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77)

Depravity (2)

모든 시간이 일시에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잠시 위로 올려졌다, 처제의 뺨을 세차게 내리친 아내의 하얀 손이 아래로 떨어져 굳은 듯 멈춰 있었다. 

처제의 얼굴은 아내가 내리친 반대 방향으로 힘없이 돌아가 있었다. 처제는 한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싼 채, 아내가 그런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고요하던 바람이 또 다시 아내의 얼굴을 몇 번 쓸어 올리자 긴 머리칼에 숨겨져 있던 아내의 옆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처제의 얼굴이 천천히 움직여 아내를 바라봤다.

처제가 여전히 자신의 뺨을 감싼 채 아내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리 때문에 머라고 하는지 들리진 않았다.

아내 또한 처제의 말에 무슨 말을 대꾸했다. 

아내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는지 처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내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지금까지 아내가 처제를 나무라는 것은 몇 번 봐왔지만, 이렇게......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내는 처제에게 오늘 저녁을 위해 뭘 먹고 싶은지 다정하게 물었고, 처제가 먹고 싶어하던 라자냐를 먹기 위해 이곳으로 장소를 정했었다. 

처제가 울먹이는 것 같았다. 처제는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무슨 말을 계속 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는지 처제가 말을 할 때 마다 몸이 조금씩 들썩였다.

나는 다시 화장실 쪽으로 가서 뒷문을 통해 중앙 홀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1층으로 나왔다.

좀 전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빌딩 한쪽 구석, 재떨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아파왔다. 

왼쪽 머릿속을 날카로운 뭔가가 짓누르는 심한 편두통 이었다.

아내의 행동은 무슨 일 때문에 처제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처제의 뺨을 때리는 아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내가 다시 레스토랑으로 올라갈 순 없었다. 테이블에서 나를 바라볼 처제와 아내의 얼굴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다 피고도 시간이 한동안 지난 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아내의 목소리였다.

[여보...미안....미안해서 어떡하지? 나오려는데 카페에 갑자기 손님이 많이 몰려서.....미나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그렇네....]

[아...그래요?]

[그래서....오늘은 당신하고 처제 둘이서 식사하면 어떨까?]

[아......]

아내의 목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았다.

[그럼 오빠 저녁은....]

[나는 뭐.....여기서 미나하고 대충 먹지 뭐....걱정하지 말고....처제하고 맛있는 거 먹어]

[네. 알겠어요. 집에서 봐요.....]

아내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이전과 다르게 나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 따위는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어머! 오빠? 저녁은요? 벌써 끝났어요?”

미나가 카페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응.....그래....일이 좀 있어서.....”

“오빠. 오랜만이에요.”

테이블을 치우는지 안쪽 홀에서 빈 머그컵을 들고 나오던 수연이 내게 말했다.

“그래 수연아....오랜만이다....하하....준비는 잘돼?”

내 표정과 행동이 평상시와는 다르게 부자연스러웠던 것일까. 미나와 수연은 말없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나 옷 좀 갈아입고.....”

뭔가를 들킨 듯, 그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금방 안쪽 룸으로 들어와 버렸다. 

방 한쪽 구석에 있던 커다란 전신 거울에 들어가 있던 내가, 또 다른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정성들여 손질한 머리가 미나의 말처럼 훌륭했다.

아내가 그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처제의 뺨의 내리칠 때, 바람에 살짝 드러난 아내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아내의 얼굴이 그 매서운 바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책상에 올려져 있던 하얀 약봉지에서 오늘 오전 의사선생님이 처방해준 약을 하나 꺼내 삼켰다.

스마트폰에 아내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진욱 형에게 전화했다.

[그래 치우야. 근사한데서 저녁 먹고 있냐?]

[아니요. 일이 좀 있어서 카페로 왔어요]

[그래?]

[장 실장...오늘 볼 수 있을까요?]

[너 시간되겠어? 장 실장한테 내일 보자고 했는데....내가 다시 연락해볼게]

시간이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참 신기해요. 우연이란게 말이죠. 그날.....

차도 하나 다니지 않던 그 새벽, 시골 국도에서...

치우 씨가....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가고.....

나를 도와줬다는 게...]

양 선생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말속에 담겨진 선명하지 않은 수많은 의미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러이 휘젓고 다녔다. 

침대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하얀 쇼핑백이 눈이 들어왔다. 

잠시 고민하다가 양 선생이 건내 준 그 쇼핑백에서 새 카디건은 꺼냈다.

접혀 있던 카디건이 펼쳐지면서 바닥에 하얀 봉투가 떨어져 내렸다.

하얀 봉투 한쪽 구석이 불룩했다.

봉투 속에는 까만 USB가 들어 있었다.

[소린중학교]

그 까만 USB 정중앙에 아내의 학교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기억을 되돌려 보니 집에서 아내가 가끔 사용하던 USB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수업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배포한 그런 USB 인 것 같았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봉투에 말려 카디건에 감싸져 있던 그것이, 양 선생의 실수로 쇼핑백에 딸려들어 간 게 아니란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USB를 책상에 있던 노트북에 연결했다.

