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77)

Variation (3)

슬림한 몸매. 그리고 단정하게 늘어트린 긴 머릿결....

왠지 어디선가 본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창가로 들어온 빛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 여자가 가게 안쪽으로 다가왔다.

“어....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놀란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앞에 완전히 드러난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치우 씨. 잘 지내셨어요?”

그 여자가 바로 내 앞에 서서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 여자는 정 수연이었다.

“아니. 어떻게....”

“놀랐죠?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죄송해요.”

“아...아니요....그게 아니라...”

우리는 카운터 앞에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아...네.”

나와 정 수연의 이런 어색한 만남이 궁금했는지 미나의 시선이 나와 정 수연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맛있게 드세요.”

미나가 우리가 있던 안쪽 테이블에 그린라테 두 잔을 내려놓고 정 수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테이블을 떠나던 미나의 눈빛이 잠시 나에게 머물러 누구인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타야에 있을 정 수연이 왜 내 가게에서 지금 나와 함께 앉아 있는지....

정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아이보리 코트를 벗고는 반으로 접어 한쪽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러자 무릎까지 오는 슬림한 하늘색 스커트에 몸에 딱 달라붙은 회색 터틀넥 니트가 드러났다. 상체를 감싸고 있는 니트에 정 수연의 가슴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미나가 정 수연의 몸매를 이곳저것 분주하게 살피는 게 보였다.

“놀라셨죠?”

정 수연이 입이 타는지 연한 핑크색 립스틱이 발린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오물거리며 말했다.

“아네.....좀 뜻밖이라서...”

“음....여기에 오기까지.....많이 고민했어요.”

“언제 한국에 도착했어요?”

“오늘 새벽에요.....”

“아.....”

나와 눈을 맞추며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정 수연의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불현 듯 까마득히 잊고 있던 파타야에서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에 도착해서....집에 갔었어요.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아빠, 엄마에게 연락도 끊고 갑자기 떠나버렸다가....이렇게 불쑥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게....저로선 쉽지 않았어요.”

정 수연이 목이 탔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린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예쁜 캐릭터 그려진 하얀 머그컵 입구에 그녀의 분홍 립스틱이 살짝 찍혀 있었다.

“그렇게 집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결국 돌아섰지만, 제가....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치우 씨한테 불쑥 찾아 왔어요. 놀라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 수연이 나에게 머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아니요....좀 뜻밖이긴 한데요. 그런데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지난번 술자리에서 치우 씨가 이 대학 북문 바로 건너편에 카페를 한다고 했던 게 기억났어요.”

정 수연의 표정은 세상의 걱정을 모두 자신이 짊어진 듯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처럼 핼쑥해 보였다.

“식사는....했어요?”

정 수연이 힘없이 고개를 작게 가로 저었다.

“미나야. 여기.....”

“네. 알겠어요. 사장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나는 벌써 새하얀 접시를 들고 케익과 요기가 될 만한 것들을 서둘러 담기 시작했다.

“이거....너무 맛있어요.”

정 수연이 미나가 가져다준 블루베리 케익을 먹으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정 수연이 혼자 그것들을 먹는 것이 부담이 될까봐 이따금씩 굵은 초콜렛이 박힌 쿠키를 집어먹으며 그녀의 요기를 거들었다.

정 수연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쉬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먹었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워 보였다.

그때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누구의 짓인지 알고 있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우리 카페 문을 저렇게 여는 인간은 단 한명 뿐이었다.

“오늘은 조용하네? 김 치우....요 쉐끼...내가 얼마나 부탁했는.........데......어....어.....손...손님계시네.....죄송합니다......”

그 소리에 케익을 한 스푼 떠먹던 정수연이 놀라며 고개를 돌려 승호를 잠시 바라봤다.

시끌벅적하던 승호의 목소리가 나와 함께 앉아 있던 정 수연을 확인하고 급하게 줄어들었다. 그는 건너편 테이블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나와 정 수연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승호가 미나에게 정 수연이 누구인지 말없이 눈빛만으로 물었지만 미나가 모른다는 듯 고개만 바삐 가로 젓는 모습이 보였다.

가게는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단지 정 수연이 들고 있던 작은 스푼이 부드러운 케익을 가르는 미세한 소리만 들린 정도로 조용했다.

승호가 정 수연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런 그에게 인상을 한번 찌푸려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는 멋쩍어하며 딴청을 피워댔다.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정 수연에게 향해 있었다.

“휴.....너무 잘 먹었어요. 나도 모르게 배가 고팠나 봐요. 저....웃기죠......”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보며 정 수연도 민망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더 드려요?”

“아니요. 아니요. 충분해요.”

비워진 접시가 물러가고 한동안 정 수연은 말이 없었다. 그녀의 가늘고 길 다란 손가락 몇 개가 애꿎은 머그컵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 수연은 지금 말을 해야 할지, 말이야 할지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참고 있던 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치우 씨. 내가 이렇게 불쑥 여기에 찾아온 것은 부탁이 있어서예요.”

