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77)

Depravity (10)

그렇게 따스하게, 

나를 안아주던 침대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내게 안겨 쌕쌕거리며 아기처럼 자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창가에서 어슴푸레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른 새벽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마를 손으로 훔치자 땀이 흥건했다.

힘겹게 일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동안 멈춰있던 뇌가 평상시처럼 깨어나도록 잠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뻑뻑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깨어났다. 

밖에서 속삭이는 듯 소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보이지 않아 괜한 걱정을 해서인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아내가 거실에 있을 거란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아내가 거실에 TV를 켜놓은 걸까?

작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실에 있을 아내가 궁금해, 침실 문 앞 즈음에 다다랐을 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TV소리가 아니었다. 

그 가냘픈 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두 여자의 대화였다.

침실 문을 소리죽여 조금씩 열었다. 

거실도 침실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흐흐윽......”

낮은 소리로 흐느끼는 여자의 소리였다.

“언니.....왜 그랬어.....흐흐흑.......왜......도대체....”

울먹이며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처제의 목소리였다.

처제는 어제 미나집에서 잔다고 했는데, 왜 지금 이 새벽에 처제가 거실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다 봤어. 그 사람이 그거....다 보여줬어. 언니가......왜 그런 거야. 왜!!!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누구에게 들킬까봐 숨죽여, 처절하게 외치는 그 처제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송곳같이 깊게 찔러 댔다.

“은설아.....”

그리고 아내의 목소리도 처제의 그것처럼 젖어있었다.

“그 사람이 말한 거 다 사실이야? 정말 그런 거야? 

나는 이해가 안 돼....

왜 언니가 그런 사람하고 그런 거야?”

“은설아. 미안해. 다 언니가 잘못했어.

다 언니 때문이야. 미안해.....” 

“처음엔....그 사람 말...믿지 않았어....

그런데.....언니가....그러는 거, 

그 사람이 보여줬어.

한 번이었다면....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언니가 실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어...

그런데.....왜!!!”

“은설아...언니가 미안해. 이젠 괜찮을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게....미안해....”

“흐흑.....나.....그 사람하고....

그 사람이....나.....”

처제의 울먹이는 소리가 계속 내 귀에 들어와 박혔다.

나는 조금 열려있던 침실 문을 닫았다.

괴로웠다. 

더 이상.....그 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을 닫았음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어렴풋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따스한 손길이 내 얼굴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따스한 손길이 아내일 것이라 생각했다.

눈을 떴다. 

하지만 따스한 그 손길은 아내의 그것이아니라, 창에서 쏟아지던 햇살이었다. 

또 다시 나 홀로 침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머리가 개운했다.

매일 일어날 때 마다 나를 짓누르던, 그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아내가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는 화장대 거울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오빠? 좀 괜찮아요?

너무 깊게 잠든 거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오빠! 오늘은 카페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요.

은설이한텐 말해뒀어요.

아침 해놨으니까. 꼭 먹어요.]

시간을 보니 오전 10시 40분이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대충 씻고 바로 카페로 나갈 생각이었다.

욕실로 가던 중 식탁을 보니 아내가 아침을 차려놨는지 식탁위에 예쁜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방에서 봤던 노란 것도 보였다.

[오빠!!! 아침 꼭 드세요!!!]

아내가 차려둔 밥맛이 좋았다. 

그 지긋지긋한 두통 때문에 최근엔 거의 아침을 걸렀었는데, 뭔지 모를 달달한 죽과 미역국을 몇 수저 입에 넣으니 싸늘하게 식어있던 내 위장을 따스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늦은 아침을 먹고 침실로 가니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형부. 형부. 오늘은 나오지 마세요.

미나하고 둘이서 잘하고 있어요. 헤에...]

처제였다.

[김 사장님. 

지금까지 자료는 모두 다 보내놨어요.

그리고, 지금 황 경태 사무실 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장 실장....

노트북을 열어젖히며, 어제 신 혜원이 내게 하려했던 장 실장에 관한 이야기가 뭘까 갑자기 궁금했다.

나는 장 실장이 보내 놓은 암호가 걸린 대용량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모두 풀어놓았다. 

워드파일과 사진파일, 그리고 동영상 파일이 일자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찬찬히 그것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화장대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인지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나는 꼼짝달싹하지도 않고, 마우스만을 달각거리며 노트북 화면만을 응시했다.

동영상과 사진파일에 황 경태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두 개의 동영상 파일.

예술대 앞에 처제를 태운 채, 한 동안 서있던 황 경태의 차가 이동했다. 장 실장의 차가 그 차를 따랐다.

황 경태의 차가 3층으로 된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정확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영상에 찍힌 지나온 도로와 건물들을 볼 때 대충어디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황 경태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으로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조수석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황 경태가 허리를 조금 굽혀 뭐라고 했다.

잠시 후 조수석에서 체제가 내렸다. 

잠시 처제를 보며 웃던 황 경태가 건물 쪽으로 향하자, 조금거리를 두고 처제가 그를 따랐다. 

반짝이는 하이힐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늘씬한 다리와, 남색 자가드무늬 원피스가 타이트하게 골반을 감싸고 있는 처제의 뒷모습이 무척 도드라져 보였다. 

