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77)

Disguise (1)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은비와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가게를 닫고 강원도 정선에 다녀왔다. 내 주위를 답답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피하고 싶었다.

정선의 어느 산속, 아담한 펜션에 혼자 머물다 돌아오니 가게 입구에 알록달록한 포스트잇들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나 매일 여기서 커피 안마시면 안되는데...]

[사장님. 무슨 일 있어요? 빨리와요. 케익 먹고 싶어요]

[형님. 돌아오시면 연락주세요.....한 정수....]

[사장님. 핸펀 바꿨어요? 연락이 안되네요.....]

매일 같이 찾아오는 단골 학생들의 글들이었다.

나는 정선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다시 가게에서.....나의 하루를 시작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나 따위에겐 아무런 미련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날이 있은 후 십 여일이 훌쩍 지났지만 은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또한 다행인 것은 승호가 회사의 신약 런칭 관련 제주도로 컨퍼런스를 떠났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와 은비의 일이든 무엇이든 나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미나도 그날 이후 가게에 계속 출근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말이다...

“사장님. 우리 꺼 언제 나아요?”

갑작스런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어 시선을 테이블로 돌렸다.

지난번 가게 앞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던 단골 놈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아....미안......잠깐만......”

드롱기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액체가 이미 컵에 가득 차, 연신 깊은 향을 풍겨대고 있었다.

“사장님. 도대체 우리 미나 씨 어디 갔어요? 가게 그만 뒀어요?”

녀석에서 커피를 전해주다 그의 갑작스런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어....미나.....집에 일 있어서......당분간 못나와.....”

나는 말끝을 흐렸다.

“휴.....매일 미나 씨 보러왔는데......흐음.....그나저나 사장님 혼자 이렇게 바빠서 어떡해요?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하....커피나 마셔 임마....안에 쿠키 있으니까 니가 좀 꺼내먹어. 바빠서 못 챙겨 주겠다.”

“옛썰!!”

녀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테이블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늘어날수록 이마에 땀에 흘러내렸다.

“사장님. 안되겠어요. 일단 사장님 커피 뽑아요. 제가 서빙 할게요. 조금 전 너스레를 떨던 녀석이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Bar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나는 말없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녀석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앞에 놓여있는 완성된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서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그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또 꾸역꾸역 하루가 지나갔다.

한 시간 남짓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서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다.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서 인지 입에서는 속에서 올라온 쓴 맛이 느껴졌다.

냉장고에서 얼음 같이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들고서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맥주를 따서 급하게 마셨다.

입에서 맴돌던 신맛들이 일시에 사라지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몇 번이고 미나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주까지 미나로부터 연락이 없다면 다른 알바를 구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은비.....수 천 번, 수 만 번을 다시 생각하고......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행복해 질 수 없다....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딸랑....]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인마! 너 뭐하는 놈이야?”

입구에 상기된 얼굴을 한 승호가 서있었다.

“어....왔어? 제주도서 언제 왔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 새끼......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어? 인마. 핸드폰을 박살냈으면 새로 사든지 아니면.....아니면 가게에라도 붙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앉아. 맥주나 꺼내서 마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나의 대꾸에 승호는 기가막힌지 우두커니 서서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밤이 조금씩 깊어가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빈 맥주 캔 몇 개가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나는 승호에게 근간의 일에 대해 말했다. 처음에 질문을 쏟아 내던 승호는 어느새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아서는 안 될 은비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음......”

내 말이 끝나자 승호는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그게 당연하다...

“치우야.”

“응?”

“우리 자리 옮길래?”

“어디?”

“나 제주도 있을 때, 상태 형한테 연락 왔었거든. 조만간에 가게에 너하고 한번 같이 오라고 하더라고...재미있는 일 있었다고....”

내 얼굴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그래....가자!”

예전과 다른 뜻밖의 내 반응에 그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승호는 지금 내 기분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주고 싶은데 막상 듣고 보니 복잡한 심경에 자기도 뭘 해야 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그와 똑같았을 것이다.

승호의 차가 천천히 내 가게 앞을 떠났다.

“친구야. 오늘 우리 다 잊고, 정신없이 한번 놀아보자....내가 쏜다....”

“천천히 걸어가지 얼마 된다고 차타고 가냐?”

내 말에 승호 빙그레 웃기만 했다.

승호가 말한 상태 형이라는 사람은 내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주점을 하고 있는 승호의 몇 년 고등학교 선배였다.

주점이 있는 곳은 큰 사거리 인근 술집이 밀집해있는 곳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아가씨들의 상태가 좋기로 소문이나, 인근 지역에서 까지 원정을 올 정도로 유명한 주점 거리였다.

단 몇 분도 안돼서 우리는 상태 형의 주점 앞에 도착했다. 그 주위에 수많은 주점 간판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FOX....]

“하하하......”

여기 올 때 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다소 노골적이고 촌스런 이름에 웃음이 나도 모르게 터졌다.

오랜만에 웃는 내 모습을 본 승호가 나에게 달려들어 내목을 감았다.

“너. 이쒜끼. 오늘 죽었으.....다 잊어라.....오늘은......다 잊고 마시며 놀자.....”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어......아이고 형님들!!!”

지하로 내려가자 가게 입구에 서있던 웨이터가 우리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이십니다. 형님들.....그리고 치우 형님은 정......말 오랜만입니다...하하하..”

