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153화 각 가문들의 사정
* * *
지크프리트 공작은 모리스의 저택에 찾아왔다.
모리스를 만나러 온 건 아니었다.
그가 만나려고 찾아온 건.
“오셨어요?”
세리아였다.
“세리아, 또 메이드 복을 입은 거냐? 너는 지크프리트 사람이다. 이런 걸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
“제가 바라고 입은 거예요. 주인님이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아는 이제 신분도 되찾은 공녀였다.
그녀의 삶을 대부분 존중하기로 마음먹은 공작이었다. 모리스와 함께 있는 것도 상관없고, 그의 시중을 드는 것도 어떻게든 버티겠다.
그러나 그녀가 메이드복을 입고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저질렀던 일이 떠올랐기에.
“계속 여기에 있을 거냐?”
“예, 제겐 주인님이 필요해요. 주인님 또한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고요.”
세리아는 떠올렸다.
술에 취한 모리스가 세리아를 보며 했던 말.
옆에 없으니 허전하더구나.
모리스가 말한 그 말 한 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
‘주인님도 나를 필요로 해.’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살자고.
주인님과 함께 있자고.
물론 아버지를 버려두고 혼자 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망가지기 전에도 두 부녀의 거리감은 꽤 있었다.
지금보다 더.
“후우, 너의 선택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잠시 세리아를 보던 지크프리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네가 지크프리트라는 걸 잊지 마라. 그건 너의 자긍심이고 네가 여기까지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니까.”
“알고 있어요. 저는 언제나 지크프리트인 걸요.”
“그래. 다행이다.”
잠시 침묵.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
지크프리트 공작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모리스의 집무실에 찾아와, 다섯 영애가 전부 모리스의 아내가 되겠다고 외쳤을 때를 떠올렸다.
“이길 수 없었을 수도 있었거든요.”
“결투에서 승률은?”
“반반이었어요.”
“그래서 협상을 한 것이냐?”
“예.”
“잘했다. 패배 확률이 절반이라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공작은 물었다.
“그 안에서 1등을 할 수 있겠니? 모리스를 네가 독차지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물론이죠.”
세리아는 자신이 있었다.
모리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 말이다.
“저는 주인님의 첫 번째 부인이 될 거예요. 그게 권력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물론이지. 너는 사랑을 하면 된다. 그걸로 가문을 키우는 건 내가 하마.”
세리아가 모리스를 홀딱 빠트리게 한다면, 그걸 이용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선은 넘지 마시고요. 가끔은 걱정됩니다.”
“하하, 걱정하지 말거라. 선을 타는 걸로 50년을 살아왔다.”
실수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모리스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으니.
“그런데 어쩐 일로 나를 부른 거냐?”
공작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고백할 게 있어서요.”
“네가 고백이라……. 심상찮은 일이겠구나.”
어지간한 일로는 이렇게 초대하지 않는 세리아였다.
무슨 일일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세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 저……. 임신했어요.”
“……뭐?”
“임신했다고요. 주인님의 아이를 가졌어요.”
세리아가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자신의 배를 쓸었다.
“아이?”
“예. 주인님과 제 아이에요.”
“어떻게 가능한 거지? 초월체는 인간의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하프라서가 아닐까요?”
세리아가 웃었다.
진심으로 행복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허허.”
공작 또한 맥없이 웃었다.
한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감동? 벅참? 아니면 억울함?
모르겠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때도 이렇게 감정이 격하지 않았다.
처음 자신의 딸을 만난 것도 대뜸 찾아온 릴리스 때문이었으니.
그 때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가문을 위해 쓸 도구가 하나 늘어났다는 것이 전부.
내전에서 전사했던 첫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손자……인가?”
“이제 할아버지가 되시는 거예요. 아버지.”
“할아버지라…….”
뭔가 뭉클해지는 단어였다.
그 차갑다는 지크프리트 공작마저도 얼굴이 풀어질 정도로.
“이왕이면 아들이면 좋겠구나.”
“왜요?”
세리아가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널 닮은 아들이 보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뱉을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
“그래야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아버지답네요.”
세리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선물을 사오마. 아이를 가졌다는데 그냥 둘 수는 없지.”
무슨 선물을 살까.
잠깐 체통을 잊고 손자 선물을 고민하던 공작이었다.
“그런데 어쩌실 건가요?”
“뭐가 말이냐?”
“결혼식 말이에요. 반대하실 것처럼 보였는데.”
“흥, 반대라니. 네가 황제보다 아름다운데 어찌 지겠느냐.”
조금은 반대할 생각이 있었다.
당연히 세리아가 단독으로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고, 모리스까지 동의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네가 모리스의 아이를 가졌지 않느냐. 그러면 됐다.”
손자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단순한 할아버지였다.
“남자아이라면 검을 선물해주고 싶은데……. 이왕이면 책을 선물하는 것도…….”
세리아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솔라리온 공작은 침울했다.
물론 에미르의 임신과 결혼은 축하할 일이다.
아니, 축하할 일이 맞는가.
그녀는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하아. 모르겠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반군 소식을 들었다.
흩어진 황제파들이 병사들을 모아서 서부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곧 모리스를 필두로 한 병력으로 인해 전멸당했다고 들었다.
