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158화 모리스의 고백(류클리드)
* * *
“그게……. 사실이옵니까?”
백설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았다.
“그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니…….”
떨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혼란스러움 당황함.
나를 보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내게 물었다.
“제가 있는 이것도 일개 소설 속 장면이라는 겁니까?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모리스님은 보셨사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았던 소설에서 너는 없었다.”
“저는 없었다라…….”
그녀는 한동안 입술을 잘근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은발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아쉽네요. 제 미래를 모리스님께 물어보고 싶었는데.”
“믿는 건가?”
“믿고 안 믿고는 제 후보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전 모리스님의 아내이지 않습니까? 크루이 족은 부부 사이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
“그리고 저는 이미 모리스님이 저희 부족의 미래를 더욱 밝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믿음은 변치 않습니다. 모리스님이 소설 밖에서 우리 세상에 왔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백설이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저는 모리스님의 아내로서 모리스님을 섬길 뿐이지요.”
“백설…….”
“그렇게 생각하면 저흰 천생연분이 아닙니까. 모리스님이 소설 밖에서 온 사람이라면, 저는 저 장벽 밖에서 온 사람입니다. 제가 모리스님을 탓할 이유는 없지요. 그저…….”
백설이 나를 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부드러운 백설의 향기.
“그 고백을 제가 첫 번째로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백설은 내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었다.
***
레밀리아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내게 건넨 질문이 달랐을 뿐.
“이 세계가 그저 소설 속 세계일 뿐이라면 엘프의 숲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킨 건데?”
지켜야만 했다.
내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진실된 고백은 레밀리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거면 됐어.”
“그런가?”
“그래. 네가 소설 속 세계라는 얘기하면서 나랑 파혼을 하려는 건가 생각했었거든.”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나는 레밀리아의 뺨을 쓸었다.
“이리 아름다운 엘프가 내 부인인데.”
“다른 영애들한테도 이러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싫은가?”
“진짜……. 너는 이래서 문제야.”
레밀리아가 두 팔로 내 뒷목을 감쌌다.
매달리듯 내게 안긴 그녀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그게 내 매력이지.”
레밀리아의 가슴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
이제 남은 사람은 류클리드 하나.
이미 세실리아의 전적 때문에 그녀에게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랜만이시네요.”
고민만 하고 있던 내게 세실리아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에밀리가 괴롭혔나?”
“설마요. 그녀는 정말 잘해준답니다.”
세실리아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잘해준다는 의미가 여러 가지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럼 치맥이라도 같이 먹으러 온 건가?”
세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장관도 만났을 거로 생각해서 왔어요.”
“아……. 정령을 말하는 거군.”
“예.”
“어떻게 알았지?”
“말해줬어요. 그 정령이. 정말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면서.”
“재밌는 일이라……. 그놈들이 그리 말하긴 했지.”
모든 것은 재미 때문이라고.
“미안 해요.”
“네가 왜 미안한 거지?”
“제가 제대로 류클리드를 설득하지 못한 바람에.”
“설마 세실 네가 그를 설득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한 건가?”
“……조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자책할 필요 없다. 그러라고 구해 준 것도 아니니.”
세실리아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류클리드만의 잘못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진짜 죄인은 따로 있지 않던가.
‘빌어먹을 정령.’
강제로 운명을 결정하려는 그 빌어먹을 놈.
모든 불행은 그놈 때문이었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됐다. 그것보다 에밀리와는 잘 지내나?”
“예, 최근에 너무 바쁜 거 같아 보여서 걱정이네요.”
마치 나를 원망하다는 듯 말했다.
최근 에밀리에게 일을 맡긴 나를 탓하는 모양인데.
“결혼식이 끝나면 다 정상적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가 되면 서로 애정을 더 쌓을 수 있을 거다.”
“괜찮아요. 지금도 행복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말로 행복한 얼굴을 지닌 세실리아의 모습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장관님이야말로 괜찮은가요?”
“뭐가 말이지?”
“류클리드와 결혼하잖아요. 그는…….”
“뭐가 문제지?”
“그는……. 남자였었어요. 그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신가요?”
세실리아는 진정으로 류클리드의 파멸을 원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당한 것이 많았기에 하는 말이다.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럼 내버려 두세요. 그 혼자서 지내게끔. 그와 결혼하지 않으면 굳이 류클리드에게까지 고백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 수는 없다.”
“왜죠? 그가 황제이기 때문인가요? 정통성과 앞으로 있을 전쟁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실리아, 너는 류클리드가 완전히 여자로 변했다고 생각해서 이혼을 한 것이 아닌가?”
“…….”
“이미 몸도 마음도 완전히 여자가 되었다. 과거 로판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류클리드는 이제 없다.”
세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그리고 그 속까지 전부 완전한 여자다. 내가 그녀를 버리면 얼마나 심하게 무너질지 알지 않나.”
