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ravity (11)
인적이 드문 국도 가장자리에,
아직 덜 여문 붉은 빛 벚꽃이 이제 막 망우리를 터트리려하는 것 같았다.
봄의 한 중간에나 있을 법한 이른 봄 날씨에, 따스한 날씨를 즐기기 위해 드라이브를 가는 차들만 이따금씩 내 차를 가로질러 앞으로 달려 나갔다.
1년 전 즈음 이맘때.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쳤었다.
산속에 있는 아담한 호텔에서 아내와 함께 꿈같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 였다.
그때도 오늘같이 이렇게 날씨가 따스했었다.
[우와.....오빠.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오빠! 저기 벚꽃 봐요.
이제 막 피려는가 보다.
오빠! 오빠!
우리 벚꽃 활짝 피면 여기 다기 한번와요.
벚꽃 맞으면서 오빠하고 여기 걸어 다니고 싶다]
아내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차안에서 아련히 울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운전을 하며 시종일관 작고 예쁜 아기새처럼 재잘거렸다.
나를 보며 벚꽃이 만개하듯 활짝 웃던, 그때의 아내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200미터 앞에서 좌회전 하세요]
차분한 여자목소리에 내비게이션을 보니 벌써 목적지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좌회전을 하니,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만한 좁고, 다소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아래로 쭉 뻗어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는 아무런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비포장 된 흙길에 타이어 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이 길로 차가 다니긴 다녔던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천천히 흙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작은 회색 자갈들이 깔린 넓은 평지 입구에 다행히도 차가 들어섰다.
자갈이 깔린 넓은 마당 안쪽에 단층으로 된 검은색 긴 건물이 보였다.
커다란 상자 같이 생긴 검은색 건물 벽면은 통유리가 외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독특한 건물 형태 때문에 얼핏 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쪽 구석에 차가 두 대 주차해있었다.
그중 은색 세단은 엠블럼을 보니 고가의 수입차 같았다.
그 차들 옆에 주차를 하고서 차에 그대로 앉아,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를 왜 찾아 왔는지 아직까지 명쾌하고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소 혼란스런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 보니 산 중턱에 홀로 파묻혀 있는 이곳이 무슨 요새 같았다. 얼기설기 연결되어있는 건너편 산봉우리가 마당 아래로 펼쳐져 보였다.
경치가 너무나 훌륭해, 나도 모르게 말없이 그곳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어떻게 오셨어요?”
언제 왔는지,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 여자는 세련된 안경을 쓰고 있었고, 화장도 진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사무직 여성이 입는 H라인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건물의 외형처럼 이 여자도 이런 외진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아...그게.....”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에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될 지 말문이 막혀 머뭇거렸다.
그때,
건물에서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새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정미 씨. 괜찮아, 내 손님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그 여자였다.
그때 우리 카페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너무나 진한 화장을 해서 긴가민가했지만, 삼백안의 눈으로 나를 보는 그 눈빛을 보곤 확신했다.
“아 네...선생님....”
젊은 여자가 그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곤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안쪽으로 사라졌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는 그 여자의 입술엔 자신이 입고 있는 새빨간 미니스커트와 똑같은 색깔의 립스틱이 발려 있었다.
그 색깔이 너무나 선명한 핏빛이었다.
“오시기 힘들지 않았어요? 여기 찾기 힘들었을 텐데.....”
여자가 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많이......늦게 오셨네요..”
입술 색과는 달리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한 그 여자의 얼굴은 누가 봐도 예뻤지만, 동시에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저기....”
“들어가시죠.....”
여자가 내 말을 끊고 뒤돌아 앞장섰다.
타이트한 새빨간 미니스커트 아래 드러난 맨다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여자의 엉덩이가 뒤틀려 그 부위가 도드라져 보였다.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며 걸어가는 여자의 걸음걸이가 조금 독특했다. 원래 저렇게 걷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몸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허리로부터 시작해 목까지 감싸고 있는 아이보리 색 반팔 폴로티 또한 여자의 몸매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가 조금 전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늦게 오셨네요.....’
지금은 해가 떠있는 오후 2시인데....
늦게 왔다니.
그리고 카페에서 얼핏 한번 본 것뿐인데....
이 여자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를 따라 검은색 건물로 들어가니 특이한 향이 가득했다.
그 날...이 여자가 카페에 왔을 때, 여자 몸에서 나던 짙은 우드계열의 그 향인 것 같았다.
“여기 앉아요,”
넓은 통유리를 통해 아래로 펼쳐진 산골짜기가 잘 보이는 곳에 여자가 자리를 안내했다.
