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77)

Depravity (1)

“치우 씨. 요즘은 좀 어때요? 약은 다 드셨고?”

굵은 뿔테를 낀 의사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방해주신 약 먹은 날에는 조금 낫습니다.”

“가능하다면 최소한 약을 줄이려고 노력해보세요. 사람의 신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 더 강한 약을 원하게 되죠.

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집니다. 처음 느끼는 외부자극은 강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자극에 노출되면 조금 더 특별한 그리고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 같이....

그리고 절대 술은 드시지 마시고....” 

의사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신경정신과 진료실 공간 또한 이제는 익숙해졌다.

3주전 아내를 그 카페에서 데리고 나온 이후 통 잠을 잘 수 없었다.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매일을 피곤에 지쳐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때 승호와 함께 갔던 신경정신과를 홀로 찾아갔다. 

약을 타고 상담을 받기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늘이 3번째 이곳에 오는 날이었다. 

3주전....그 날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 아내를 학교에 데려다 줬다. 

불안해하던 아내의 얼굴은 나날이 좋아 졌다.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내가 꿈을 꾼 듯이 그렇게 모든게 잊어 지고 있었다.

처제는 여전히 카페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다. 이제 아내는 처제에게 더 이상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승호와 수연이는 한 달 후 결혼을 할 예정이다. 

수연이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연락을 끊고 지내던 경주 본가에 승호와 함께 갔다. 수연의 부모님이 그녀를 붙잡고 한참동안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세희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다시 카페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그날 이후 진욱 형은 한 사람을 고용했다.

예전에 형사를 하다 불미스런 일로 옷을 벗고나와 흥신소를 하는 장 실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진욱 형이 내게 사람을 고용하자고 했을 때, 처음에 나는 반대를 했다. 아내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기가 찝찝했다. 하지만 진욱 형의 끈질긴 설득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새끼.....

[치우야. 괜찮니?

나....그 새끼 봤다.

니가 은비 씨 데리고 나갈 때...

그 새끼가 숨어서 다 보고 있었어...

그 새끼가 그 호텔에 묵고 있어]

진욱 형이 보낸 동영상 오른쪽 끝에 나와 아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방금 집에서 나온듯한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등산복 스타일의 바지와 목을 감싸는 폴라티를 입고 있었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그가 황급히 아치형 통로 입구에 있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나와 아내가 차를 타고 주차장을 떠날 때까지 그는 그 기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자 카메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욱 형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형부! 형부! 오늘 친구들하고 밖에서 점심 먹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어?”

지워지지 않던 그 얼굴이, 나를 부르는 처제 목소리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애들이 밖에서 보자고 해서요.....”

처제의 얼굴이 아내처럼 큰 눈을 귀엽게 깜빡이며 내가 바싹 다가와 있었다.

“점심 먹을 거야? 몇 시에 올 건데?”

“음.....점심 먹고....차 마시고.....”

“그럼 언니하고 오늘 저녁 먹기로 한건? 취소?”

“아니요!!! 그럼 애들하고 좀 더 있다가....저녁에 바로 갈게요.”

“그래.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하고...”

“에이...형부.....제가 아기 에요? 음......형부의 지나친 과잉보호......히히히...”

처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카페는 조금 심심했다. 늘씬한 몸매로 사뿐사뿐 카페 안을 오가는 처제 모습은 가끔 무용 공연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오빠! 요즘도 불면증 심해요?”

Bar 자리에 앉아 있던 미나가 물었다.

“아직 좀 그렇네...”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요. 방에서 좀 쉴래요? 저 혼자 괜찮은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미나의 얼굴에....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나야. 너 진욱 형 어때?”

“네?”

잡자기 미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의 아니게 진욱 형과 미나가 섹스를 하던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했던 나였다.

“진욱 형. 너보다 나이는 좀 많아도.....너도 알겠지만 괜찮은 사람이잖아.”

“오빠....그냥....그날은.....사고였어요.”

미나가 말하는 그날은 세희가 놈들에게 끌려가 그 일을 당한 다음날 카페에서의 일이었다. 

미나는 진욱형 약국 개업식 날 새벽, 안방 침대에서 그와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봤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음....사고?”

미나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카페 내부 CCTV에 찍혔던 장면이 떠올랐다. 

카페 홀 바닥에 진욱 형이 움직일 때 마다 그의 목을 꼭 감싸고 있던 미나의 두 팔..... 

