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157화 그녀들의 대답.
* * *
말을 내뱉은 뒤에도 한참동안 입을 닫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령과 말이 자꾸만 머리에 남았다.
‘세리아가 평생 너를 감금하고 쥐어짜지 않을까? 너의 말을 믿었으면 좋겠군.’
그러나 이제는 피할 수가 없었다.
남은 시간은 이틀.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녀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너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인과가 잡힐 거야.’
라고 말하던 정령의 말.
미친 듯이 웃었던 그 얼굴.
“왜 그러신가요?”
세리아가 큰 눈을 깜빡깜빡 뜨며 물었다.
저 눈에 실망과 배신감의 상처가 담긴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품 안에서 올려다보던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네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있다.”
“비밀이라……. 어떤 비밀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시나요. 말씀하세요. 설마 제가 주인님의 비밀을 듣고 멀리 할까봐서요?”
세리아가 내 품에 깊숙이 안겼다.
“저는 주인님이 다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말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뭔가요? 두려울 거 없던 주인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고민이.”
세리아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빙글 간지럽히며 물었다.
내가 대답을 미루자.
쪽.
가볍게 내 아랫입술에 키스했다.
그런 그녀의 애교에도 내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말하자.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
“사실, 이 세계는 소설 속의 세계였다. 나는 그 소설을 읽었던 독자였고, 본래 너는 그 소설에서 류클리드와 이어지지 못한 악녀였지. 그리고 난 그런 소설 속 세계에 빙의한 빙의자다.”
나는 전부 말했다.
이 세계는 소설 속 세계였고, 나는 소설 밖에서 온 빙의자라는 걸.
“모리스 드미트리는 내가 빙의한 몸이다. 그의 영혼의 조각이 얼마 전까지 살아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 진짜 이름은…….”
잠시 머뭇거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유준이었다.”
말고도 내가 빙의자로서 가지고 있던 비밀을 전부 말했다.
세실리아와 세리아의 갈등, 과거 남자였던 류클리드와 세리아의 갈등 같은…….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전부 다.
세리아만이 알고 있을 이야기와 비밀을 나는 독자라서 알고 있었음을 전부 다 말했다.
“그게……사실인가요?”
“그래.”
세리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전부 다 사실이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으로 내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침묵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건가요? 용사나 마왕이 있다는?”
“그거랑은 조금 다른 종류지만, 그렇다.”
“주인님이 이 세계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나요?”
“이제 거의 4년이 되어간다.”
“그 때라면 주인님과 제가 제대로 만나기도 전이었네요. 드미트리 가문의 백작님도 사고를 당하기 전이었겠고요.”
“그랬지.”
“슬프셨나요?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요.”
“물론이다. 짧지만, 그분들의 사랑은 진심이었으니까.”
장례식에서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울었다.
모리스의 몸에 남은 진한 감정 때문이었지만, 짧은 시간에도 그들의 사랑은 진심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네요.”
세리아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한다.
아무리 당찬 세리아에게도 이런 일은 어색할 거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세상이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면, 당연히 충격을 받겠지.
아니, 믿지 못하겠지.
만약 그녀가 내가 말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나를 밀어낸다고 해도 받아들이리라.
이미 말을 꺼낸 순간 각오한 일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리아는 잠시, 그리고 아주 길게 생각을 이어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떨궜다.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했지만, 그건 내 욕심이리라.
세리아가 고개를 들며 나를 마주 보았다.
“그게 어째서요?”
“……뭐?”
“그거 때문에 고민이셨어요?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고 주인님이 그 속에 들어왔을 뿐이라서요?”
“그랬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 고작 그런 거 때문에 고민이라니요.”
“내겐 중요한 일이었다. 너와 진행할 결혼식만큼이나.”
그 말을 들은 세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고작 그런 일에 힘들어했다는 것에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주인님이 보았던 소설과 지금 주인님이 겪고 있는 세계가 똑같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와서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그녀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저와 주인님이 있는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인 걸요.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하얀 피부와 선홍빛 유두가 도드라진 그 가슴에 손가락이 닿자.
세리아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맨 가슴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느껴지시나요? 제 심장이 뛰는 촉감이? 들리시나요? 제 목소리가? 맡아지시나요? 서로를 보며 흥분하고 느꼈던 우리들의 체취가? 보이시나요? 지금 주인님을 바라보는 제가.”
나는 세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저랑 주인님과 함께 있는 이곳은 현실이에요. 이렇게 모든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현실 말이에요. 전 환상이 아니에요. 주인님도 환상이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나는 다르게 대답하려고 했다.
나는 보았다고, 진실로 소설을 보았고 경험해왔다고.
정령과 내기를 걸었고, 그로 인해 내 운명이 결정될 거라고.
그러나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사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소설 속 세계일지라도 무슨 상관인가요.”
세리아가 입을 맞췄다.
달싹거리려는 내 입을 막았다.
“저는 주인님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행복한 걸요. 그런 세계가 어디인지는 제게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주인님이 만져지는 걸요.”
