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77)

Deception (11)

꼼꼼한 아내의 손길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 공간이......내 손이 닿자, 선반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하나씩 풀어 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어느새 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던 땀방울이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바삐 움직이는 내 손을 멈출 수도, 템포를 줄일 수도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만이 가득했다.

‘찾아야 된다.....무엇인가를 찾아야 된다.....’

현기증이 나듯,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참아왔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와, 아내의 좋은 향기가 가득했던 방안이 단내나는 나의 그것으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니 몰래 내린 가랑비를 맞은 듯 이미 곳곳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것처럼 다시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한 치의 틈도 없던 이 공간이 내 손길이 닿아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마치 어려운 ‘틀린그림찾기’를 하듯 그렇게 오랫동안 확인하고....확인했다.

거실에 있던 벽시계가 오후 5시 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가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30~40분의 여유가 있다. 

거실중간에 잠시 멍하게 서있던 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내의 향기가 더욱 짙었다. 매일 아침 아내가 화사하게 화장을 한 채, 이곳에서 예쁜 옷을 입는다.

구석에 놓여 있던 깔끔한 박스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쌓여 있던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속을 하나씩 들여다봤다. 

아내가 대학에 다닐 때 보던 원서로 된 전공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원목으로 된 수납장을 열어 확인을 했다.

아내의 속옷들이 마치 란제리 숍에서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 속옷들이 색상을 기준으로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용하는 생리대도 사이즈별로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에 아내가 예전에 내게 이벤트를 해준다며 몰래 입고 나왔던 눈처럼 하얀 망사 가터벨트도 보였다.

‘하.....’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아내의 물건들을 허락 없이 뒤지고 있는 내 처지가 참담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열려있던 아내의 속옷이 가득담긴 수납장이 다시 원래대로 닫혔다. 

몸이 너무나 나른했다. 

나는 그대로 그곳에 누웠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아내의 알록달록한 옷들과 무채색의 내 옷들이 바닥에 누워있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울창한 숲속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

양 선생의 이야기....

보이스레코더의 그 목소리....

그리고...아내의 신경안정제....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을 했지만.....아직은 전혀 알아 낸 것이 없기에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아버님에게 접근해 죽음으로 내 몬, 그 놈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이지만, 혹여나 벌써 아내에게까지 접근을 한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나의 아내.....은비가 지금 어떤 위험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 있으니 깨질 듯 아프던 머리가 조금씩 괜찮아 졌다.

힘겹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는 순간, 가장 안쪽 구석에 있던 캐리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용하는 24인치 캐리어와 아내가 사용하는 24인치, 20인치 캐리어.....

그중에서도 파스텔 계열의 푸른 캐리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내가 사용하는 그 20인치 캐리어에 다른 캐리어와는 달리 TSA락이 채워져 있었다.

그 캐리어를 들어보니 느껴지는 무게감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듯 했다. TSA락을 열기위해 버튼을 눌러봐도 번호가 틀린지 꿈쩍도 안했다.

728....번호를 돌려 아내의 생일을 맞추고 버튼을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813...내 생일을 맞추고 버튼을 눌러도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내와 관련된 모든 번호를 돌려가며 맞췄으나 기대와는 달리 비밀번호 락으로 채워진 그것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20...아내와 내가 처음 만난 날..... 

버튼을 누르자 마치 마법처럼 락으로 잠겨있던 손잡이가 튀어 나왔다. 

그때.

거실 테이블에 있던 내 스마트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소리가 내 귀에 들린 최소 게 서너 번은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캐리어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히고 지퍼를 활짝 열어젖혔다. 

수납 포켓에 끼워져 있던 작은 다이어리가 눈에 보였다. 그것을 꺼내어보니 핑크색으로 된 그 작은 다이어리 표지가 무엇인가에 번져 군데군데 얼룩이 져있었다. 

다이어리가 끼워져 있던 공간이 여전히 볼록하게 보였다. 그곳에 손을 넣자 차가운 무엇이 손에 닿았다.

그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액정이 어려 군데 깨어져 금이 가있는 스마트 폰이었다. 예전에 아내가 사용하던 스마트 폰이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읽어버렸다고 했던 바로 그 스마트 폰이었다.

