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drance (4)
카페 안은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투명한 통유리를 통해 미나와 은설이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페로 바로 들어가려다 조금 뒤로 물러서서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은설이가 환하게 웃으며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테이블에 조심스레 올려놓자 한참 전부터 은설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남학생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은설이가 물러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두 남학생이 그녀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 무슨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야! 저 여자 어때? 개 예쁘다, 몸매.....작살인데......얼굴도......존나게 맛있게 생겼네....’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졌다.
처제는 그다지 짙지 않은 화장임에도 은비가 그러하듯, 유난히 뽀얀 얼굴 때문인지 연붉은 립스틱이 도드라져 마치 매운 진한 화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노출이 심한 옷이 아닌 그냥 루즈하고 평범한 원피스를 입은 것뿐인데.......늘어트린 긴 생머리와 무용으로 달련된 날씬한 몸매 때문인지, 원피스에 숨겨진 은설이의 몸 구석구석이 더욱 자극적인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은비와 조촐한 약혼식을 한 그날....
호텔 룸에서 은비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은설이와의 그 작은 사고가 문득 생각났다.
은설이는 분명히 그때와는 완전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런 은설이를 보고 있으니 아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형부 왔어요?”
카페로 들어서자 처제가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그러자 좀 전 처제를 훑어보던 남자들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향해 있는 게 느껴졌다.
“바빴지? 힘들지 않았어?”
“아니요. 너무 재미있어요.”
처제는 내게 바짝 다가와 팔짱을 꼈다. 처제의 부드러운 가슴살이 팔에 그대로 느껴졌다.
“미나야! 너는 좀 쉬어라”
Bar에 있던 미나의 얼굴이 오전보다 더욱 피곤해 보였다.
커피를 곧 내리려는지 미나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나는 살며시 뺐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미나가 괜찮다는 듯 조금 과장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미나의 얼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다크써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방에 가서 좀 쉬어.”
“그래그래. 미나야. 너 지금 많이 피곤해 보여. 형부 왔으니까. 이제 좀 쉬어.....”
처제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미나가 안쪽 방으로 들어간 후, 카페에 손님들이 몰렸지만 이런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처제는 신기하게도 너무나 능숙하게 쳐내갔다.
일을 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아내에 대한 생각과 몇 시간 전, 진욱 형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되새김을 하듯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나는....그렇게....그렇게....하나씩 정리를 해나갔다.
카페를 가득 메우던 손님들이 떠나고, 카페는 다시 오랜만의 여유가 찾아 왔다.
한쪽 구석에서 처제가 고개를 돌리며 긴 팔을 뻗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본격적인 무용을 하기 전,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처제! 피곤하지?”
“호호호....아니요. 형부. 나 다시 일본 가기 싫어요.....언니한테 말 좀 해주요....네?
나 여기 너무 재미있어요. 안 돌아다니고 여기에 형부하고 매일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어제 언니가 일주일 정도만 있다가 다시 나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마치 간절히 애원이라도 하듯....그런 처제의 눈빛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런 처제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카페를 예쁘게 밝히던 야외 간판의 불빛을 내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손님을 맞아들이던 표지판을 돌려놓았다.
[Closed,,,,,]
“어? 형부 벌써 닫아요?”
통유리 블라인드를 내리자 처제가 궁금한 듯 내게 물었다.
“오늘은......좀 쉬자. 처제 오랜만에 왔는데....이야기도 좀하고......”
완전히 내려진 블라인드를 통해 밖의 불빛이 이따금씩 카페 내부에 새어 들어왔다.
처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를 하며, 어젯밤 작은 방에서 아내와 함께 지저귀던 그 파랑새의 웃음소리를 내게 들려줬다.
테이블에는 칠레산 멜롯 와인 한 병과 예쁘게 잘린 과일치즈 조각이 놓여 있었다.
처제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한동안 내게 들려줬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8시였다.
내가 진욱 형 약국에 있을 때 아내로부터 오늘 학교에 일이 있어 조금 늦는다는 메시지가 왔었다.
나는 학교에서의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이미 알고 있었고, 오늘이.....나와 진욱 형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날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처제. 언니.....예전에 학교 다닐 때 어땠어?”
와인은 반 즈음 남겨져 있었고, 처제의 하얀 얼굴이 방금 붉은 색조화장을 올린 것처럼 변해 있었다.
“언니요? 호호호....어떤게 궁금해요? 남자친구 그런 거?”
“하하하...그래. 오늘 언니 비밀 모두 말해줘. 학교 다닐 때 몇 명이랑 사귀었는지......”
“음......”
처제의 붉은 입술이 잠시 부드럽게 위로 올라갔다.
“유명했죠....언니.....”
처제는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고 있다는 듯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유명했어?”
“호호호....이런 말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언니 알면 나 죽는데.....”
“하하하......무슨.....뭐 언니 예뻐서 남자들이 따라다닌 그런 시답잖은 그런 이야기겠지 뭐....”
나는 일부러 관심 없는 듯 그렇게 처제에게 말했다.
“언니 참 예뻤어요. 나도 샘이 날 정도로......
언니는 어릴 때부터 유명했어요. 아니지.....우리 자매가 유명했죠. 호호호.....”