나는 여자가 하라는 대로 두툼한 방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통유리를 보니 산꼭대기에게 있는 무슨 정자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때요? 여기 경치 좋죠?”
여자도 자리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선생님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밖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가 다가와 물었다.
“음.....모란꽃차로 준비해줘요”
“네!”
여자의 말에 젊은 여자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서둘러 물러났다.
“저기....저 기억합니까?
“그때. 대학 건너편에 있는 사장님 카페에서 제가 명함 드렸잖아요. 근데 저 몇 살로 보여요?”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삼십대 초반 정도. 저하고 비슷할 거 같은데....”
“호호호......감사한 일이네요.”
여자가 재미있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여자가 웃으며 몸이 들썩거리자 안 그래도 짧은 새빨간 미니스커트가 허벅지를 타고 조금씩 위로 당겨 올라갔다.
그러자 허벅지 속까지 훤히 들려다보였다.
“저 사실. 올해 마흔 여섯인데.....후훗....”
내 시선이 여자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여자의 얼굴은 짙은 화장을 했지만, 그 흔한 주름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여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지금 내게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 불쾌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미안해요. 미안해......장난 아니에요. 정말 마흔 여섯이예요.”
자신을 빤히 보는 내 얼굴이 불편했는지 여자가 웃음기를 줄이며 서둘러 말했다.
유리테이블 위, 하얀 찻잔에 열기를 담은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그리고 찻잔 안에 이름 모른 자주색 꽃잎이 떠 있었다.
“모란꽃차 예요. 절대적 미.....모란꽃엔 그런 꽃말도 있죠.”
여자가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담았다.
“그때. 왜 그런 말을 저에게 한 겁니까?”
여자가 찻잔을 놓기도 전에 말했다.
내 목소리에 진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여자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여자의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저를 압니까? 그리고 우리 와이프를 알아요?”
“세상엔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죠.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상극이라고 말하죠.
쉽게 말하면 물과 불, 찬 것과 더운 것 등 서로 정반대되는 속성이 있을 경우에 상극이라는 말을 쓰죠.
불과 물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소멸되죠.
둘 다 사라져버리죠. 영원히....“
“허어.....”
여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미친 여자가 내뱉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찾아 왔다는 것이 무척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여자의 분위기가 잡다하고 천박한 무속인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엔 여전히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이제 그만 아내 분을 그냥 놓아주세요.
그래야지....아내분도 살고......당신도 살아요.
그리고 당신 주위 사람들까지....”
“하하.....왜요? 그쪽한테 굿 이하도 할까요?
시끌벅적하게 굿 한판 벌이는데 얼마면 되요?”
나는 허탈한 웃음소리까지 내며 비꼬듯 여자에게 쏘아붙였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이러는 건, 미련인가요? 아니면......책임감 같은 거?”
여자가 웃음을 참는 듯이 입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있었다.
“아내 분은 그렇게 살아야 될 운명이에요. 지금 즈음이면 아내분도 스스로 그걸 깨달았을 수도 있고.......이젠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누가 그 길을 막아 세운다고 해도 절대 멈출 수 없어요.
아내 분은 보통 여자들하곤.....달라요.....
그리고 어쩌면....아내분도 그 길을 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씨발....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이따위 점이나 보러 여기 까지 찾아 온지 알아?”
잘 꾸며진 건물 내부가 내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자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 봤던 젊은 여자가 거실 쪽으로 나와선 겁먹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 여자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답답하다는 듯 그리고...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최면이 걸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 삼백안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잊혀져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내뱉은 말이 후회가 되기시작했다.
내 앞에 놓여 있던 예쁜 꽃잎이 담겨진 차가 식지 않았는지 여전히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생전 처음 맛보는 차였다.
“해어지화[解語之花] 라는 말이 있죠.
당 현종이 며느리였던 절세가인 양귀비와 예쁜 후궁들을 데리고 어느 호숫가에 산책을 갔다가 양귀비를 비유하며 했던 말이죠.
모란꽃은 보기에도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한 꽃이지만, 맛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평생 그 맛과 향을 잊을 수 없죠.
꽃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시들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지만, 그 맛과 향은 절대 쉽게 지워지지 않아요.”
여자가 삼백안의 그 눈을 살며시 감고서, 그 모란꽃차를 다시 음미하듯 마시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조금 전 맛본 그 차의 진한 맛과 향이 쉽사리 가시지 않고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넓은 창가를 바라봤다.
밖이 어둡게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푸른 나무들을 환하게 밝히던 빛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몰려, 한 치의 틈도 없이 그 바다같이 맑고 푸르렀던 하늘을 온통 새까맣게 뒤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