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155화 정령의 제안, 그리고 고백
* * *
모리스의 영혼이 사라졌다.
가슴 한 켠, 깊숙한 곳에 남아 있던 그의 영혼이 나 대신 초월자에게 잡아 먹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몇 년이나 모리스의 몸으로 살아왔음에도 아직 그의 영혼의 일부가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리고 그 영혼이 마지막 순간, 나를 위해서 초월자에게 희생당한 것도 놀라웠다.
그것이 내가 제정신을 갖고 초월자에게 반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초월자를 상대하기 위해 여러 플랜을 준비했는데, 전부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고맙다……라고 해야겠지?’
이제는 듣지 못할 모리스의 영혼에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상하네에.]
내 눈앞에 떠있는 이 정령이다.
분명 세실리아가 말했던 그 정령일 거다.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물어보던 그 녀석.
분명 불행한 순간에 왔다고 했는데, 왜 온 거지?
나는 정령을 보았다.
투명한 몸체가 마치 원을 그리듯 동그랗게 이뤄진 녀석은 허공에 둥실둥실 떠다니며 나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잠깐, 오랜만이라고?
이런 단어를 쓸 수 있는 건 이미 일전에 만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정령을 본 기억이 없었다.
정령을 보며 고민하는 동안.
[근데 왜 멀쩡해?]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멀쩡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분명 나는 방금 네 존재감이 옅어져서 이렇게 찾아왔는걸?]
“뭐?”
[이 녀석한테 흡수당하던 거 아니었어?]
정령의 둥근 몸체가 초월체를 가리켰다.
네놈은 대체 뭔데 본좌를!
“넌 닥치고 있어.”
끄으으윽!
이제 상하관계가 정립된 사이였다.
긴 말이 필요가 없었다.
내 말에 초월자, 이제는 내 하인이 된 녀석이 이를 악물었다.
“흡수당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네 영혼의 기척이 분명 옅어졌었거든. 그런데 다시 또렷해졌네?]
“그래서 온 건가?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물어보려고?”
[오, 알고 있었구나! 역시 세실리아가 말해준 거지?]
정령이 신난 듯 소리쳤다.
원래 세계? 그건 대체 무슨?
[넌 가만히 있어.]
으갸갸갸갹!
정령이 촉수를 뻗자,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초월자가 경련했다.
[자, 불청객은 잠재웠으니 다시 얘기를 시작할까?]
녀석은 내가 애먹었던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하긴.’
세실리아의 말이 맞다면 적어도 차원 너머로 보낼 수 있는 존재일 테니, 어줍잖은 상대는 아닐 것이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냐고 했나?”
[그래. 뭐, 원래 지금 물을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쪽 착오로 내가 여기로 왔으니 물어볼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당연히 가고 싶지 않다.”
[흐응~. 그래? 왜지?]
“이곳에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 쪽 세계엔 없고?]
“물론 있다.”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으려는 거야?]
최유준으로 살았을 때에도 소중한 사람은 있었다.
가족.
부모님.
그리고 몇 안 되지만 함께 있던 친구들.
처음에는 그들을 보기 위해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서 맺은 인연 또한 소중했다.
이제 최유준의 삶은 끝난 거다.
그리고 이곳에서 모리스 드미트리로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갈 거다.
“다시 돌아가는 건 이곳의 사람들을 내 손으로 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그렇구나아. 그거 알아?]
녀석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세실리아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랬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녀 역시.
이곳의 삶을 인정하고, 여기서 맺었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그래. 인연이란 거 중요하지. 좋아, 인정할게.]
정령의 몸이 반짝거렸다.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걸까?
[이 세상에 남겠다는 너의 의견을 존중할게. 다시 돌아가기 싫겠지. 권력, 여자, 힘……. 많은 걸 얻었잖아? 네 손으로.]
“…….”
[물론 내가 이곳으로 보내준 덕이지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네가 이곳에 남는 대신 조건이 있어.]
비용. 비용.
녀석이 허공에서 통통 튀었다.
“조건이 뭐냐.”
[간단해. 이곳에서 네가 맺은 인연을 믿는다면,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인연을 믿는다?”
잠시 뜸을 들인 정령이 입을 열었다.
[네 여자들에게 가서 고백하면 돼. 이 세계는 소설 속 세계이며 너는 그 소설을 읽었던 독자라고.]
[만약 그녀들이 너를 받아준다면? 너의 승리. 나는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그녀들이 너의 말을 믿지 않고 부정한다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벌을 받게 될 거야.]
“벌이란 건?”
[세실리아가 당한 일, 기억나지?]
정령이 키득거렸다.
[그것도 벌 중에 하나지.]
“이 녀석이 한 게 아니었나?”
나는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초월자를 가리켰다.
[맞아. 이놈이 류클리드를 부추긴 거지. 하지만 그 인과는 내가 만든 거야. 원래는 더 절망에서 헤엄쳐야 했었는데 말이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맞는 비참한 결말을 기대했는데 너 때문에…….]
정령이 입맛을 다셨다.
[아, 물론 그걸 탓하려는 건 아니야. 덕분에 꽤나 신선한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를 내게서 찾으려는 거군.”
[그래. 만약 그녀들이 이방인인 너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결말은 꽤나 끔찍할 거야.]