버튼을 길게 눌러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자 잠시 후 액정이 반짝이며 환한 빛을 발했다.

집에 있는 공유기에 와이파이가 자동으로 연결이 되었고, 상단에 45%라고 떠있는 배터리 잔여표시가 보였다.

패턴으로 잠겨 있었다.

나는 자주 보았던 아내의 손길을 따라 액정을 그었다. 그러자 잠겨있던 화면이 열렸다. 

액정에는 나에게 안긴 채 아내가 활짝 웃고 있었다.

화면에는 카메라, 갤러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어플이 하나 보였다.

갤러리를 실행했다.

그러자 아내의 사진들이 화면에 가득 찼다. 

작은 사진을 하나 터치하자 액정화면에 가득 찼다.

그 사진은 아내가 이 방에서 하이힐까지 신은 채,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서 전신 거울을 보며 스스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아내가 입고 있는 연붉은 미니스커트가 아내의 하체를 겨우 감싸고 있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그러자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아내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좀 전의 정면 사진이 아니라 옆모습이었다. 

“뭐야 이거....”

타이트한 스커트 위로 아내의 엉덩이라인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아내의 그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다음 사진으로 넘기려는 순간. 

[삑...삑삑....삑삑삑........]

갑자기 현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조용하던 그곳에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급하게 꺼내놓았던 그것들을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어......오빠. 집에 있었어요?”

현관문이 열리고 잠시 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캐리어 지퍼를 닫고 TSA락을 다시 채우던 내손이 떨려 손잡이를 그곳에 쉽게 채울 수 없었다. 

“오빠? 어디 있어요?”

슬리퍼를 신은 아내의 걸음이 거실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잠근 캐리어를 원래 있던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소매로 얼굴의 땀을 급하게 닦아냈다.

조금 열려있던 문을 잡아 당겼다.

“오빠!!!”

아내가 거실중간에서 놀란 눈을 하곤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집에 있었어요? 왜 전화도 안 받고....미나한테 전화하니까......점심때 급하게 나갔다고 하던데.....”

“응....그래...일이 좀 있어서 오늘 빨리 나왔어.......”

“근데....왜 거기서 나와요?”

아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 이곳저곳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아....좀 씻으려고......피곤해서 잠들었다가......”

다행히 내 손에는 아내가 접어놓은 나의 작은 팬티가 들려 있었다. 

한동안 서서 나를 지켜보던 아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보이자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다.

아내가 거실 테이블에 잠시 올려져 있던 마트 봉지들을 들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거 뭐야?”

“이틀 동안 오빠 혼자 있으려면.....음식 좀 해 놓고 가려고요. 나 없으면 오빠 또 잘 안 챙겨 먹으니까요.”

“뭐? 당신 어디가?” 

아내의 말에 놀라 나는 목소리 조절을 하지 못했다.

“네?”

아내가 뒤돌아서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내일 1학년 전체 2박 3일로 경주에 현장학습 간다고 말했잖아요.”

그때서야 며칠 전 아내가 현장학습을 간다던 말이 떠올랐다. 

“아....그랬지 참.....”

“오빠.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파요? 안색도 안 좋고......”

어느새 주방에 있던 아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내는 오랫동안 주방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고.....담아 놓고....다시 만들고를 반복했다. 거실에 맛있는 음식향이 가득했다.

아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식탁에서 내 옆에 붙어 앉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몸에 좋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내게 더 먹이려고 노력했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엄마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아내가 만든 그 맛있는 음식들이 입에 잘 넘어가진 않았지만 나는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 가득 차있는 것들을 아내가 절대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내는 생리기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서 속옷을 입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었고 아내 또한 그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아내의 맨살이 내게 닫는 것이 좋았다.

아내의 맨 다리가 내 허벅지에 깊게 걸쳐져 있고, 아내의 부드러운 숲이 내 한쪽 다리를 간지럽힌다.

아내의 얼굴이 내 어깨에 바싹 다가와 있고, 숍에서 한 건지 깔끔하게 발려있는 매니큐어를 한 기다란 손이 내 가슴에 살포시 올려져 있다. 

그리고.....아내의 젖가슴이 내 옆구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내게 안긴 채, 한동안 재잘거리던 그 듣기 좋은 아내의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내가......깊게 잠들기 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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