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77)

잔혹동화 (5)

너무나 좋은 향기가 내 코끝을 타고 조금씩 흘러 들어왔다. 

그 향기 때문인지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향기였다.

그 향기는 한국.....내 가게에서 매일 맡던 그 향이었다.

‘예가체프!!!’

감미로운 예가체프의 향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어느새 완전히 돌아왔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고 몸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잡다한 소음이 들렸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무엇인가 모를 뜨거운 것을 조심스레 후루룩 마시는 소리.....

시간이 지나자 깜깜한 암흑 속에 있던 나의 눈이 조금씩 밝아졌다. 천정에 붙어 있는 노란 등이 선명해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났던 곳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무엇인가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도넛 여러 개가 보였다.

“너....누...구야....”

힘겹게 뱉어낸 말이 다시 내 귓가로 돌아왔다. 그 목소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깼어?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군.”

사고가 있던 날 클럽 화장실에서 나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던, 그리고 황 경태가 은비를 호텔 주차장으로 불러냈던 날 봤던 그 사내였다. 

그의 머리가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너는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그렇게 갔냐? 너 또라이 야? 

“너....누구야? 뭐하는....새끼야....”

“나? 나는 약 쟁이지...후훗....조금 더 누워 있어. 아직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릴 거야.”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이나 말투는 나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예가체프.....”

“뭐?”

“커피...좀 줘....”

내 말에 그가 황당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건들과 박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집이 어수선해 보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던 집이 아니라 여행객이 단기 체류를 목적으로 머무는 그런 집 같아 보였다. 

“이제. 이리 오라고.....”

그가 머그컵을 들고 와 자신이 있던 테이블 맞은편에 놓아두고는 말했다.

가게에서 항상 마시던 예가체프 보다 향과 맛이 진했다. 나는 원두를 어디서 구했는지 그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내 처지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김 치우 씨. 아마도 나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이나 많겠지?”

“왜....나에게 그걸.....동영상을 보냈어?”

나는 그가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내가 경고 했잖아. 니가 그걸 확인하면 니 인생이 많이 변할 거라고.....선택은 니가 한 거라고. 나는 너를 최대한 배려한 거라고...”

“너도 그 새끼....황 경태하고.....한 패지?”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하하. 너는 항상 이런 식이냐? 신중하지 못하고 즉흥적이고 멍청하고.....그리고......나약하고.”

“뭐야? 이....새끼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옆에 있던 내 가방에서 은색 망치를 꺼냈다.

“이걸로 오늘 어쩌려고 그랬어? 황 경태 그 새끼 대가리라도 부숴버리려 그랬나? 너는 오늘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어. 그 경찰 새끼들한테...

동영상? 

내가 너에게 보낸 니 여자의 동영상....너는 차라리 내가 너에게 그것을 보내지 않았다면 좋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한국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말씀, 

그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야. 너무나 잔혹한 고난의 시작이지....“

그가 말을 끊고 태국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나의 스마트폰이 반짝였다.

승호. 은설이. 미나로부터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수많은 메시지도 도착해 있었다.

[야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은비 씨. 혼자 돌아왔다면서? 뭐 어떻게 된 일이야? 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

[형부...한국에 돌아왔어요? 언니가 지금 많이 아파요. 이리로 좀 오실 수 있어요?]

[사장님. 무슨 일이에요? 승호 오빠한테 들었어요. 그리고 좀 전에 은설 씨 왔다 갔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메시지를 보며 내 마음이 더욱 갑갑해져 갔다.

“황 경태의 주 타겟은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 어린커플, 여자들끼리 온 여행객들이야. 황 경태 일당들은 벗어나지 못할 상황을 만들지.

유명 관광지나 술집, 그리고 해변같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타겟을 선정해. 그러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거지.

현지인들이 이유 없이 시비를 걸거나 여권과 같은 중요한 소지품을 읽어버리거나 가방을 통째로 날치기를 당한다면 무척 당황하겠지. 

그때 황 경태가 짠하고 나타나서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결하지.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아주 착한 한국인 탈을 쓰고 말이야. 그러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그를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믿어버리지.

하지만 황 경태의 관심은 오로지 여자들이야. 그것도 아주 예쁜 한국 여자들.........니 여자처럼....은비라고 했나? 후훗...“

은비를 언급하는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하하하....미안. 미안. 