정 수연이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네? 부탁이라면 무슨....”

“당분간 이 도시에 머물고 싶어요. 이곳은 집에서도 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고......그리고....그리고....”

정 수연의 눈에 빠르게 눈물이 맺혔다.

“치...치우 씨도 계시고.......저는 지금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흐흑....”

결국 정 수연의 눈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테이블위에 떨어졌다.

“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어요. 여러 번 연락을 드렸지만, 치우 씨가 연락이 되지 않는 것도 저에게 회신을 하지 않는 것도 저는 모두 이해 할 수 있었어요.

더 이상.....더 이상....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막상 한국에 돌아와 보니.....갈 곳이 아무데도 없어요.

가족도....친구도....그래서 이렇게 죄송하게도 찾아왔어요. 정말 죄송해요....흐흐흑....”

정 수연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렸다.

그러자 미나와 승호의 따가운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정 수연이 지금 내 가게에 앉아 있는 이 상황도 그랬지만, 그것보다도 그녀가 나에게 하는 지금 이 말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나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해외에서 나를 찾아 온 듯 한 그런 뉘앙스로 오해하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도 정수연의 얼굴처럼 붉게 변해갔다.

테이블 위에 정수연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있던 냅킨을 몇 장 뽑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나의 큰 두 눈이 나를 벌레 보듯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변해 있었고, 항상 웃으며 나를 보던 승호의 얼굴도 다소 무표정하게 변해있었다.

정 수연이 내가 건 내 준 냅킨으로 눈물을 닦다가 황당한 표정의 내 시선을 따라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미나와 승호의 시선이 정 수연을 피해 일시에 다른 곳을 향했다.

그때 정 수연도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저기 죄송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제가 부탁할게 있어서 치우 씨 찾아 온 거예요......그리고 은비도 잘 아는 사이에요.”

정 수연의 입에서 은비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순간 내 머리 속이 아찔해졌다.

정 수연의 말에 그제서야 미나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된다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승호의 얼굴도 함박웃음으로 다시 변해 있었다.

“그럼 여기에 머물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당분간 호텔에......그리고 나서 천천히 집을 알아볼까 해요.”

[엄마. 엄마!]

그때 다급한 승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엄마. 우리 집 2층에 그 방 나갔지?

도배하고 장판은 새로 다 했어? 그래?

그 방 얼마에 내놨어?

뭐라고? 뭐 그래 비싸? 요즘 그렇게 내놓으면

학생들한테 욕먹어. 악덕 건물주라고.

전세는? 엄마 일단 알겠어.

여기 아주 예쁘고.....아니...적당한 분이 계셔.

방세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있다가 다시 이야기해.

엄마. 끊어!]

“푸훗...푸하하....”

승호의 통화가 끝나자 참고 있던 미나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승호가 나와 정 수연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 수연이 승호의 어머니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니에요. 저희도 부동산에 내놓은 지 얼마 안됐는데....이렇게 빨리 들어오시면 저희도 좋아요.

승호 어머니의 얼굴에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너무나 인자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단정하고 예의 바른 정 수연의 행동과 말투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투룸 형식의 집은 여자 혼자쓰기엔 조금 넓었고 매우 깔끔했다. 그리고 가전제품이 모두 옵션으로 들어와 있어서 몸만 들어와 살아도 될 정도였다.

승호가 정 수연에게 집안 곳곳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치우야...잠깐만....”

어머니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치우야. 저 아가씨 너 후배라고?"

“아...네...”

승호에게는 정 수연이 내 후배라고 어머니에게 말하라고 했었다.

“뭐하는 아가씨야? 그리고 나이는?”

“아네....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다가....해외에 나가서 조금 살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이는 스믈아홉 이고요.”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번져갔다.

“그래? 저 아가씨 참 참하네....예쁘고.....”

어머니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계약서도 쓰지 않고,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세를 받았다. 정 수연은 시세에 맞는 금액을 지불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거부하셨다.

어머니는 4층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고는 승호를 데리고 식사 준비를 위해 서둘러 올라가셨다.

나는 거실에 있는 3인용 소파에 앉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정 수연이 청소를 마무리하고 소파로와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얇은 원피스 사이로 속옷이 희미하게 비쳤다.

정 수연이 내 눈치를 살펴보는 듯 했다.

“치우 씨.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지금 치우 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저는 알고 있어요.

은비 때문이죠? 만약 은비가 이곳에 있는 나를 본다면......치우 씨는 그걸 원치 않으시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치우 씨에게 절대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 수연이 나에게 바싹 다가와 두 손으로 내 팔목을 조심스레 감싸왔다.

그때.

스마트 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은비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 팔목을 감싼 채 점점 힘이 들어가던 정 수연의 두 손이 급하게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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