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77)

Deception (13)

카페 앞에 도착해 차안에서 나를 바라보던 아내의 얼굴에 계속 떠올랐다.

아내는 내게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무엇인가 모를 작은 어떤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집을 떠날 때부터 그렇게 노력했던 새벽의 기억이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의 차에 보이스레코더를 숨겨놓은 것은 이제 또렷이 기억이 났지만, 내가 드레스룸에서 언제,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왜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 잠 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반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은 더욱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내가 처음 입고 나온 새틴 소재의 너무나 타이트한 스커트. 그 스커트위에 볼록하게 표시가 나던 아내의 그 둔덕까지.... 

아내가 입고 나온 그 옷은 너무나 예뻤다. 그리고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내가 그런 옷을 입은 여자를 본 것은 TV 스포츠 채널에서 몸매를 앞세우는 리포터들이나, 여자가 나오는 고급스런 술집에서였다.

과했다....

교사인 아내가 일하는 학교에서 입기에는 분명히 과해보였다.

“오빠. 커피 드세요”

Bar 구석에 멍하게 앉아있는 내게 미나가 갓 뽑은 커피를 내밀었다.

“고마워”

새벽의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그것을 받아들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음!!! 이거....커피 맛이 왜이래?”

커피를 삼키자마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매일 마시던....내가 좋아하는 커피 맛이 아니었다. 

커피를 내리고 있던 미나가 놀라 내게 다가왔다.

“미나야. 원두 바꿨어? 맛이 왜이래?”

“네? 아니요. 그대로예요. 오빠 마시던 건데.....이리 줘보세요”

내가 들고 있던 머그컵을 미나가 받아 들고 조금씩 맛을 보기 시작했다.

“에이...오빠!!! 괜찮은데. 같은 맛이에요. 깜짝이야. 난 또 상했거나 잘못된 지 알았잖아요.” 

입술을 샐쭉거리며 미나가 다시 내게 머그컵을 돌려줬다. 미나의 반응에 무안해진 나는 맛을 봤지만......내겐 여전히 커피 맛이 변해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승호가 점심을 때우기 위해 카페에 와서 그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인마. 뭘 그리 멍하게 있냐?”

미나가 내어준 에그베네딕트를 정신없이 먹던 승호가 내게 물었다. 그의 입술에 노른자의 흔적이 작게 묻어 있다. 

“야. 너 병원 아는데 많지?”

“당연하지 내 일인데....왜? 누가 아파?”

“내가 좀 가보려고....”

“니가? 하하하....몸살에 아파 죽어도 병원 안가 던 놈이 웬일이래? 그래...어디 아픈데?”

“너....신경정신과....아는데 있지? 기억이 안나.....분명히.......뭔가 있었는데.....기억이.......”

장난스레 놀리듯 나를 보던 승호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노른자가 묻어 있는 나이프가 접시에 살며시 놓였다.

대리석으로 반짝이는 3층짜리 병원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야이새끼....여기까지 왜 따라와서.....이제 가서 일해....인마”

“내가 니 보호잔데.....조용히 따라와 인마!”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 답답하던 차에 그냥 한번 던진 말이었는데, 승호는 기어코 자신이 거래하는 병원까지 나를 데리고 왔다. 

“어? 최 대리님 안녕하세요?”

두터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들이 승호를 반겼다.

“갑자기 웬일이세요?”

승호는 간호사의 물음에 그냥 말없이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진료실은 보기에도 편안한 아이보리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져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 내가 작성한 문진표를 의사가 보고 있었다. 

의사는 40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마른 체형에 얼굴 또한 광대뼈가 조금 보일 정도로 말라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굵은 뿔테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최 승호 대리 친구 분이시라고요?”

한동안 내가 작성한 문진표를 읽던 의사가 내게 말했다.

“아....네....”

“자,,,,그럼.....불편한곳 있으시면 말씀해보세요....”

의사가 굵은 뿔테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너무나 편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기억이.....갑자기 기억이 안나요. 어제 새벽이었는데. 분명히 뭔가 한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적이 이전에도 있었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으시거나......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나요?”

의사의 물음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특별히 그런 건.....”

“결혼을 하셨던데....아내분과의 관계나 일하시는 곳에서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는 어떤가요?”

“별 문제 없습니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의사의 시선이 조용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보통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하죠. 뇌에는 이상이 없는데 심리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기억상실증으로, 개인에게 중요한 과거경험과 정보를 일시적으로 갑자기 회상하지 못하는 장애를 말합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 심리적인 원인에서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스트레스가 극도로 놓은 상태일 때 간혹 일시적 기억상실에 빠지게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생각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가 됩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마시고 푹 쉬세요.

그리고 처음이시니까.....약은 가벼운 걸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약을 드시고 나면 잠이 올 겁니다. 푹 주무시고 나면 아마 조금 괜찮아 질 겁니다.

일주일 동안 약을 다 드시고 다시 한 번 오세요.”