아마 진짜 미칠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당신의 고백만으로도 무너질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끔찍한 상처를 입었던 너처럼.”
피폐물 로판 남주답게 그가 가지고 있던 심적인 상처는 엄청났다.
세실리아의 말처럼 내 고백이 그녀를 더욱 망가지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차라리 내가 옆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거기다가.
“그리고 이미 정령은 류클리드까지 지정했어. 다섯. 다섯 명의 여자에게 고백하라고 했으니.”
세실리아를 이곳에 이끈 것도 정령이 주는 경고였으리라.
“하아, 당신의 선택이 그렇다면……. 알겠어요. 성공하길 빌게요.”
세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류클리드에게 고백하려는 것이 동정 때문인가요? 아니면 사랑?”
“아직은 안쓰러움에 가깝겠지.”
혼자 외롭게 있는 걸 볼 수가 없으니까.
내가 좋아했던 소설 속 주인공이 슬픔에 잠긴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드는 측은함.
그게 이 감정의 시작일 거다.
류클리드는 나를 보며 사랑을 느끼는 것 같지만, 불안한 그의 정신 상태를 감안했을 때, 다른 식의 애정일 수도 있다.
단순한 집착, 소유욕.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자기 감정을 내게 들이 받았다.
어쨌든 저쨌든 몸까지 섞었다.
그녀가 여자라는 걸 몇 번이고 확인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만약 그가 거절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건가요? 저처럼?”
세실리아가 묻는다.
“인과가 그렇게 흘러갈 거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으로.”
그녀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무사히 류클리드를 설득해주세요. 저는 그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이 싫어요.”
“걱정하지 마라. 나는 나를 지킬 힘이 있으니.”
다른 이들까지 전부 지킬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다.
그러니 나를 믿자.
그리고 류클리드를 믿자.
***
정령과 약속한 마지막 날.
이제 남은 사람은 류클리드 뿐.
나는 내 저택에서 드레스를 고르는 류클리드를 찾아갔다.
“모리스, 이거 봐! 어때? 예쁘지? 아무래도 내가 지크프리트 영애나 솔라리온 영애보다 가슴이 작으니, 조금 보완하려고 입어 봤는데…….”
어때?
재단사가 새로 맞춰 온 웨딩드레스를 입고 빙글 도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였다.
누가 이 소녀를 한 때 남자였다고 생각할까?
“너와 잘 어울린다.”
“헤헤,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누가 봐도 행복한 예비 신부였다.
“두고 봐. 결혼식에서 다른 영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할 테니까. 모두 내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할걸? 그때가서 질투하지 마.”
류클리드가 방방 뛰며 말했다.
철부지 소녀처럼 보였다.
누가 이 여자를 그때 그 근엄하고 잔혹했던 황제로 볼까.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이유가 어찌 됐든,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행복을 내 손으로 부숴야 한다는 것이.
‘어디까지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류클리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뭔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일까?
나를 보는 류클리드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하지 마.”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얼굴을 구겼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지?”
“너 지금 같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
“누구랑?”
“세실……. 그녀도 내게 그런 표정을 지었었어. 그리고…….”
류클리드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세실리아 때의 경험 때문일까.
그녀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말하지 마.”
말하는 류클리드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류클리드, 듣기 싫은 사실이라도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말하지 말라고 했어!”
류클리드가 물러섰다.
“듣지 않을 거야! 네가 뭔 말을 하던 믿지 않을 거라고!”
그녀가 양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러니까 말하지 마!”
그러나 류클리드 들어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 갔다.
귀를 막고 있는 저 손을 떼기 위해서.
“오지 마!”
쨍그랑!
테이블에 있던 도자기가 깨졌다.
접시와 유리컵이 떨어지며 깨졌다.
그리고 류클리드가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가 망가졌다.
“폐하!”
나는 당황하며 외치는 재단사를 쫓아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밖에서 기다리도록.”
“아, 알겠습니다.”
재단사를 내보내고, 나는 다시 류클리드에게 접근했다.
“오지 마!”
그럴 수록 그녀는 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흘러 화장한 얼굴이 얼룩졌다.
그녀는 나를 마치 귀신을 보듯 바라봤다.
“다들 거짓말쟁이들이야. 나를 사랑한다고, 나만을 바라본다고 했음에도 자기들만의 비밀을 숨겼어. 내가 무슨 상처를 받을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지 말라며 계속 뒤로 물러서는 류클리드.
“류클리드…….”
“나는 듣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마!”
“…….”
“세실도 너도 왜 그러는 건데!”
류클리드는 도망치듯 창가로 달아났다.
“들어야 한다. 류클리드 나는…….”
“말하지 마아악!”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진 류클리드는 창문을 뛰어 넘었다.
이곳이 5층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류클리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