약국 개업식 날, 술에 취한 남녀가 분위기에 휩쓸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에서의 일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고는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미나의 눈이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딸랑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미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카페 문 앞에 한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내가 뭔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하고 그 여자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여선생들이 자주 입는 깔끔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카페 앞에 서있는 여자는 바로 양 선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나는 왜 이 여자가 나를 찾아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불안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양 선생의 입술이 몇 번을 고민하다 천천히 열렸다.

“놀라셨죠? 이렇게 불쑥.....찾아와서....”

“아....네......그게....”

나 또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아득했다. 

양 선생이 옆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내게 내밀었다.

“이거....그때....”

나는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그날.....만신창이가 된 양 선생을 집까지 태워줬을 때.....짖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알몸 감싸고 있던 내 카디건이었다. 똑같은 새 옷을 샀는지 한쪽에 택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아.....안 그러셔도 되는데.....”

“놀랐어요. 이 선생 남편 분......인거 알 곤.....그때 도와주셔서....고마웠습니다.”

악마같이 아내를 노려보며 앙칼진 소리 지르던 양 선생의 그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아내는 요즘 어때요? 학교에서...”

“네. 이 선생은 항상 그렇듯 잘 하고 있어요. 학생들도 이 선생 좋아하고....”

“아...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많이 도와주십시오.” 

양 선생과 같이 앉아 있는 이 공간이 내겐 너무나 힘든 순간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이건 양 선생도 똑같을 것이다. 

한동안 아무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저기.....많이 고민하다 왔어요.”

“네?”

‘다른 목적이 있다. 양 선생이 나를 찾아 온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말없이 양 선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왁스를 발라 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지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오빠. 저 마쳐서 이제 가려는데....은설이는요?]

스피커폰을 통해 그립 던 아내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처제. 친구들하고 약속 있다고 해서 좀 전에 나갔어. 그쪽으로 바로 간다던데?]

[그래요? 내가 전화해봐야겠다]

[그래. 둘이 먼저 만나든지....나도 이제 씻고 나 갈려고 준비중이야]

[알겠어요. 오빠, 빨리 와요. 보고 싶어요] 

거울 속에 바삐 머리를 매만지는 내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하지만 내 시선은 양 선생이 전해준 그 쇼핑백이 신경쓰이는지 그곳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와우....오빠. 오늘 신경 좀 썼는데요. 머리....굿....”

방에서 홀로 빠져나오던 나를 보며 미나가 말했다.

“혼자 괜찮겠어?”

“조금 있다가 수연언니 온다고 했어요.”

“미안해...담엔 다 같이 근사한데서 저녁먹자”

“치이....좋은 시간 되세요. 언니하고......그리고 오늘은 좀 빨리 들어가서 푹 자구요”

택시에 올라 탄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택시는 카페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건지 도로에 차들이 꽉 막혀 조금씩 나아가다 멈추기만 반복 했다.

저녁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하려 스마트폰을 보니 메시지가 몇 개 와있었다.

[치우야. 오늘 저녁에 시간되니? 장 실장 연락 왔는데, 좀 보자던데.....]

진욱 형이었다.

나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치우야. 바쁜 모양이네?]

[아니요. 지금 저녁 약속 있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장 실장이 오늘 보제요?]

[그래. 너는 오늘 안 되겠네.....그럼 내일 보자고 하지 머. 알았다] 

장 실장이 보자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아내와 처제가 그 레스토랑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 더욱 걱정되었다.

평소에 30분이면 도착할 곳이 한 시간 가까이 지체됐다.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스토랑이 있는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조금 이른 저녁시간이라서인지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좋은 자리의 테이블이 거의 비어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던 테이블에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홀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처제였다.

테이블위에 반짝이는 크리스털 물 잔이 한 개인걸 보니 아직 아내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처제의 뒷모습.....바람에 조금씩 살랑이는 머릿결이 마치 CF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처제의 뒷모습을 몇 번 찍었다.

빨리 화장실에 갔다가 몰래 찍은 사진을 처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도 처제는 처음본 모습 그대로였다.

멀리서 처제를 부르려는 순간.....

바삐 또각이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처제를 뒤에서 몰래 촬영했던 그곳, 중앙 통로에서 아내가 빠져나와 바삐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빌딩 사이를 방황하던 바람 한줄기가 아내를 맞이하듯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아내의 옆모습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처제가 앉아 있던 곳에 아내가 다가가자 야경을 보던 처제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의 걸음걸이가 더욱 빨라졌다.

아내는 처제가 앉은 의자 바로 앞까지 멈춤 없이 다가갔다.

“여.....”

내가 아내를 부르려는 순간,

아내의 새하얀 손을 위로 잠시 올라가더니.....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처제의 뺨을.....그대로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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