[아, 어떻게 될까? 세리아가 평생 너를 감금시키고 쥐어짤까? 에미르가 너의 사지를 자르는 것도 재밌겠다. 아니면 야만족들에게 끌려가 추운 북쪽에서 고립당하는 것도 좋겠네. 류클리드가 세실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는 건……. 조금 재미없을지도? 엘프들의 과녁이 되는 건 어때?]
녀석은 해맑은 목소리로 끔찍한 이야기를 뱉었다.
[아, 이미 뱉은 말은 취소가 안 된다는 점 명심하고.]
“내가 돌아가지 않길 바랐던 거 같군.”
[꼭 그렇지만은 않아. 왜 우리가 제일 힘들 때 오는데. 이왕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하니까 그러는 거지.]
“세실리아가 류클리드에게 빙의자임을 고백한 것도 이 조건 때문이겠군.”
[맞아. 히히히, 그 때 류클리드 표정은 가관이었지. 물론 지금의 그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정령의 눈이 아련해졌다.
[저런, 류클리드는 애인의 고백을 두 번이나 듣게 되겠는 걸? 이렇게 슬픈 일이.]
“네놈은 지독하군.”
[내가 아니라, 너희가 지독한 거지. 이기적인 선택으로 이 세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잖아?]
“네놈이 아니었다면 그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키키킥, 그럴지도 모르지.]
비용. 비용.
[하지만 선택을 한 건 너야. 나는 규칙에 따라서 네게 제안하는 거고.]
궤변이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알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만약 내가 성공하면 어떻게 되나?”
[앞으로 내가 네 앞에 나올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너는 이 세계에서 평생 살아가면 돼.]
“간단하군.”
말로 하면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빙의자라는 걸 고백하는 건.
빙의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중 하나였다.
과연 그녀들이 이해해줄까.
모르겠다.
특히, 류클리드는 더욱.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왜냐고?]
동글동글한 정령에게서 입이 생겼다.
정령은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으니까! 우리는 재미를 찾는 거야. 이 넓은 세계에서 따분한 우리의 삶의 재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거지. 그게 세실리아와 모리스가 된 거고.]
정령이 다시 한 번 키득거렸다.
할 말을 잃었다.
저 녀석에겐 사람들의 고통이 그저 재미로 끝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말해.]
“세실리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더 큰 불행을 맞이하는 건가?”
같은 빙의자.
남주에게 빙의자였음을 고백했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여주.
[더 힘들어진다고 하면 도와줄 기세네?]
“못할 것도 없지.”
[그건 걱정하지 마. 네가 그 굴레를 깼으니까. 그녀가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어. 우리에게 그런 권한은 없고.]
“알았다.”
권한이 없다.
그건 세실리아의 운명이 정령의 손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럼 네가 보여줄 고백을 기대할게.]
“언제까지 고백하면 되나?”
[3일.]
그 말을 끝으로 정령은 사라졌다.
***
황궁에 드리웠던 마나 균열이 사라지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황궁을 보았다.
특히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 모습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모리스가 그 균열을 없앴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이들은 경악하고 경외했다.
“역시 대마도사다.”
“그 수준은 인간이 감히 짐작할 수 없어.”
“다시 마탑주와 장관을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반란으로 잃었던 마법부 장관과 마탑주의 자리를 다시 돌려놔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능력만으로 말이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그건 마탑에 귀속된 초월자인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저 균열이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흡수의 초월체가 자신의 힘을 잃었다는 뜻.
저 황궁에 있는 초월자는 초월자들마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존재였다.
그러나 모리스는 해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일을 말이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황궁을 바라보던 제인은 장관의 사무실을 청소했다.
마법부 장관이 모리스에서 다른 인물로 바뀌는 동안 그녀는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았다.
‘나를 이기고 모리스님을 이길 수 있는 자에게만 자리를 주겠습니다.’
제인을 이길 수 없는 차기 장관은 새로 만든 사무실을 대신 사용했다.
제인은 빈 사무실을 지키며 모리스가 오길 기다렸다.
“돌아오신다면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해놓겠습니다.”
조만간이리라.
모리스가 다시 이 사무실로 돌아올 날은.
제인은 그 때를 기다리며 사무실을 닦기 시작했다.
***
“하아.”
한숨이 나왔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인해 눈이 아파왔다.
높아지는 안압을 진정시키고자 두 손으로 꾹 눌렀다.
한결 나아졌다.
“미치겠군.”
나는 그녀들을 믿는다.
절대로 내 말에 부정하지 않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 믿음으로 초월자를 이겼고, 황궁에 생긴 거대한 마나 균열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였다.
“이 세계가 만들어진 세계라는 말을 그녀들이 믿어줄까?”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된 고민은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저 세리아입니다.”
“들어와라.”
메이드복을 입은 세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오늘 웨딩드레스를 함께 알아본다고 하셨잖아요. 잊으신 거 같아서요.”
“아, 미안하다. 최근 급한 일이 많아서.”
“조금 섭섭한걸요?”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그 때, 세리아가 내 허리를 안으며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포옹?”
“그거면 되나? 값이 너무 싼 거 같은데.”
“그러면 키스까지?”
내게 붙은 세리아를 보는 순간, 고민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그녀들을 믿자.
“지불하도록 하지.”
나는 세리아와 얼굴을 포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