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iation (12)
깔끔하게 각이 잡혀 있는 쇼핑백에는 커다란 보온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얼마나 꽉 잠가 놓았는지 힘을 주어 뚜껑을 간신히 열었다.
보온도시락 속에 담겨있던 오곡밥에서 새하얀 연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다른 뚜껑을 열어보니 뽀얀 육수 속에 한입에 먹기 좋게 잘려진 소고기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새벽녘 미나와의 흔적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파에 내팽겨쳐져 있던 미나의 재킷과 파란 스커트에 묻어 있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그러자 침대 위 미나의 목덜미에서 나던 달콤한 향기가 홀에 진동했다.
한쪽으로 몰려있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의자를 바로 세우고는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분인가를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가 Bar에 있던 A4 용지와 굵은 팬을 가지고와 하얀 A4용지에 글을 적어나갔다.
[금일 휴업
카페 사정으로 오늘은 하루 쉽니다.
죄송합니다.
-카페주인-]
적어 놓고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 유리 출입문에 떨어지지 않게 붙였다.
“김 사장님? 오늘 가게 안 해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옆 가게에서 꽃집을 하는 아주머니였다.
“아...네....”
“치우 씨 며칠 안보이던데......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몸살이 좀 심해서요.”
“아이고....그러고 보니 안색도 안 좋네....몸 조리해요. 참....그럼 좀 있다가 은비 씨 오겠네요? 은비 씨 오면 가게에 들르라고 하세요.”
“네?”
“은비 씨 아네모네 좋아하잖아요. 방금 꽃 들어왔어요. 은비 씨 오면 줄려구요.”
“아....네에.....”
“근데 왜 은비 씨는 아네모네를 좋아하는지 몰라......슬픈 꽃말인데.....”
“사장님. 아네모네 꽃말이 뭔데요?”
“음......아네모네는.....속절없는 사랑,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이룰 수 없는 사랑. 사랑의 쓴맛, 제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마웠어요......이런 꽃말이 있는데 다들 우울한 것들뿐이죠....”
나는 그녀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떠오르는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지워버리고자 다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누군가 출입문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 치우!”
문이 열리고 승호가 서있었다.
“너 오늘 가게 쉬냐?”
“응....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좀 전에 계모임 여행 갔다 오다가 가게 문 닫힌 거 보고 너 무슨 일 있냐고 물으시길래 걱정돼서 와봤지.”
“오늘 쉬려고....컨디션도 안 좋고....”
“그래...그래 잘했어. 그건 그렇고 은비 씨하고는 어쩔거냐?”
승호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서 말했다.
순간 내가 술에 취에 승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반문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어쩌긴....끝났어.”
“휴......너도 걱정이고 은비 씨도 걱정이다. 누구보다도 그렇게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싸워서......”
다행이었다. 승호가 우리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지 말고 은비 씨하고 화해해....약혼까지 하고선 그런 일로 오래 끄는 거 아니야.”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 수연 씨한테 고맙다고 말했냐?”
“어? 무슨 말이야?”
“아...참 너 전화기 박살냈지? 매일 술에 꼬라 있어서 당연히 기억도 못 할 거고....수연씨 너 때문에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아냐?”
나는 지금 승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날 너하고 술 마시고 너 완전히 필름이 끊겨서 우리 집에 데리고 왔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너 혼자 거실에서 집에 있던 위스키를 꺼내 마시고 있더라. 미친놈아!
니가 정신을 못 차려서 그냥 집에 두고 갈 수도 없고, 점심때 까지 니 수발 들고 있었는데.....팀장 새끼가 하도 지랄하는 바람에 급하게 회사에 가야되는데.....부탁 할 사람이 있어야지....그래서 이층에 내려가서 수연 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는 회사에 갔지.....”
순간 머리에 번쩍하고 무엇인가 떠올랐다.
거실에 내가 토해낸 것을 가느다란 손이 부지런히 닦던 모습과......
내 입에 따뜻한 물을 스푼으로 넣어주던 모습....
그리고.....마치 은비와 함께 있듯이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그 부드러운 젖가슴을 만지던 내손까지.....
머리가 아득해졌다.
“너 새끼야. 정신도 못 차리고.....너 때문에 4일 동안 수연 씨 얼굴이 핼쑥해졌더라 임마.......좀 쉬다가 정신 차리면 수연 씨 한테 고맙다고 말해......요즘 그런 여자가 어디 있다고.....”
“어머!!!”
안쪽에서 나온던 미나의 소리가 들렸다.
“어....어.....너.....너 왜 거기서 나와?”
“아......승...승호 오빠 오셨어요?”
뒤를 돌아보니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미나가 서있었다. 그녀는 은비가 여기서 잘 때 마다 아침에 입었던 헐렁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나의 표정에 당황함이 역력했다. 승호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오늘 가게 문 닫고 오전에 대청소 하려고 불렀어. 급하게 불렀더니 저러고 왔네.....”
승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미나를 번갈아 보고 시작했다.
“오빠. 매일 마시던 걸로?”
