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동화 (3)
푸르기만 했던 파란 하늘이 어느새 어두워져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택시 창가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이 유난히 슬프게 보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어이~ 김 사장. 벌써 도착한 거야?]
[승호야....]
[나 지금 가게서 이쁜 미나가 말아준 커피 마시고 있는데.....하하하]
[승호야. 부탁 좀 하자...]
스마트폰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오늘 비행기 안 탔어. 해결해야 될 일이 좀 있어서.....한국으로 가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아. 그래서 니가 가끔 가게에 들러서 좀 봐주라......미나에게도 알려주고....]
[치우야.....]
승호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달라져 있었다.
[너 무슨 일 있구나? 인마.....뭔데? 왜 그래?]
[승호야. 별일 아니야. 부탁하게.....]
[그...그래. 일단 알겠어...저녁에 다시 통화하자]
나는 승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홀로 남겨진 이곳에서 오랜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조금의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파타야 세컨로드에 있는 센트럴 마리나 앞에 택시가 멈췄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아무 말 없이 2,000바트를 건네주고는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를 떠나는 나에게 기사가 거스름돈을 받아 가라고 다급하게 외쳤지만 나는 그대로 길을 건너 택시를 타고 오면서 미리 봐두었던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서둘러 룸으로 올라갔다.
더블침대와 발코니가 있는 작지만 아늑한 룸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는 병신이다.
아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병신이다.
내가 그렇게 믿었고 좋아하기까지 했던 황 경태.....
그 새끼는 완벽하고도 너무나 처참하게 나를 농락했다.
며칠 전 호텔 루프탑 Bar에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위로해주던 황 경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황 경태가 은비의 알몸에 올라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미친 듯이 그 짓을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은비가 밤새 황 경태에게 유린당하고 나에게 돌아온 그날 밤.....
내가 잠든 사이 은비는 또다시 그 새끼에게 불려나가 그의 승합차에서 또다시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런 은비에게 황 경태와 저녁식사 자리에 나가자고 한 나였다.
은비는 그 저녁 식자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롭고 죽고 싶었을까?
나의 두 눈에서 창밖의 굵은 비처럼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창밖의 어둠이 내릴 무렵 나는 룸을 떠났다.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다.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에는 수많은 외국인과 태국여자가 뒤섞여 있었다.
늙은 외국인의 머릿속에는 오늘 밤 자신의 호텔에서 보게 될 젊은 태국여자의 알몸을 생각할 것이고, 젊은 태국 여자의 머릿속에는 늙은 외국인의 지갑 속에 들어있는 돈을 생각할 것이다.
‘지옥 같은 파타야!’
그곳에 금방 도착했다.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멀리 건너편에서 황 경태의 레스토랑이 보였다. 그의 승합차가 한쪽에 주차되어 있었다.
레스토랑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를 통해 분주하게 손님을 맞는 황 경태 얼굴도 보였다. 그는 손님이 올 때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의 발 앞에는 내가 피운 짧은 담배꽁초가 여러 개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계획을 변경했다.
내가 간 곳은 뜻밖의 대형마트였다.
나는 다양한 공구를 파는 판매장에서 은색으로 너무나 반짝이는 망치 하나와 질긴 노끈을 하나 샀다.
택시가 저녁의 긴 정체 때문인지 30분을 훌쩍 넘어 한 빌라 단지 앞에 도착했다.
빌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실이 보였고 입구는 차가 임의로 들어갈 수 없게 긴 막대기가 내려와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Sir. No! No!”
막대가 내려진 진입로를 피해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실에서 정복을 입은 태국 사내가 나와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한참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으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영어로 친구 집에 왔다고 말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저장된 사진을 넘겨가며 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사진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은비의 얼굴이 보였다.
황 경태와 내가 어깨동무를 하며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나는 그 사진을 그 경비원에게 내밀었다.
잠시 후 경비원의 당황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리며 나에게 태국말로 말했다. 아마도 미안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 경비원은 자신의 무례를 상쇄하려는지 나를 오토바이로 황 경태의 집 앞까지 태워주었다.