황 경태는 그런 식으로 한국 관광객에게 다가가서 서로 친해지지 마치 오랫동안 알던 친구처럼......그들의 여행을 도와주고 불편한 것까지 손수 해결해주지...그리고...술도 같이 마시고 그렇게...

그들이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다고 판단될 무렵 황 경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현지인을 붙여 그들에게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하거나 아니면 약을 태우거나....그러면 황 경태는 여자만 호텔로 데리고 가서 하루 종일 엉망으로 버리지. 

생각해봐. 

새 신부가 신혼여행 와서 남편 모르게 처음 보는 현지 한국 남자와 밤새도록 그 짓을 했다면 심정이 어떨까? 동영상은 보너스고.....

약이나 술에 취해서 모르는 남자에게 안겨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몇 번이고 절정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본 여자.......모든 여자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포기해.......그리고 황 경태의 꼭두각시가 되는 거지. 

황 경태는 그 신혼부부가 파타야에 머물 동안 여자를 마음껏 데리고 놀아. 그리고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면 시간이 지나 생각 날 때마다 그 여자에게 연락을 하지. 

황 경태는 그 여자만 파타야로 다시 불러들이지. 그리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그 여자를 여러 가지 도구로 이용해. 

태국 놈들은 한국 여자에게 환장을 하거든......한국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은 태국남자에게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야. 

계획과 달리 만일 남편이 성가시게 굴면 다른 방법도 있어. 

먼저 남편에게 예쁜 태국 여자를 붙여주지 남자가 태국 여자에 빠져 정신 못 차릴 때 즈음, 남편이 보는 데서 태국 남자들이 아내를 윤간해버리지. 

이렇게 되면 그 신혼부부를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있는 거지. 어린 커플들도 동일해. 여자끼리 온 애들은 더 쉽고.”

내 얼굴이 불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경...경찰은.....”

“하하....뭐? 경찰? 태국 경찰? 이 친구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오늘 봤잖아. 그 새끼집에 있던 경찰을 니 눈으로 확인했잖아.

태국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파타야 경찰은 좀 달라. 늦은 밤 한적한 곳에서 차량 단속을 하는 경찰들에게 음주나 무면허로 적발이 되면 파타야 경찰은 돈을 요구하지 5,000~10,000바트 까지 금액도 다양해 현지인들에게는 무척 큰돈이지. 

하지만 예쁘고 어린 태국 여자가 단속에 걸리면 상황이 좀 달라져. 경찰차에 그 여자를 태우지 그리고 질펀한 섹스를 하는 거야. 태국 여자도 돈을 주는 것보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게 더 쉬운 방법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파타야는 이렇게 좆같은 곳이야.” 

“제발...동영상.....원본 돌려줘.”

“하하하.....내가 원본을 삭제하면....황 경태가 가 찍은 동영상은 어쩌고? 그 새끼는 내가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라.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와.....그 호텔에 말 잘 듣는 내 친구.....기억나? 몰카 설치하던 그 호텔 직원.”

“니가 지금 나에게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노란 크림이 듬뿍 들어 있는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 몇 살이야? 어린 노무 새끼가. 사사건건 반말이야?”

그가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이해가 안 돼. 니가 왜 나에게 이렇게 하는지....그리고 너와 황 경태는 어떤 관계인지....” 

“후훗. 그렇다면 내가 다시 너에게 물을 게. 니가 정말 원하는 게 뭐야?”

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황 경태. 그 새끼 죽이는 거....”

“하하하....멍청한 놈. 그러면 모두 해결될 거 같아? 니가 그 새끼를 죽이고 멀쩡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김 치우 씨. 제발 좀 신중하게 생각해. 너 같은 멍청한 놈이 간혹 있었지. 사랑하는 자신의 여자를 구해내려고 발버둥 치던 놈들.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된지 알아?

파타야에서 실종되거나, 병신이 돼서 한국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여자들은 황 경태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

니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야. 

첫째는 파타야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황 경태가 다시 니 여자에게 접근하겠지. 니가 황 경태로부터 니 여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그가 말을 이어가다 뜸을 들였다.

“두 번째는?”

나는 짧은 시간 그의 말을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김 치우 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아마도 이 이야기가 끝나면 니가 나를 좀 더 이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야. 너무나 아름다운....잔혹동화 같은 그런 이야기지......“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둡게 변해있었다. 

잠시 후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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