“어...어...그래 그래.....”
승호의 말이 떨어지자 미나가 몸을 숨기듯 급하게 Bar로 들어갔다.
승호의 시선이 몇 번 미나의 얼굴과 헐렁한 원피스에 향해 있었지만, 별 말 없이 미나가 내어준 짙은 라떼를 마셨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자기가 담당하는 의사와 점심 식사가 있다고 말하곤 서둘러 가게를 떠났다.
미나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팔을 베게삼아 얼굴을 기대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하지? 집에 가서 좀 쉬어....”
내 말에도 미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요....”
“뭐가?”
“나이 많은 사람하고 자고나면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린애들하고 자고나면.....그냥 장난친 것 같았어요. 별 여운도 없고.....근데......이번에는.....그런 장난이 아니라.....진지해진 거 같아요......말로 표현을 잘 못하겠지만......내가 더 진지해진 거 같아요. 어른이 된 것처럼....”
미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정 수연이 가져온 음식을 가져와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그러자 미나가 벌떡 일어나 내 옆자리로 와서는 그 음식들을 궁금한 눈빛으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에요?”
“밥 먹자.....”
“혹시....아침에 은...은비 언니 왔다 갔어요? 나 여기서 오빠하고 잔 거 알아요? 언니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밥 먹자....”
음식이 집에서 직접 한 것처럼 맛있었다. 나와 미나는 국물 한 방울도 남겨두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다시 지나갔다.
내가 박살내 버렸다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지만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하루 지날 때 마다 날이 점점 따스해져갔다. 카페 창밖에 보이는 대학생들의 옷차림 또한 조금씩 가벼워져 갔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나의 옷차림과 화장 스타일이 조금씩 변해갔다. 항상 진한 화장과 짧은 미니스커트만을 고집하던 그녀가.....투명한 피부를 드러내는 옅은 화장과 차분해진 옷차림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은설이 미나에게 자주 연락을 하여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그럴 때 마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 미나가 은설에게 말했다.
은비에게서는 그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다행이라고.....
잔뜩 흐리던 어느 저녁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던 날이었다.
몰려있던 손님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와 미나 만이 가게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홀을 정리하던 미나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옅은 화장에 그녀의 오뚝한 콧날 한쪽에 있던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이 훨씬 좋아.”
“네?”
마지막 테이블을 정리하던 미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다고......”
“헤에.......”
미나가 생글거리며 나를 잠시 바라보다 서둘러 정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조금 높은 볼륨으로 홀에 울려 퍼졌다.
내가 좋아하던 곡이었다.
“휴우....오늘도 끝났당.....”
미나가 음악을 바꾸고는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자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미나의 향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장...님.......오빠!”
미나가 한쪽 턱을 괴고는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왜?”
“나 저기 있는 와인 마시고 싶은데......”
“약속 없어?”
“넹.”
“요즘 왜 친구들하고 클럽안가? 그렇게 자주 가더니.......술도 잘 안마시고.....”
“재미없어요.”
“나하고 마시는 건 재미있고?”
“네!”
나는 Bar 구석에 있던 레드와인 한 병과 중요한 날 사용하기 위해 아껴 두었던 새 리델 보르도 잔을 가지고 왔다.
나를 보는 미나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진한 와인향이 부드러운 커피 향과 섞여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나와 미나가 들고 있던 와인 잔으로부터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와인을 한 모금을 깊게 들이켜 한동안 입에 담은 채 그대로 있으니, 그 좋은 향이 코로 서서히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팔을 감아오는 미나의 가느다란 팔과.......그녀의 한쪽 가슴이 내 팔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나의 머리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왔다.
“오빠.”
“왜?”
“나 오늘.......여기서...자고가면....안돼요?”
“안돼.”
“왜요!”
“앞으로 다시는 나하고 안 잔다고 했잖아....”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미나의 머리가 갑자기 떠났다.
“아니...그건...그건요......마음대로 하세요. 벌써 엄마한테 친구 집에 잔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저는 방에서 잘 테니까.......오빠는 여기서 자요.”
나는 눈을 감은 채 미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너 만일 오늘 여기서 자면.....내가.....나쁘게 변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으면 그렇게 해...”
“정말요? 정말?”
미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나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가 금방 떠났다.
내 팔을 감고 있던 미나의 몸이 더욱 나에게 밀착해 있었다. 내 팔이 미나의 가슴골 사이 깊게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뛰는 미나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딸랑]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언니!!!”
놀란 미나의 소리가 들렸다. 내 팔을 깊게 감은 채, 안겨 있던 미나의 몸이 무엇인가에 크게 놀란 듯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나는 눈을 떴다.
카페 입구에....
언젠가 백화점에서 내가 사주었던....페이즐리 패턴 블라우스에 남색 페플럼 라인 스커트...
날이 풀리면 입어야겠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던....그녀....
가게 입구에 그 옷을 입은 채, 너무나 매혹적인 화장을 한 은비가 서있었다.
은비의 떨리는 시선이 미나를 향해 있었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카페 밖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