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77)

Deception (12)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마룻바닥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환한 보름달이 비쳐 복도가 대낮처럼 밝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발길이 이어졌다. 2층을 오르고 다시......나는 어느새 3층 복도 중간에 서 있었다.

미닫이로 된 교실 문이 열려 있는지 더욱더 환한 달빛이 복도로 새어 나와 있었다.

[미술실...]

그 교실 앞에 달려 있는 오래된 푯말이 보였다. 

나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은비야?]

적막하던 그곳에 내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미술실 정 중앙에, 달빛으로 빛나는 자주색 저고리를 곱게 입은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 앞에는 스탠드 위에 커다란 캔버스가 올려져 있었고 여자는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은비니? 뭐해 그림 그리니?] 

그 여자를 부르는 촉촉한 내 목소리가 미술실에 다시 울렸다.

기다란 머리칼을 곱게 붙여 말아 올린 여자가 뒤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는 여자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한복과 비슷한 자줏빛 저고리를 입은 은비의 모습은 너무나 눈부셨다. 은비의 하얀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어 이 세상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나를 웃으며 빤히 바라보던 은비는 고개를 다시 돌려, 가느다란 붓을 쥐고 있던 손이 다시 캔버스로 향했다. 

나는 정신없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은비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뭐 그리는 거야?]

은비의 등 뒤로 가까워지자 은비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 뭐야....뭐....뭐야 이게....]

캔버스 위에는 눈이 새빨간 한 여자가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 귀신처럼 입만 커다랗게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림속의 여자는 알몸으로 바닥에 앉은 채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은밀한 곳을 더 잘 보여 주기 위해, 여자의 두 손이 다리 사이를 더욱 벌리려는 듯 허벅지를 쥐어 잡고 있었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던 은비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비는 자신이 그려놓은 여자의 벌어진 성기에 새빨간 물감으로 빠르게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은비의 손의 움직임이 사람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림 속 여자의 그곳이 점점 더 피 칠갑을 하듯 변하겠다.

[히히히......]

[은....비야........]

그림을 보고 있던 은비의 얼굴이 갑자기 뒤로돌아 나를 향했다.

“하아....하아....하아.....”

깊은 가위에 눌려 깨어나듯 눈을 떠보니 숨이 막혔다.

아내가 상체에 이불도 덥지 않은 채 내 얼굴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내의 젖꼭지가 내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아내의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에 깊게 박혀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잠이 깰수록 아내의 허벅지에 눌려 있는 내 음경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아내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은 듯했다.

나를 깊게 안고 있는 아내를 반대편으로 천천히 밀쳐 냈다. 아내를 침대 위에 바로 눕히자 젖가슴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불에서 빠져 나와 아래를 보니 아내의 허벅지 사이에 들어가 있던 내 허벅지에서 눅눅함이 느껴졌다. 

손으로 닦아 보니 아내의 성기에서 밤새도록 새어 나온 속물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침실을 살며시 빠져나왔다.

거실의 벽시계가 새벽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아내가 집으로 오기 전.....내가 뒤지던 그 캐리어가 구석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꺼내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엉덩이가 시렸다. 그때서야 내가 알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캐리어의 TSA락을 풀었다. 

캐리어 안은 내가 처음 발견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서둘러 액정이 깨진 아내의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액정이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그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화면이 뜨자마자 갤러리를 터치했다.

처음 봤던 아내의 자신을 다시 확인했다. 

촬영일은 두 달 전 즈음이었다. 

화면에 꽉차있는 아내의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이 두 장씩이었다.

정면사진......그리고 몸매 라인이 더욱 잘 드러나 보이는 옆모습 사진.....모든 사진이 동일했다....두 장씩.....

촬영시간은 아침 아내가 출근하기 전이었다.

아마 아내가 출근하기 전에 이 드레스 룸에서 사진을 찍어놓고, 그 옷을 입고 출근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아내가 출근 전 자신의 사진을 찍어 놓은 게......내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 할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볼수록 이상한 점은 사진 속 아내의 얼굴 표정이었다. 

아내의 표정이 너무나 차가웠다. 아내는 내게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아내가 출근하기 전 스스로 자신을 촬영한 것은 두 달 전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진은 두 장 씩.......특이한 건, 사진을 찍은 날을 확인해보니 매번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아침이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생각을 해봐도 스마트폰에 있던 아내의 수십 장의 사진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어플을 보니 기본 어플만이 가득했다. 아마도 아내가 스마트폰을 찾은 후 초기화를 한 것 같았다.

스마트폰 첫 화면에 떠 있던 익숙하지 않은 어플 하나가 떠올라 그것을 실행했다.