경비원이 탄 오토바이의 허연 연기가 멀리 사라질 때 즈음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창살 넘어 안쪽에 유리로 된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곳에는 편해 보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정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치우 씨!”
수연이 창살 넘어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대문을 열었다. 그녀는 외출을 준비하는지 얼굴에 화사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치우 씨. 어떻게.....오늘 한국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네....일이 좀 있어서요. 은비가 먼저 갔어요.”
“네?”
정 수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아....내 정신 좀 봐. 우선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외출 준비하나 봐요?”
나는 정 수연의 붉은 톤으로 반짝이는 입술을 보며 말했다.
“아.....아니요.....”
말을 흐리는 정 수연이 왠지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 다 알고 있었지? 은비가 그렇게 된 걸 다 알고 있었지?’
나는 정 수연을 보며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커피 잔을 내 앞에 내려놓는 정 수연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경태 씨 하고는 연락하셨어요?”
“아니요. 연락 안 하고 왔어요.”
“네?”
내 말에 정 수연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역력했다.
소파에 앉은 나와 정 수연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정적만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사실 수연 씨한테 물어볼게 좀 있어서 왔어요.”
커피 잔이 싸늘하게 식어 있을 때쯤 정 수연에게 말했다.
“네? 무슨......”
“너는 알고 있었지? 다 알고 있었지?”
갑작스런 나의 반말에 정 수연이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에서 좀 점에 산 은색 망치를 꺼내 식어있는 내 앞의 커피 잔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그 소리에 정 수연이 놀란 듯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고 소파 안쪽으로 몸이 한 번에 쏠렸다.
“가증스러운 년....너도 악마야. 너는 다 알고 있으면서 지금 연기를 하고 있어.”
“네? 무...슨 소리에요?”
정 수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황 경태가......은비한테......은비한테 한 짓을....너도 알고 있잖아!!”
나의 고함소리가 거실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나의 눈가가 또 다시 뜨거워졌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정말 몰라요.......”
정 수연의 눈가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상관이 없었다.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줄게. 니가 알고 있는 것 모두 말해....”
“정말이에요. 저는....저는......몰라요.”
“너....정말!!!‘
나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에 있던 망치를 집어 들었다.
[빵빵!!!]
나와 정 수연의 시선이 일시에 거실 밖으로 향했다.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내 심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경....경태 씨에요......”
[빵빵빵!!!]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사람 지금 혼자가 아니에요....치우 씨 돌아가요.”
“뭐?”
정 수연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급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저기 저 문으로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빨리 나가요 빨리!!!”
정 수연이 나의 손을 급하게 끌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있던 그것을 가방에 넣고 정 수연이 이끄는 곳으로 밀려들어갔다.
건물 외벽이 보였다.
1미터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왜 문을 이렇게 늦게 열어!!!”
안쪽에서 화난 듯한 황 경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모퉁이 끝 쪽에 벽돌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창문에서 내부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뿌연 창문을 통해 거실이 내려다 보였다.
“손님 기다리게 문을 이렇게 늦게 열면 어떡하나?”
“미...미안해요. 주방에 있어서 못 들었어요.”
황 경태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정 수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황 경태 뒤에서 정복을 입은 사내 둘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정 수연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정 수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준비 다됐어? 니가 잘해야 돼? 저번처럼 실수하면 가만 안 둔다. 몰카 준비하고 옷 갈아 입고 와”
안방으로 들어가는 정 수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복을 입은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 경태의 가게에서 봤던 경찰 4명 중에 2명이었다.
간단한 영어로 하는 그들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다.
“경태. 항상 고마워.”
“하하하. 우리는 친구잖아.”
“그런데 저 여자 너무 예쁜데? 누구야? 새로운 여자 친구야?”
“누구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보지야.....으하하하...”
황 경태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여자는 한국 여자가 최고야. 하얀 피부....태국 년들은 검은 원숭이 같아....”
그때.
한동안 닫쳐있던 안방 문이 열렸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열려있는 안방 문 앞에는 짙은 화장을 한 채, 말도 안 되게 짧고 타이트한, 새빨간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정 수연이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