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외전 4화 에미르의 생일파티
* * *
“이……괴물같은 놈.”
기사가 오러를 일으키며 덤벼들었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
따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사의 오러는 실이 끊어진 듯 맥없이 사라졌다.
“이, 이게 대체?”
기사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시선을 피해 허공에 나타난 매직미사일이 놈의 가슴을 뚫었다.
“끄어억…….”
뚫린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게 제국을 배신한 대가다.”
“…….”
기사는 대답하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다.
와아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밀려들어왔다.
반란군을 제압한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그자를 벌써 죽이신 겁니까?”
선봉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코랄레스 백작, 이놈이 반란군의 사령관이라고 했었나?”
“그, 그렇습니다. 그자도 나름 소드마스터였는데, 역시…….”
“마스터를 제압하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이제는 손가락 조금 휘저어도 죽일 수 있는 것이 마스터였으니까.
“남은 건 알아서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네.”
나는 남은 귀족들을 뒤로하고 황궁으로 텔레포트했다.
“왔어? 아니 크흠흠, 왔는가.”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고 권좌에 앉아 있던 류클리드가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내 앞에만 보이던 해맑은 표정을 짓다가 이곳이 공식적인 자리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기침으로 표정을 숨겼다.
“동부 반란군 및 신설된 왕국의 세력까지 전부 토벌하고 왔습니다.”
“고생 많았다.”
여자로 변한 황제를 인정하지 못한 소규모 세력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정통성이 약해졌으니, 새로운 왕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연합해서 모였던 지방 귀족들이 모인 반란군.
내 입장에선 식후 거리 운동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크흠, 고생이 많았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는가? 공을 세운 신하에겐 그에 맞는 포상을 줘야 하는데.”
류클리드가 헛기침을 하며 내게 물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듯이.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있음에도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려는 거다.
“죄송합니다. 폐하. 오늘은 일정이 있는지라.”
“……아. 짐이 너무 무심했군. 내관은 준비한 선물을 보내도록 하라.”
내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류클리드가 입맛을 다셨다.
“아쉽구나. 오늘이 아니었다면, 국서와 함께 밤을 보냈을 텐데.”
“폐하께서는 아직 일이 많이 남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그 말이냐?”
“선물은 국무를 다 마치고 말씀하시지요.”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황제의 외침에도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위력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대전을 나갔다.
마나 균열이 사라진 이상, 이곳의 공기가 나를 자극하고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를 여자로 만든 장본인이니까.’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다.
나 역시 살기 위해 했던 짓이고, 만약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테니까.
‘불편한 시선을 굳이 받을 필요는 없지.’
그래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었다.
“늦지……않았겠지?”
조금은 서둘러야겠다.
***
드미트리 백작가의 저택.
넓고 거대한 저택의 정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제국의 중심인 드미트리인가요? 보지 못했던 진귀한 음식과 술이 많군요.”
“신경을 많이 쓴 모양입니다.”
“이건 트러플 버섯이 아닙니까?”
“드래곤의 고기로 만든 요리도 있습니다. 허허.”
멀리 타국에서 온 왕족부터, 중앙에서 끗발이 있는 귀족까지.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 주인공은.
“드미트리 백작부인은 올해도 아름다우시네요.”
“올해 생일에도 가장 빛나십니다.”
“아이를 낳은 몸이 맞나 싶다니까요?”
“저는 아이를 낳고 몸이 확 불었는데 말이에요.”
드미트리 백작부인이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드미트리 백작님은 어디로 가신 건가요? 지금 아내분이 생일날 홀로 외롭게 두시고 말이에요.”
“지방에 반군이 일어나서 출정하셨다지 뭐예요.”
“저런…….”
영애들과 귀족부인들이 숙덕거렸다.
오늘의 주인공인 드미트리 백작부인.
에미르 드미트리는 그런 그녀들의 수다를 잠자코 들었다.
어느새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귀에는 그들이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굳이 가서 끼어들지는 않았다.
실제로 모리스는 전장에 나갔고, 지금 그녀는 혼자였으니까.
저들의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새로운 화제 거리가 생긴 것이 신난 것이리라.
귀족 영애들이 그렇지.
“하아.”
에미르는 모리스가 일주일 전에 떠나면서 말했던 말을 되뇌었다.
‘네 생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겠다.’
뱉은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다.
분명 생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리라.
다만.
‘혼자서 보내는 생일이 길어지는 게 슬프구나.’
그 사실 하나가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언제 오시려나…….”
혹 파티가 끝나고 오시진 않겠지?
그렇게 되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 텐데.
그 부분은 조금 염려스러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를 위해 차려진 생일 파티가 즐겁지 않아졌고, 차려진 음식의 맛이 없어졌다.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세바스찬이 공손하게 물었다.
“좋아요. 너무 맛있어요.”
“주인님 때문입니까?”
“……예.”
“돌아오실 겁니다. 늘 그래 오셨으니까요.”
“그렇겠죠.”
그리고 저 멀리서.
웅성웅성.