수뇌부와 구심점이 없는 그들은 이제 곧 굴복할 거다.
그들은 황제파도 귀족파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겠지.
‘귀족파라는 게, 황제파라는 게 남아 있던가.’
지금 신 귀족파는 모리스를 필두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들의 수장인 모리스 드미트리는 친 황제의 절차를 밟아갔다.
그들도 어찌보면 황제파이지 않을까.
“결국 제국을 위한 일이라는 건 같을 텐데…….”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어.
검을 잡았던 아둔한 자신의 머리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버지, 부르셨나요?”
에미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게 할 말이 있어 불렀다.”
“말씀하세요.”
“황제의 국서가 모리스로 정해졌고, 너도 다른 영애들도 전부 참여했으니. 곧 결혼식이 있겠지.”
“그렇겠죠.”
잠시 창 밖을 바라보던 솔라리온 공작이 한숨을 내뱉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흐름이 달라졌다면, 편승할 줄도 알아야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솔라리온 공작이 에미르를 보며 말했다.
“이번 결혼식에서 네가 가장 빛나야 한다. 에미르 솔라리온만이 모리스 드미트리와 가장 어울리는 여자라는 걸 보여줘라.”
“당연하죠. 황제보다도 지크프리트 영애보다도 제가 더 어울리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에요.”
“지원을 아끼지 않으마.”
솔라리온 공작이 딸과 말하는 동안, 류클리드는.
“이게 아니야.”
“이것도 별론데.”
“더 괜찮은 거 없어?”
결혼식에 사용할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원래라면 모리스와 함께 고르고 싶었다.
그의 의견을 듣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말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도 전부 덤벼들겠지.’
황제의 명으로 강제하기엔 그들의 직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종족도 있잖은가.
‘모리스도 나만 만나려고 하진 않을 거야.’
황제의 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
답답했지만, 이것 또한 적응이 되고 있었다.
모리스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이후로, 상황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더 좋은 거 없어? 결혼식에선 내가 주인공이 돼야 해. 황제의 결혼식이잖아.”
“그, 그렇습니다. 폐하.”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찾아온 재단사가 대꾸했다.
“신부는 다섯이지만, 그 중에 내가 제일이어야만 해. 만약 그러지 못하면…….”
그녀가 재단사를 노려보았다.
“알지?”
“무, 물론입니다. 폐하. 신 최대한 황제폐하께서 구, 국서분께 사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좋아. 그럼 다음.”
류클리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재단사가 어깨선이 드러나는데다가 등판까지 노출이 되는 파격적인 드레스를 꺼냈다.
“이, 이걸 결혼식에서 입으라고?”
“시선이 집중될 겁니다. 그리고 부군께서 만약 이러한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너, 너무 야, 야하지 않나?”
“폐하께서 입으시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이까.”
“그, 그것도 그렇긴 하지.”
류클리드는 어깨와 등이 푹 파인 아슬아슬한 드레스를 보았다.
“이거 입으면 엉덩이 골도 보일 거 같은데…….”
파격적인 노출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모리스의 시선을 뺏을 수 있겠지?
약간 혹하긴 했다.
“이것도 후보로 올려둬.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옷이 어떤지 물어보려면 앞에서 입어봐야겠지?
펑!
그 생각을 하자, 류클리드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녀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 옷을 입었을 때 놀란 모리스.
욕망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덮치는 모리스.
“아잉, 그러면 안 되는데……. 되는데…….”
“황제 폐하?”
재단사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듯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크흠흠……. 다, 다음 옷을 내오거라.”
“알겠습니다.”
재단사는 생각했다.
황제폐하가 많이 바뀌었다고.
백설과 레밀리아도 각자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사방이 난리였다.
모두 모리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묘한 경쟁심리가 붙었다.
물론, 모리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
“초월자의 방식도 모두 알았습니다. 어디에서 의심을 심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헌데 굳이 이렇게까지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세바스찬이 물었다.
그가 들었던 초월자의 방식을 자신의 주인이 전부 막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다른 곳에 집중하면 될 텐데.
‘결혼식도 있고 정세도 살피셔야 하는데…….’
모리스는 자꾸만 초월자에 꽂혀 있었다.
황궁을 원래대로 만들겠다는.
다시금 미친 황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진 채로 말이다.
“근데 그게 전부일까?”
모리스가 말했다.
“뭔가 비장의 한 수가 있을 거야.”
“저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세바스찬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뭐든 대비하는 게 좋다는 거지.”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마지막 만남에서 그 놈은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하려고 할까.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초월자의 마지막 한 수.
나는 그것을 예측해서 녀석에게 반격을 먹여야만 했다.
“어렵군.”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세바스찬.”
“예, 주인님.”
“만약 자네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나?”
“예?”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했잖나. 그래서 묻는 거야. 인간이 아니었던 자네에게 말이지.”
“…….”
세바스찬은 보았다.
자신의 주인이었던 모리스를 이 자리까지 만들었던, 그리고 초월체였던 자신과 릴리스를 인간으로 떨어트린 집착을 가진 남자가 다시 한 번 불이 붙었다는 것을.
“한 번 같이 생각해보지요.”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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