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ption (5)
갑작스러운 여자의 고함소리에 놀라, 회의실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바로 그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이 선생.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엿먹일려고 오늘 그런 거지? 교육청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해?”
“양 선생님....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몰랐어요.”
잔뜩 주눅이든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떨리는 그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끝없는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울렸다.
나는 회의실 뒷문 쪽으로 몇 발을 다가가, 조금 열려있는 그곳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아내가 회의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그 바로 앞에 다른 여자가 팔짱을 끼고 서서는 앉아 있는 아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 선생은 주제넘게 남의 반 일에 끼어 들어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교육청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오늘 여기 온 거 몰랐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여자의 고함소리가 좀 전보다 더욱 커졌다. 찢어질 듯한 그 소리가 너무나 듣기 싫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얼마 전 학교 앞 카페에서 아내의 일을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와 같았다.
“양 선생님. 저는 정말 몰랐어요. 어제 지홍이가 상담하고 싶다고 해서.....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애들한테 괴롭힘을.......”
“그러니까!!! 내가 담임인데 그걸 왜 이 선생이 신경쓰냐구!!!”
여자가 아내의 말을 가로 막고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런 여자의 모습이 마치 미친년 같아 보였다. 이성을 상실한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 여자의 기세에 겁먹은 아내는 또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아내의 힘없는 그 모습에 내 마음도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이 선생. 좀 이상한 거 같아. 얼굴 반반한 거 가지고 학교에서 냄새나 풍기고 다니고 말이야.....또.....옷차림은 그게 뭐야? 여기가 술집이야? 여선생이 왜 옷을 그따위로 입고 다녀?”
“양 선생님!”
아내는 여자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붉은 립스틱이 완벽하게 발려진 아내의 입술 또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왜? 내가 없는 말 했어? 스커트는 항상 짧고, 몸에 붙는 옷만 입고....학교에 몸매 자랑하러 왔어? 중2, 중3만 되도 애들 알거 알아.
애들이 이 선생 뒤에 따라다니면서 뭐라고 수군대는지 알아? 한번 자고 싶데.......따먹고 싶데.....훗.....“
여자를 보던 아내의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내의 눈가가 형광등에 반사되어 이따금씩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양 선생님....말씀이 지나치세요.....”
아내는 충격을 받았는지 안정을 찾기 위해로 가까스로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훗......뭐? 지나쳐? 이 선생. 이 선생 일찍 결혼도 했으면서 왜 그래? 이 선생이 미혼이면......밖에서 괜찮은 남자하나 꼬시려고 하는 구나, 그러려니 이해가되.
그런데 그런 거 아니잖아. 이 선생 남편은 이 선생이 학교에서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아침에 출근 할 때 이 선생 옷 입은 거 보고 아무 말도 안 해?
그렇게 몸매 자랑하고 싶으면 밖에서 하지 왜 학교에서 그러고 다녀서 물을 흐리냐 이 말이야.
그거 알아? 이 선생 노출 심한 옷 입고 올 때, 가끔 팬티도 보여......그런 날이면 교무실에서 남자 선생들 하루 종일 이 선생 스커트 속만 훑어보는 거...모르는 거야...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니면......그런 걸.....즐기나....훗.....이 선생 원래 그랬어? 대학 다닐 때도?”
“양 선생님! 오늘일과 상관없는 말은 삼가 해주세요.”
아내의 목소리 톤이 조금 변해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여전했다.
“내가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이 선생. 대학 다닐 때 2년 선배 세은이 알지? 정 세은?”
“네?”
여자를 쳐다보던 아내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풋....세은이 한테 들었는데.....대학 다닐 때 유명했다면서? 남자들 사이에서......만난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면서?
그렇게 여러 남자들하고 문란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어떻게 답답하게 학교 선생을 할 생각을 했어?
이 선생. 여기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서 답답하지 않아? 아니면....대학 때처럼 이 학교에서 남자들하고.....그렇게 하려고 하나.....훗”
아내의 목과 얼굴의 새하얀 피부가 점점 빨갛게 변해갔다.
“이 선생 좋아하는 교수들도 몇 있었다면서? 늙은 교수들도 남자니까, 파릇파릇 젊고 예쁜 제자 한번 품어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겠지만.......어떻게 제자가 그래? 자기를 가르치는 교수들하고? 호호호호.......”
지난번 학교 앞 카페에서 들었던 미친 여자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아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 안에서.....내가 지금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수들한테 몸 바쳐서 학점 잘 받고.....해외연수도 가고......어땠어? 늙은 교수들은....좀 달라? 이 선생 나이 때 애들하고 잠자리하는 것하고는 다르지?
괜찮으니까 이야기 좀 해줘....교수들하고 하는 섹스는 어땠어? 좋았어?.....나는....뭐...그런 적이 없어서....너무 궁금하다.......호호호......“
아내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회의실 문 앞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그리고 한 없이 떨리는 내 손은 문틈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회의실로 뛰어 들어가려는 순간.....
“훗.....”
아내가 웃었다. 아내가 그 여자를 보며 웃고 있다.
“뭐...뭐야.....”