마지막 동영상 파일이 플레이되었다.

건물입구에서 검은 사람 형체가 입구 쪽으로 나오자 사람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황 경태와 처제였다.

황 경태가 처제의 어깨를 바싹 끌어안고 있었다. 거의 반쯤 안긴 채, 처제는 고개를 푹 숙이곤, 그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 뭐야....스타킹......맨다리네.....]

동영상에 함께 녹음된 장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 실장의 말처럼 처제의 늘씬한 다리를 감싸고 있던 검은 스타킹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햇살이 반사된 처제의 쭉 뻗은 하얀 맨다리만이 반짝였다. 

그리고 너무나 화사하게 화장을 했던 처제의 얼굴도 변해 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화장이 지워진 건지, 번진건지 옅어져 있었고, 입술에 발려있던 붉은 립스틱이 연한 핑크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황 경태가 조수석 문을 열려다 무엇인가 잊은 듯 잠시 머뭇거렸다. 

처제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황 경태의 팔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와 처제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러자 키도 큰데다 하이힐까지 신은 처제의 하체가 황 경태의 하체에 맞닿았다.

황 경태의 바지 속 성기가 있는 부분이,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처제의 둔덕에 자석처럼 정확히 들러붙어 있었다.

처제를 끌어 앉은 채, 웃으며 처제의 얼굴을 빤히 드려다 보던 황 경태의 얼굴이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처제의 얼굴로 곧장 향했다. 

황 경태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처제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줌이 당겨지더니 두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황 경태의 혓바닥이 처제의 입술 사이로 드나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제는 꼼짝달싹 못하게 그렇게 안겨, 별다른 반응 없이 황 경태의 입놀림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립스틱이 모두 지워진 처제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번갈아가며 황 경태의 입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지 처제의 미간이 간간히 찌푸려졌다.

은색 배달 가방을 든 남자가 건물로 들어가다 말고, 그 모습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황 경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만 충실했다. 

진한 키스를 하며 한 손으론 타이트한 원피스 위 도드라지게 부풀어 올라 있는 처제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풀었다를 계속 반복했다. 

처제가 황 경태의 품에서 풀려나왔다. 그러자 조수석 문을 열고 처제가 급하게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아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 경태가 웃으며 운전석에 오르자 차는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장 실장의 차가 그 뒤를 따랐다.

화면에 동영상이 계속 플레이되고 있었지만 나는 노트북 전원을 꺼버렸다. 

언젠가 부턴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실 소파에 편하게 누워있었다.

선잠에 빠졌다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놀라, 눈이 떠졌다 감겼다를 반복했다.

여자들의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TV에선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자들 무리가 카페에 둘러 앉아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너무 예뻐요. 호호호]

[맞아요. 선생님.....]

[여기 커피 어때요?]

한껏 치장을 한 젊은 여자들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시종일관 소란스레 떠들어 댔다.

모든 여자들의 웃음과 대화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상석에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왠지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분명히 본 듯한 모습인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TV속의 그 여자들을 보던 내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하지만,

불현 듯, 내 머릿속에서 우리 카페의 창가자리가 영화처럼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카페 창가 자리에 여자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의 입에서 연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자들의 말과 웃음소리는 그중 한 여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생님. 여기 어때요? 커피 맛 괜찮죠?]

[오늘 선생님 너무 화사하시다. 호호호.....]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은 맞은편에 앉아 쉴 새 없이 말을 하던 여자들 무리 쪽을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여 나에게 머물러있었다.

여자의 검고 또렷한 눈동자 아래에 흰색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삼백안..

나는 그 여자의 눈길을 서둘러 피해 버렸다.

[잘 마셨어요. 여기 커피 맛있네요?]

[네? 아.....네...감사합니다]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는 짙은 갈색 아이블루우를 한 여자의 눈썹과, 흔치않은 삼백안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음.....저기요.....사장님]

여자가 무엇인가 망설이듯이 몇 번 립스틱이 발려있는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네?]

[음.....이걸.....어떻게 말해야하나?

잠깐만요. 이리로 잠깐만.......

여자의 얼굴이 내게 조금씩 다가왔다. 그러자 여자의 몸에서 풍기는 향이 느껴졌다.

무슨 향수 인지 생전 처음 맡아보는 짙은 우드계열 향 같았다.

여자가 다른 사람이 절대 들어서는 안 될, 무슨 비밀스런 말을 내게 하려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여자 쪽으로 조금씩 향했다.

여자의 입술이 내 뺨에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의 떨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타고 들었다.

[사장님....아내 분........죽어요......

꼭 한 번.....와요.....]

갑자기 내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있던 내 몸은 어느새 소파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급하게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달려갔다.

예전 아내로부터 선물 받았던 갈색 명품 지갑이 화장대 위,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지갑 속에 쌓여 있던 명함 뭉치들을 한꺼번에 꺼내어 화장대위에 펼쳐 놓았다.

그중 하나가 찢어버리려 한 것처럼 유독 구겨져 있었다. 

나는 엉망으로 구겨진 그 검은 명함을 집어, 한 동안 그것을 들여다봤다. 

그 명함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나 전화번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명함엔 한자로 적혀 있는 세 글자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異物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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