나를 바라보던 의사의 보기 좋은 미소를 뒤로하고 진료실을 빠져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승호가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괜한 말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처음에는 후회했지만, 의사와 상담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봉지에 두 개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나는 병원과 붙어 있는 약국에서 약을 받자마자 바로 먹었다.

카페에 도착하자 의사의 말대로 몸이 노근해져 잠이 쏟아졌다.. 

“오빠. 오늘 피곤해보여요. 좀 쉬세요.”

세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세희야. 너 그때......너희 집에서.....왜....”

“네?”

“아니다...아니다....다음에.....”

나는 도망치듯 카페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카페 안에 있던 나만의 아지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책상과 스탠드.....그리고 폭신한 침대까지....

이 침대에 누워보는 것이 참 오랜 만인 것 같았다. 결혼을 하고 부터는 이곳에서 더 이상 밤을 지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비와 처음 관계를 가졌던 이 공간이 너무나 아늑하게 느껴졌다.

스탠드의 불빛이 조금씩 조금씩 흐려졌다....

[낄낄낄.......쟤들이야?]

화면이 흔들렸다.

[응. 어때? 죽이지?]

[둘이 자매라고? 누가 언닌데?]

[하얀 스커트 입은 년!]

두 사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흔들리던 화면이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차 안에 있는 카메라가 어느 카페의 1층 테라스를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가 향한 곳에는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여자는 닮아있었다.

[씨발년들......저년들은 참 살아가기 좋겠다. 얼굴 반반하지....몸매 죽이지....벗겨 놓은면 씨발년들.....가만히 있어도 놈 새끼들 어떻게 해보려고 난리겠구만......둘 다 룸빵가면 바로 에이스겠는데.... ] 

[스커트 입은 년은 직업도 중학교 선생이래.......동생은 아직 대학생이고.....무슨 무용과라던데......늘씬하니 몸매 죽이지?]

[그래? 중삐리 애새끼들 매일 저년 생각하면서 딸딸이 존나게 치겠구만 개새끼들.....흐흐흐흐....]

[너는 둘 중에 누가 좋냐? 나는 선생년.......가만 보고 있으면 저년은 뭔가.....고급스러워 보이면서도......술집 창녀처럼 보여 희한하게.......그리고 빠구리도 존나게 잘 할 거 같고......씨발년 허리 잘록한 거 봐라.....흐흐흐]

[낄낄낄.......미친넘.....나는 둘 다....저런 자매년들은 동시에 먹어야지. 둘 다 침대에 눕혀 놓고 번갈아가면서 밤새도록 박아줘야지. 그건 그렇고.....우린 저년들 한번 따먹을 수 있긴 한 거야?]

[미친새끼. 너 죽고 싶어서 그래? 절대 손대지 말랬어.]

[씨발. 고생은 우리가 다하고......좆같네.....]

[혹시 알아. 우리가 일을 잘하면....저년들 한번 먹게 해줄지...그날을 기다려야지....] 

[개새끼야. 그만쳐찍고 저년한테 파일 보내!] 

잠시 후 테라스에 앉아 있던 흰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테이블에 있던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여자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암흑 속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와....무슨 중학교가 이렇게 좋아?]

학교 건물이 보이는 주차장이었다. 어둠이 조금 내려 앉아 스탠드에 옅은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 드디어 만나네.....흐흐흐.....선생년 언제 나온데?]

[이제 곧......]

[선생년. 실물 볼 생각하니 씨발......벌써 떨린다야.....낄낄낄.....]

[사고치지마라....잘해야 된다...알았지?]

[미친 새끼가 이래라 저래라야 뒤질려구....] 

[야야야...나온다 나온다......]

무릎 위 까지 오는 깔끔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건물을 빠져나와 두리번거리다 주차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아이고...안녕하세요....]

[누...누구세요....]

[학교에 보는 눈도 있으니까. 얼른 타요. 차에 타서 이야기 합시다. 뒤에 타요 뒤에....]

잔뜩 겁먹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아이씨. 우리 바쁜데....씨발....니 동생년한테 간다 그럼....]

한동안 망설이던 여자가 뭉툭한 승합차 본넷을 지나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안녕. 선생....흐흐흐....]

뒤에 앉아 기다리던 남자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누구세요.....우리 은설이 어떻게 아세요?]

[잘 알지.....너도 알고....니 동생년도 알고......]

사내의 기세에 여자가 시트에 위태롭게 걸쳐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씨발년...냄새도 좋네....살 냄새야 뭐야 이거...]

갑자기 뒤에 있던 남자가 여자에게 바싹 다가가 앉았다.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너도 우리가 무슨 말 할지 대충은 짐작 할 거야...] 

[아!!!]

여자에게 붙어 앉아 있던 남자의 손이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여자의 몸이 남자에게 단번에 반쯤 안겼다.

[씨발....이년...이거.......미치겠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원피스 아래로 단번에 파고 들어갔다.

[악!!!!]

“으아악!!!!”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오빠...왜 그래요?”

세희가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억이 났다....모두 기억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