아내와 여자의 표정은 단번에 역전되어 있었다.
여자를 보는 아내의 입 꼬리가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자.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아내의 환한 미소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내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표정이 좀 전 아내의 그것처럼 엉망으로 변해갔다.
“훗......양 선생님은 대학 다닐 때 그랬겠죠. 양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없었을 거고......양 선생님을 챙겨주고 예뻐해 주는 교수님들도 없었겠죠......지금 이 학교에서 처럼요....”
아내의 말이 끝나자 순간 회의실과 복도에 깊은 적막이 흘렀다. 아내를 바라보던 여자가 자신의 입술을 한번 깨물고 난 후 한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아내의 너무나 차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 맞아요. 그랬어요. 내가 대학 다닐 때....양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그랬어요. 많은 남자들이 나를 따라다니고 좋아해줬어요. 내가 힘들어 하거나, 난처한 일이 있을 때 마다 그 남자들이 나타나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줬어요.
그리고 교수님도 저를 참 예뻐했어요. 제가 예쁘고....예의바르고...똑똑하다고 교수님들이 항상 저를 챙겨줬어요.
그래서요? 뭐가 잘못 된 건데요?
혹시 그런 거예요? 양 선생님은 절대 누려보지 못할 그런 나의 행복한 경험들이........샘이 나서 지금 저에게 이러는 거예요?
양 선생님.
공사구분을 해주세요.
양 선생님은 저보다 한참 위 선배 교사예요.
저 같은 후배 교사들은 선배 교사가 하는 걸 그대로 보고 배워요. 그리고 선배 교사들은 후배 교사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존경받고.....닮아가고 싶은 그런 모범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오늘 양 선생님이 저에게 했던....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은 교사로서 양 선생님에 대해 정말이지 너무나 큰 실망스러움을 제게 안겨주고 있어요.”
너무나 듣기 좋은, 차분한 아내의 말이 끝났다.
아내는 저런 상황에서 어쩌면 저렇게 말을 조리 있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전에 회사 생활 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 미칠 듯이 소리지리며 날뛰던 그 팀장 새끼가....
“너.......뭐.....뭐......”
의기양양함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더듬거리는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크고 반짝이는 눈이 그런 여자를 자신만만하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칼날같이 서슬 퍼런 옅은 미소와 함께.........
“너.......야!!!!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여자의 큰 고함소리에 울먹임이 담겨 있었다.
그때....
회의실을 지나....복도 어느 곳에서 문이 쾅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나는 뒤로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2층으로 올라가는 공간에 몸을 숨겼다.
“지금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나이가 꽤있는 듯한 굵은 남자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학교에서 뭐하는 겁니까? 교사들끼리의 문제에 개입 안하려고 하다가.....내가 듣다듣다 도저히 안되서......
이봐요. 양 선생! 왜 엄한 이 선생을 잡아요. 오늘 일은 모두 양 선생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괴롭힘 당하는 반 애하나 챙기지도 못해서.....교육청에 투서 들어간 걸 왜 이 선생한테 이 난리를 치는 거요?”
“교...교감선생님.....”
개미같이 작아진 여자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그리고.....양 선생이 평소에 반애들한테 어떻게 했으면, 양 선생 반애가....이 선생한테 상담신청을 해서 그 이야길 모두 털어놔요? 양 선생은 그때까지 뭐했어요? 그러고도 담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양 선생! 내가 오늘 양 선생이 이 선생한테 하는 거 다 알아 버렸으니까. 오늘일 내일 회의시간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문제 삼을 겁니다.”
“교...교감 선생님...그게.....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사람이 일을 이렇게까지 해요? 같은 교사면 교사끼리 서로 도와주고 그래야지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지....임용된 지 1년도 안된 후배 여교사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변해 복도에 울렸다.
“양 선생. 내일 아침까지 시말서 준비해요. 아침에 교장선생님한테 따로 보고 할테니......”
“교감선생님....정말 죄송합니다......제가.....이 선생 오해해서....실수 했어요.”
여자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그곳에서 새어나오던 소란스럽던 소리가 한동안 멈췄다.
“양 선생. 일단 퇴근해요. 오늘일은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 합시다.....”
남자가 조금 진정이 된 건지 목소리가 차분하게 변해있었다.
“네...교감선생님......감사합니다.....내일 뵙겠습니다....이...이 선생도....내일 봐요...”
나는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가는 중간 즈음, 계단이 꺾이는 곳까지 올라갔다. 불이 꺼진 2층은 암흑천지였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빼내어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양 선생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회의실을 보고 있었다.
“씨....발년.......내가 가만 안 둬.......”
독기서린 말을 뱉어내곤 양 선생은 그곳을 떠났다.
나는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늘 보았던 아내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8시가 되어 있었다. 아내와 약속한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승호와 미나의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줄여 계단을 내려갔다. 차에 가서 아내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니 회의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 건물로 들어왔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내 발길이 멈췄다. 나는 발길을 돌려 내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회의실 안이 다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가 자리에 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아내의 가냘픈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양 선생을 엄하게 나무라던 그 중년의 남자가 아내 곁에 서서는 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