귀족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오셨나 봅니다.”
저 멀리서 고풍스러운 차림을 한 남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발걸음 하나에도 우아함이 서려 있고.
몸짓 하나에 고결함이 묻어 있는 남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
모리스 드미트리.
에미르가 그토록 오기를 기다렸던 그녀의 남편이었다.
“미안하다. 예복을 차려입는다고 조금 늦었군.”
뚜벅뚜벅.
모리스가 에미르의 앞에 섰다.
방금 전까지 우울한 얼굴로 파티장에 앉아 있던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리스는 해맑게 웃는 에미르에게 손을 뻗었다.
“한곡 춰도 되겠나? 너무 많이 췄다면……. 실례를 좀 하겠네. 부인의 생일에 한 곡 추고 싶어서 말이지.”
“몇 번이고 가능하답니다.”
에미르가 모리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정원 중앙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남녀가 중앙에 섰다.
“오랜만에 춤을 춰서 어떨지 모르겠군.”
“발만 밟지 않으시면 됩니다.”
음악이 흘러나왔고.
두 사람은 서로 깍지를 낀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만들어낸 하모니가 울려 퍼졌고, 모리스와 에미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춤을 췄다.
워낙 아름다운 춤선이었다.
살짝 뻗는 손끝 하나에도 섬세한 매력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마저도 두 사람의 춤에 빠져들었다.
“잘 추시네요.”
“그대도. 솔라리온의 여식은 춤을 잘 춘다는 말은 허명이 아니었던 거 같아.”
“검을 배우기 위해서 춤을 연습했으니까요.”
나는 내 손을 꽉 잡은 에미르의 온기를 느끼며 춤동작을 이어갔다.
부드러운 스텝을 밟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에미르의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은 느낌.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서운했나?”
“뭐가요?”
“내가 파티에 늦게 와서.”
“일이 있으셨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반란군과 싸우는 일인데요…….”
그녀가 웃었다.
“솔직해지자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본심을 숨기면 섭섭한데.”
“……정말 듣고 싶어요?”
에미르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많이 섭섭했어요. 왜 오늘이었는지, 조금만 더 미루면 되지 않았을지, 시작과 끝 전부 모리스님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 시작을 하지 못했다는 게…….”
억지로 웃던 에미르의 진짜 표정이 나왔다.
섭섭함과 서운함이 짙게 드러나는 얼굴.
약간은 비죽 내민 입술까지.
“서운해요.”
“그 서운함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그걸 제 입으로 듣고 싶으세요?”
듣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되리라.
음악이 꺼지고.
나와 에미르는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에미르,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나는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고 두 팔을 내 목에 감았다.
에미르의 입술은 촉촉했고.
라벤더 향이 났다.
입술을 땐 에미르가 입을 열었다.
“저도 사랑해요. 최고의 생일선물을 받았네요.”
“선물은 더 있네만?”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는 귓속말에 에미르가 숨죽여 웃었다.
“기대할게요.”
에미르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처녀 때였다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겠지.
‘이것도 꽤 괜찮군.’
***
“……그래서 있죠? 다른 영애들이 어떻게 얘기했냐면…….”
생일 파티가 끝나고.
모든 귀족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멀리 타국에서 온 귀족들은 세바스찬의 안내를 따라 손님방에 머물렀다.
그리고 우리는 침실로 함께 걸어갔다.
에미르는 돌아가는 내내 내가 없는 동안 그녀가 했던 일을 늘어놓았다.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초대한 영애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최근에 어떤 요리를 연습 중인지.
아이가 자라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는 얘기들까지.
그대로 두면 끝도 없이 얘기할 것만 같았다.
소드마스터에 백작부인, 아이까지 낳은 엄마라고 해도.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 셋이었다.
하는 행동이나 모습은 처녀 때 그것 그대로였다.
“그거 아는가?”
“예?”
“이렇게 얘기하는 부인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걸.”
“호, 호호호. 정말요?”
칭찬 하나에 헤벌쭉 올라가는 입술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23살 소녀였다.
“참, 그거 아세요?”
“뭐가?”
“최근에 세간에서 돌아다니는 말이 있다는 걸요.”
“전혀 모르겠군.”
“어떤 부인이 모리스님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지 얘기가 돌고 있답니다.”
“재밌는 말이군.”
내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부인이라니.
그건 답이 뻔하지 않은가.
“저는 몇 위입니까?”
에미르가 내게 물었다.
“…….”
“대답하기 어려우신가요?”
“순위를 굳이 정해야 하나?”
“저는 듣고 싶은데요.”
“그대가 1위라고 말하겠네.”
“세리아와 황제가 있는데도요?”
“물론이지.”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에미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앞에서만 그리 말씀하시는 거 같지만, 속아드리죠. 후후. 그럼 1위 아내에게 줄 선물이 뭔가요?”
침실 앞에서 에미르가 내 손을 잡았다.
기대하는 그녀의 눈빛을.
나는 저버릴 수 없었다.
“가지.”
나는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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