“그래. 너는 잘 지냈어?”

“네. 형님 덕분에....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이....김 부장....잘있었나? 우리 상태 형 어디 갔어?”

승호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룸에 지인 분들 오셔서 잠깐 들어가셨습니다.”

김 부장이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다.

“형님들 아가씨들은 어떻게 맞혀 드릴까요?”

“일단은 술부터 내와. 그리고 먼저 상태 형하고 이야기 좀 하고 애들 부를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형님들!”

김 부장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룸을 떠났다.

다른 룸이 가득 찼는지 곳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왔더니....장사 잘되는 모양이네?”

“상태 형. 사람 좋고 그러니까 최근에 단골들 많이 생겼어. 그리고 나도 회식할 때 여기 와서 많이 도와주잖아....하하하..”

테이블에 술이 깔리고 잠시 후 상태 형이 룸에 들어왔다.

“어이.....잘 지냈냐? 치우 너는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떻게 코빼기도 안보이냐? 아무리 결혼할 여친 이쁘다고 해도 이렇게 안 올수가 있냐? 너한테 참 섭섭허다....”

“하하...형님. 죄송합니다. 요즘 뭐....정신이 없어서.....”

술잔이 돌았다.....

“치우야. 은비 씨 잘 있지? 한번 다 같이 봐야되는데......결혼 날을 잡았냐?”

그의 갑작스런 물음에 속이 뜨끔했다.

“아네...뭐......하하 그렇죠.....”

승호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음음....형...그렇고 뭐 재미있는 이야기 있담서? 그게 뭐요?”

승호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상태 형은 우리를 보며 한번 빙그레 웃더니 샷 잔의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내가 말이야.....이 이야기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네.....하하하.....”

“아...참....이 양반....또 이런다. 기껏 왔더니.......치우고 애들 들여보내요. 술이나 마시게....”

승호가 김이 빠진 듯 상태 형에게 쏘아 붙였다.

“크하하하......잘 들어. 내 친구들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야......”

상태 형이 깊게 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한 3~4주 전 즈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어. 새벽 3시쯤 이었나? 그날도 지지리도 장사가 안됐어. 자주오던 동네 꼴통 한 놈이 와서 두 시간째 놀고 있었는데, 아가씨 넣어줬더니 한 시간도 안돼서 튀어나오더라고 왜 나왔냐고 물어보니, 그놈이 진상을....개 진상을 그렇게 부렸다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손님도 없고 해서 애들 퇴근시키고 혼자 가게 문을 닫으려고 준비를 했어. 다른 룸들 정리 다하고 진상 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 하나가 내려오더라고....나는 보도아가씬지 알았지...”

[어...우리 아가씨 안 불렀는데요?]

[저기......지금 가게 하나요?]

[네?]

[지금...술....마실 수 있어요?]

[아......네....네.....]

“나는 잠깐 동안 고민했어. 그 늦은 시간에 여자혼자 술 마시러 주점에 온다는 게 이상하잖아. 가끔 술에 꼴아서 오는 술집 애들이나 아니면 동네 사는 여자 두어 명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러 오는 경우는 있어도.....

그런데 여자 상태가.....어디 숍에서 방금한 화장한 것처럼 그랬고, 몸매도 좋고 붙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옷차림도 아주 괜찮았단 말이야.

그리고 그 여자는 이런데 다닐 여자는 아닌 것처럼 보였어. 한마디로 룸 빵이나 보도에서 일하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거지. 행색이 아주 괜찮은 직업을 가진 그런 여자처럼 보였어.

술에 취했나 싶어서 모르게 가까이 가서 냄새를 슬쩍 맡아 보니까, 술 냄새는 전혀 안 나고 아주 좋은 향수 향 만 나더라고.

그래서 나는 저기 안쪽 방에 그 여자를 들여보냈어. 주문을 받는데 발렌타인 21살짜리를 시키는 거야. 여기 판매가가 얼만지 알려주고 비싸니까.....저렴한 거 있으니까 다른 거 주문하라고 했어.

그런데 한사코 그걸 가져다 달래.......나야 뭐 고맙지....그거 하나 팔면 남는 게 얼만데....

과일하고 술을 룸에 가져다 줬어. 근데 분위기가......묘하더라고.....남자한테 차였나....아니면 무슨 큰일이 있나.....걱정이 되더라고.

그 와중에.....나도 남자 새끼라고 그 아가씨 묘한 분위기에 끌리더라고...”

“우하하하!!!”

갑자기 승호의 입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상태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꼴통 놈 룸에서는 지 혼자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들어간 방은 30분이 지나도록 노랫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몰래가서 창틈사이로 들여다보니 그냥 다소곳하게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제서야 나는 마음 놓고 천천히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어. 술 째린 놈 들어올까 봐 위에 올라가서 간판 끄고 입구도 잠갔어.

한 이십분 정도 있다가 다시 홀에 내려오니, 그 듣기 싫은 꼴통 놈 노래가 안 들리는 거야. 그래서 이제야 집에 가겠구나. 듣기 싫은 노래 안 들어도 되겠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계속 너무 조용한 거야.....나는 그 놈이 술에 취해 잔다고 생각했지.....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나 봐. 무슨 소리가 들려서 깼어. 룸에 있는 마이크를 타고 이상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거야. 비몽사몽 정신을 차려서 들어보니......

그.....그 소리였어. 남자하고....여자하고......”

상태 형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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