새 창에 두 개의 파일이 보였다.

첫 번째 파일명은 ‘회의실’, 두 번째 파일은 ‘주차장’ 이었다. 첫 번째 파일은 4일전......그리고 두 번째 파일은 그 다음날 USB에 저장된 동영상 파일이었다.

첫 번째 회의실 파일을 실행했다.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내부가 보였다. 하지만 복도 쪽은 불이 꺼졌는지 어두웠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예전 내가 아내의 학교에 찾아 갔을 때......

양 선생이 아내를 미친 듯 몰아붙이던.....1층 회의실이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이 그때 내가 몰래 회의실을 들여다보던 각도와 똑 같았다.

[응?......이 선생.....]

잘 들리지 않았다. 볼륨을 끝까지 올려도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회의실 앞쪽에 아내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내 옆에 한 남자가 아내 쪽으로 향해 앉아 있었다.

둘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대화라고 하기 보단.....남자의 일방적인 말이 이어졌고, 아내는 가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박 선생이었다.

경주에서 울고 있던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달래주던.......그리고 몇 주 전 회식을 했던 고깃집 간의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내의 대해 말을 하던.....그 박 선생이었다. 

카메라 화질 때문인지 형광등의 역광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 듯 보였다. 그건 아내의 뽀얀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동영상에서는 박 선생이 주도하고 있는 일방적인 대화가 지속됐다. 아내는 긴장한 듯 몸을 조금 움츠린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동영상이 끝날 때가 다됐지만, 왜 양 선생이 이 따위 동영상을 내게 전해줬는지 이해가되지 않았다.

첫 번째 동영상이 끝나고 자동으로 두 번째 ‘주차장’ 파일이 플레이됐다.

화면전체가 검게 변한 채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여자의 숨소리였다. 

흔들리는 계단을 지나 이내 불이 꺼진 복도에 도착하자 하이힐 소리가 멈췄다. 

2층 복도인 것 같았다. 

까맣던 화면에 갑자기 노란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가득 찼다. 

주차장이 내려다 보였다. 아내의 학교 뒤편에 있는 그 주차장이었다.

화면 정 중앙에 홀로 주차되어 있는 아내의 하얀 승용차가 보였다. 

잠시 후 건물 끝에서 몇 번 보았던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자의 손에 들려있는 백을 확인하자 그 여자가 아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차 헤드라이트에서 선명한 빛이 쏘아졌다. 그러자 2층 창가에서 아래를 향하고 있던 화면이 급하게 움직여 다시 검게 변했다.

몇 초 뒤, 다시 노란 가로등 불이 보였다.

아내의 차는 헤드라이트를 켠 채, 처음 주차된 장소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아내가 빠져 나왔던 건물 끝에서 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다가왔다. 그 빠른 걸음이 마치 표시나지 않게 뛰어오는 것 같아보였다. 

그 사람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라탄 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차 조수석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영상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핏 보이는 모습에 학교 남선생 중에 하나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건물 한쪽 벽면을 비추던 아내의 차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동시에 조용하게 울리던 엔진소리도 잠잠해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내의 실루엣이 노란 가로등이 어렴풋이 보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 또한 그러했다.

아내의 얼굴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향해 있었고, 조수석에 올라탄 사람의 얼굴은 아내에게 향해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동영상은 너무나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 때문에 차 안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운전석 조수석 모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아내의 차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렸다. 그리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아내의 차가 굵은 곡선을 그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동영상이 끝나버렸다.

“미친년....”

나는 검게 변한 채 끝나버린 노트북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양 선생이 카페까지 찾아와 내게 왜 이걸 전해주고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심지어 양 선생.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노트북을 닫았다.

“오빠. 저기....진욱 오빠....아니 약사님 왔어요...”

미나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는 것 같았다. 

홀로 나가보니 진욱 형이 BAR 앞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왔어요?”

“어. 그래.”

“미나야. 오늘은 지금 닫자....”

미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씨도 여기 있었네요. 결혼 준비 한다고 바쁘죠?”

“네...안녕하세요......”

어색했다.....

나와 진욱 형.....그리고 수연이와 미나.....모두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바로 이 맨바닥에서.......브래지어 사이로 삐져나온 미나의 뽀얀 젖가슴을 빨며 벌어진 그녀의 다리사이에서 팬티를 끌어내 그 속을 파고 들던 진욱 형의 손이 떠올랐다. 

미나와 수연이는 유난히 서둘렀다.

진욱 형이 이따금씩 표시나지 않게 미나를 흘깃 보곤 했다.

미나와 수연이는 진욱 형이 카페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정리를 마치고, 인사를 하곤 서둘러 카페를 빠져 나갔다.

“장 실장 곧 올 거야...너는 요즘 괜찮아? 아직 잠을 잘 못자니?”

“네...뭐....”

“너 약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나한테 물어보고 먹어.”

나는 말없이 냉장고에 있던 맥주 캔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카페 문이 열렸다.

“아이고...안녕하십니까. 벌써 다 계시네.....”

카페 문 앞에, 

한 사내가 싱긋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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