었다. 어렴풋 그 대상이 남자일 것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있던 여자 뒤에서 움직이던 남자가 여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솜털 같은 것이 소복하게 깔린 바닥에 뉘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여자의 기다란 두 다리가 남자의 손에 잡혀 양쪽으로 벌어졌다.

벌어진 두 다리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까지 바싹 다가가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았다. 

사람이라면 저렇게 다리가 벌어질 수는 없다.

활짝 벌어진 다리사이 검은 수풀 부분에 남자가 올라탔다. 

아니 내려앉았다. 

그러자 누워 있던 여자의 입술이 단번에 크게 벌어졌다.

유화처럼 흐트러져 있던 그 광경이, 조금씩 초점이 잡혀 나갔다. 

알몸인 여자의 긴 머리칼이 바닥에 깔린 솜털 같은 것을 풍성하게 뒤덮고 있었다. 

여자의 두 팔이 양쪽으로 길게 열려, 바닥에 있던 그 솜털을 꼭 쥐어 잡고 있었다. 

말도 안되게 위쪽으로 바짝 벌어져 있던 여자의 하얀 다리 사이...

남자는 검은 수풀이 있는 여자의 그 사이를, 성기가 달린 자신의 하체로 반복적해서 찍어 내렸다. 

[아....아.....아아!!]

음소거를 제거한 것처럼 갑자기 소리 들렸다.

남자의 손에 잡혀 위쪽으로 들어 올려진 여자의 두 다리가, 여자의 얼굴 옆, 바닥에 완전히 닿아 있었다.

검은 털로 감싸여진 여자의 하체가 위로 조금 들려져 있었다.

남자는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자의 그곳을 자신의 성기로 빠르게 찍어 내렸다.

[아아악!!! 아파!!!]

여자의 커다란 비명이 울리자,

여자의 얼굴이 더욱 또렷해졌다.

[으으.....아........씨빨.....아......]

지금까지 전혀 들리지 않던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누워있던 여자의 한없이 찌푸려진 두 눈이 갑자기 나를 향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은설 씨! 은설 씨! 치우는 어떻게 됐어요?”

병실에 들어온 누군가가 다급하게 처제를 불러댔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 꿈결에서 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병실 입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치우야!!! 너 괜찮냐? 정말 깨어났어?”

그가 내가 누워있던 침대 곁으로 한걸음에 다가와 있었다.

“치우야! 나 누군지 알겠어?”

내 팔에 무엇인가 수없이 꽂혀 있는 주사바늘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그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퇴근하긴 이른 시간인데.....또 농땡이 치고 왔냐?”

“이 새끼......김 치우......”

그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내 손만 꼭 잡았다.

“정말 다행이다......정말....

강 교수님이 가망 없다고 했는데....

정말 다행이다...정말......”

강 교수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내 뺨을 두드리던 의사는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은설 씨. 강 교수님이 뭐래요? 이젠 괜찮데요?”

승호의 물음에 처제는 말없이 조용히 미소만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조금 전 꿈에 보았던 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승호와 함께 온, 처음 본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지가 궁금했다.

칠흑 같은 검은 생머리를 한 채, 다소곳이 승호 뒤에 서있는 작고 예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민소매 원피스를 앞쪽으로 바짝 밀어 내고 있는.....여자의 가슴이........너무나 도드라져 보였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승호가 뒤에 서 있던 여자에게 멈춰 있는 내 시선을 따라갔다.

“새끼. 이럴 거면 조금만 빨리 깨어나지.

나쁜 새끼....내 결혼식도 안 오고.

치우야! 우리 지난달에 결혼했어.”

“뭐? 니가? 결혼했어? 정말이야?

자식....어디서 저렇게 예쁜 분을 만났데?

정식으로 소개 시켜줘.

미안해요.

초면에 이런 모습으로 인사드려서....”

나는 승호 뒤에 서 있던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뭐?”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승호의 손이 순간 스르륵 풀렸다.

동시에,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던 그 여자의 미소가 단번에 굳어져 갔다.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던 승호의 얼굴이 고개를 돌려 처제를 향했다.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던, 처제의 표정 또한 그들과 같이 어둡게 변해있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사이,

병실 문이 열렸다.

고요하던 병실에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오빠!!!”

젖어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침대 곁에 바짝 다가와 있던 승호가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방금 들어온 여자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정성스레 꾸민 여자의 눈 화장이 눈물로 진하게 번져있었다.

“오빠....오빠,....”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여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향기가 내 얼굴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내가 기억하는.....절대 지울 수 없는 아내의 그 향기였다.

푸른색 짙은 매니큐어가 발려진 하얀 두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가느다란 여린 그 손이 무척 떨렸다.

“흐으윽.....오빠....오빠.....”

“어.....”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내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오래전....

카페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아내의 얼굴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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