어플이 열리자 그것이 메신저 어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플 메인 화면에 얼굴이 없는 대상이 하나 떠 있었다. 터치를 해봐도 프로필이 보이지 않았다. 

대화 목록을 클릭하자 화면이 변경되며 창이 열렸다.

새 창이 열린 그곳에 조금 전 보았던 아내의 사진들이 주르르 한 번에 펼쳐졌다. 

이틀 전 아내가 입고 출근 했던 타이트한 블랙 원피스가 가장 마지막 사진에 떠 있었다. 

가장 처음에 발송된 사진을 확인하고자 화면을 아래로 내려니 수십 장의 사진이 슬라이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아.....”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내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의 몸을 찍은 사진을 알 수 없는 누구에게로 전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내용을 확인했다. 

대화는 없었다. 아내의 사진들만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한참을 내려 중간쯤 왔을 때, 액정을 반복적으로 쓸어 올리던.......내 손이 갑자기 멈췄다.

[다른 건 없어? 더 짧은 거.....]

한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견디고 견뎌 잠에서 깨어나기를 계속 거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향긋한 내음이 느껴졌다. 그 향기에 내 기분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더욱 짙어지는 향기에 서서히 눈이 떠졌다.

아내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아내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만 같았다.

“왜....여기서 자요?”

아내의 차가운 목소리에 남아 있던 잠결의 여운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

내 몸에 두터운 담요가 덮여 있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 웅그리며 누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여기서 잠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빠. 저하고 같이 자기 싫어요?”

나를 보는 아내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아...아니.....일찍 일어나서 뭐 좀 하다가.......잠들어 버렸어....”

“음.......”

깊은 한숨을 쉰 아내의 손이 내 뺨을 감싸왔다. 그 손길이 식어있는 내 얼굴에 너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이러고 자요.....정말......”

차갑게 나를 보던 아내의 표정이 다행히도 측은함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오빠. 식사 꼭 챙겨 드세요. 나 없다고 거르거나 그러면 안돼요. 반찬하고 국은 넉넉하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요. 알았죠?”

식탁에 앉아 밥을 떠먹으려는 찰라, 아내가 내가 좋아하는 고기 한 점을 내게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내는 간밤에 잠을 잘 잤는지 화장도 하지 않은 뽀송뽀송하게 반짝이는 맨얼굴이 돋보였다. 

“그럴게.....근데 일요일에 언제와?”

“음.....경주에서 아침 먹고 10시쯤 출발하니까.....아마 점심때까지는 올 거예요. 우리 그날 점심 같이 먹어요.”

아내는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지만.....

지난밤 꿨던 그 찝찝한 꿈과........캐리어에 들어 있던 스마트폰에서 보았던 아내의 사진들이 내 머릿속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내와 같이 출근을 하기 위해 나는 벌써 모든 것이 준비되었지만 아내는 아직 인 것 같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새벽에 내게 있었던 일을 하나씩 찬찬히 되돌려봤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무엇인가를 했던 것 같은데........생각을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다.

드레스 룸에서 빠져나와.....보이스레코더를 들고 주차장에 내려가.......하얀 아내의 차,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은 것은 희미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세게 감쌌다. 그러면 조금 더 명확하게 그것들이 떠올리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오빠! 이거.........좀 그래요?”

드레스 룸이 열리고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식탁에서 봤던 맨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짙은 화장이었다.

몸에 붙은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아내의 볼록한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새틴 소재의 옅은 에메랄드 색상의 스커트였다. 

스커트 길이는 무릎 조금 위였으나 한쪽에 옆트임이 나있었다. 그 옆트임이 없었다면 너무나 타이트해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 보였다. 

아내의 속살이 숨겨져 있는 둔덕이 타이트한 스커트 위로 볼록하게 표시가 났다. 

내 눈에는 아내의 갈라진 보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빠. 어때요? 좀.....그래요?”

나는 그 둔덕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아내의 눈을 봤다. 한동안 나와 눈을 맞추던 아내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아내의 얼굴에 당황함이 역력했다.........그리곤 얼굴이 한순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어........이..이상하구나.....미안.....미안해요......” 

뒤돌아선 아내의 엉덩이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내는 서둘러 다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좀 전 아내를 보던 내 표정이 어떠했길레.....아내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미안하다고 한 것 일까..... 

다시 문이 열렸다.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좀 전 그 타이트한 스커트가 스키니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새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도 그대로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길게 뻗은 새하얀 손에......

아내가 깊게 잠든 새벽, 내가 몰래 훔쳐봤던.....그 하늘색 캐리어의 손잡이가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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