입이 떨어지고,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제야 말이 되네요.”
“뭐가 말이지?”
“왜 제게 백마 탄 왕자님이 왔는지요.”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예,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그 순간에, 주인님이 나와서 절 구원해줬잖아요. 이제 다 괜찮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그녀가 내 가슴에 볼을 비볐다.
“그게 소설 세계니까 가능한 일이었던 거네요.”
“믿어……주는 건가?”
“물론이죠. 저는 주인님이 소설 밖, 아니 이 세계 밖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거예요.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세리아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네가 내 옆에 있는 이상은.”
“헤헤, 그런가요?”
웃는 세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껏 수도 없이 보았던 세리아였지만, 오늘 따라 그녀가 훨씬 더 아름다워보였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믿어준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많은 말을 해준 그녀가 믿음직스러워서.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서 세리아의 입을 맞췄다.
그녀를 안았다.
“자, 잠깐만요. 주인님!”
“싫은가? 나는 지금 하고 싶은데.”
“방금 전에 중대한 고백을 한 상태인데요?”
“그런 지금이니까 그런 거다.”
당장 그녀를 안고 싶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았다.
함께 시간을 보냈다.
***
[넷 남았어.]
정령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내가 고백해야 할 대상이 전부 다……. 라는 거군.”
대답은 없었다.
이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좋아.”
이미 한 번 칼을 뽑았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다른 영애들에게도 고백하실 건가요?”
세리아가 물었다.
“그래야지.”
“……저와 둘만의 비밀일 수는 없는 거죠?”
“그럴 것 같다.”
“아쉽네요. 주인님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
세리아가 뒤에서 나를 안았다.
“힘내세요. 응원하고 있을게요. 그녀들도 다 믿어줄 거예요. 저와 싸울 생각을 했던 이들이니까요.”
“그랬으면 좋겠군.”
“류클리드는 모르겠네요.”
“그건 그 때 가 봐야지.”
내 편이 생겼다.
완전한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아군이 생겼다.
오로지 나를 믿어주는 무조건적인 아군이.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생긴 거다.
나는 솔라리온의 저택을 찾아갔다.
에미르와의 독대.
그녀는 늘 그렇듯 쟈스민 차를 마셨다.
“무슨 일이세요?”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나는 에미르의 앞에서 한참을 뜸을 들였다.
“후우.”
“힘든 말인가요?”
“그래. 내 일생일대의 고백이다.”
그 말에 에미르가 자세를 다잡았다.
“말씀하세요. 뭐든 받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세리아 때처럼 나를 믿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나는 이방인이다. 이 세계 밖에서 온 이방인…….”
에미르에게 이 세계에 대해서 고백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까지도 전부.
“미안하다. 너는 최유준이 아닌 모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나는 너를 속이고 있었다. 원망해도 좋다. 저주해도 좋다.”
모리스는 다시 돌려 낼 수 없겠지만, 그를 어떻게든 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4년 전이라고 하셨나요?”
그러나 돌아온 건 전혀 엉뚱한 대답이었다.
“그래, 그 즈음에 빙의를 했다. 새로 내 삶을 살았지. 아까도 말했듯이…….”
“4년 전이라면 제가 이변을 느낀 그 날이네요.”
“이변?”
에미르가 다시 나를 보았다.
“어느 날부터 모리스님의 모습과 행동거지가 한 번에 바뀌었죠. 마치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맞아들어가네요.”
“에미르?”
그녀는 시원하게 웃었다.
막혔던 체증이 확 뚫린 것처럼 말이다.
“모리스님, 저보고 모리스님을 좋아했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하셨죠?”
“그래. 에미르 너는 언제나 모리스 드미트리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금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에미르가 내 옆에 앉았다.
“제가 좋아했던 건 이전의 모리스님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하신 최유……준? 저는 그의 영혼이 들어간 모리스님에게 반한 겁니다. 그 잔혹하기만 했던 모리스 드미트리가 아니라요.”
“……. 모리스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예. 저는 과거 모리스님을 보고 파혼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모리스님의 행동에 조금씩 젖어들어 지금까지 이르게 됐죠. 모리스님이 말하신 4년 전이라면……. 제가 느꼈던 그 변화가 일어났던 날과 일치합니다.”
“허.”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에미르에게 다가갈 때마다 늘 마음의 걱정이 있었다.
모리스의 몸이 지닌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 역시 내가 아닌, 모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그녀를 의도적으로 멀리했고, 나와 모리스가 하나라는 걸 인식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나를 좋아했었다니.’
지금까지 했던 고민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 세상이라는 걸 속였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지금 모리스님은 제 앞에 함께 계신데요. 같은 현실을 함께 느끼고 있잖아요?”
세리아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이 어떤 세계든, 모리스님과 함께 할 테니까요.”
활짝 웃는 에미르의 미소가 어떤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사랑은 아주 단순한 일로도 찾아온다고 들었다.
아마도 내겐 지금이 그 순간인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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