예전에 아내가 보여줬던 사진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났다. 그 사진 속에는 두 손을 꼭 잡은 중학생인 은비와 초등학생인 은설이가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자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언니는 어릴 때도 예뻐서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모두 예뻐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갑자기 너무 변했다고 해야하나.....
키도 커지고.....얼굴에 젖살이 빠지면서 갑자기 너무 많이 변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예쁜 여자아이였는데.....갑자기 커서......예쁜 여자가 된 것 같은.....
언니는 고등학교 올라가면서부터 대학생처럼 보였어요. 몸매도 변하고.......물론 몸매는 지금 내가 훨~씬 좋지만.......호호호.....”
“하하하”
자신의 말에 어서 호응해달라는 듯 귀엽게 눈을 깜빡이는 처제의 얼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제도 예쁘지....근데.........글쎄.....언니 들으면 섭섭하겠다.”
“치이~. 형부도 참 팔불출이야....맘에 안 들어!
여하튼 그렇게 언니가 그렇게 갑자기 변했어요. 그러면서부터 난리였죠. 같은 학교 오빠들이 쉬는 시간에 언니 보려고 매번 우르르 몰려오고.....심지어 다른 학교에서도 소문이 나서 교문 앞에서 언니 기다리고......음....말도 마세요.
매일 매일 편지에....선물에......어떤 애들은 집까지 찾아와서 몰래 대문 앞에 선물도 놓고 가고 그랬으니깐요.”
“그렇게 남자애들이 언니 쫓아 다녔는데 사귄 애들은 없었어?”
“음.....언니는 애초에 그런 애들한테는 관심 없었던 것 같아요. 엄밀히 말하면.....언니 또래 남자들 한테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럼?”
“차라리 언니는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고 해야 되나? 선생님들이 언니 참 예뻐했거든요....
공부도 전교에서 5등 밖으로 나간적도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예의바르고.......그리고 너무 예뻤으니까.....
선생님들도 언니 많이 아끼고 챙겨줬어요.
형부도 아시겠지만, 우리 어릴 때 아빠 때문에 전학 많이 갔거든요. 어떤 학교에서는 1년.....짧게는 6개월.....그 당시 언니나 나나......그거 때문에 좀 힘 들었죠.
친구들하고 친해지려고 하면.....전학가고....그랬으니깐요.
그런데 다행이도....전학 간 학교 마다 선생님들도 너무 좋고.....우리 이해해주고 예뻐해 주셔서 크게 힘 들지는 않았어요.
후후훗......”
처제가 말을 이어가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 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처제가 짙은 자주색 와인을 한 모급 입에 담았다.
“이제 드디어 나오는 거야? 서론이 너무 길었어.”
“호호호.....언니는 전학 간 학교마다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꼭 한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고2 때였나? 뭘 찾다가 언니 책상을 열었는데요. 언니가 쓴 편지를 봤어요.
형부! 이건 언니도 몰라요 절대 말하면 안돼요. 알았죠?”
언니에겐 비밀을 꼭 지켜달라고 몇 번을 신신당부하고서 처제는 말을 이어갔다.
“언니 담임은 아니었고.....미혼인 영어 선생님이었나? 그랬을 거예요.
언니가 쓴 편지 내용이.....
항상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선생님하고 둘이 있을 때는 너무 떨린다는...선생님 향기가 너무 좋다는......
어우....지금 생각해도 너무 오그라들어....“
처제가 말을 하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작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네. 여고생들 그런 편지는 좋아하는 선생님들한테 한 번씩 다 써보는 거지......처제는 그런 적 없어? 분명히 있을 건데.......”
“호호호.....여하튼 언니 편지는 연애편지 같은 그런 내용들이었어요. 그때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뭘 알겠어요.
그런데 언니 그 편지 보고 나니까 계속 너무 궁금한 거예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언니는 벌써 어른 같고 나는 아이같이 느껴져서.....그런 질투심? 뭐 그런 거....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언니 책상을 열어 편지들을 몰래 몰래 봤어요.
근데 어느 날.
언니가 받은 편지를 봤어요.
놀랍게도 언니가 편지를 쓴 그 영어 선생님한테서 편지를 받은 거예요. 언니가.....
내용은 우리 은비 영어발음이 너무 좋고, 지금처럼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오늘은 머리를 올리고 왔는데. 너무 예뻤다는....
다음에는 집에서 맛있는 거 요리해 주겠다고.....
그리고........사랑한다........고......”
신나게 말을 이어가든 처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당황한 표정과 함께 굳어버린 처제의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오래전 기억 속에 깊숙이 잊어져 있던 그 기억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학교 1학년으로 돌아가 있던 처제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시 완벽하게 떠올라 버린 것 같았다.
나를 보는 처제의 커다란 눈망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벌써 닫은 거예요? 어! 은설이 너도 여기 있었어?”
조금 전까지 파랑새의 그 소리로 내 귀를 간지럽히던 처제의 목소리와 똑 닮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오늘 다른 반 선생님 한 분이 아파서 출근 못해서.....그 반애들 거 까지 채점한다고......”
카페 문 앞에는. 지금 처제와 내가 마시고 있는 와인색의 미니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을 신은 아내가 우리를 보며 환하게 있었다.
아내를 바라보는 처제의 긴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