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152화 충격 선언
* * *
또각또각.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류클리드의 구두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흥!”
류클리드가 콧김을 내뿜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폐하, 오셨사옵니까.”
지크프리트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잘 못 지냈나 보네.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하하, 어제 벌어진 결투가 당사자의 도주로 애매한 결과를 내지 않았습니까.”
“그거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다들 모이라고 했어.”
말을 마친 류클리드가 잠시 내 눈치를 봤다.
이거 진짜 말해도 되지? 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섯 영애들과 함께 밤을 보낸 이상 숨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짐은 황제의 직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오오, 좋은 소식이옵니다. 헌데 어찌…….”
지크프리트 공작의 눈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얼마 전까지 황제를 하기 싫다며 애새끼처럼 거절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설마?’
류클리드가 외쳤다.
“짐이 새로운 국서를 맞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국서!
지크프리트의 눈이 내게 향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이 뜨거웠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지금 저런 눈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리스 드미트리가 앞으로 내 국서가 되어줄 거다.”
그녀가 가슴을 내밀며 어깨를 폈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는 듯 말이다.
“폐하!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결투가 제대로 끝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지크프리트가 반발하며 외쳤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이미 다 협의가 된 얘기니까.”
“예?”
“이제 들어와.”
류클리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세리아?”
“에미르!”
남은 네 영애가 들어왔다.
백설고 레밀리아까지.
지크프리트 공작과 솔라리온 공작 모두 놀란 눈빛이었다.
“이게 무슨?”
“짐을 포함한 다섯 영애는 모두 모리스의 정식 부인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예?”
류클리드의 충격적인 선언에 두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 대체……. 무슨? 다섯 부인이라니요! 첩도 아니고 정실이 다섯이라는 건 제국에 없던 일입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류클리드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차피 내가 황제잖아. 없던 일도 만들 수 있는 걸.”
“허……. 모리스 장관도 말씀 해보시오.”
“폐하의 말대로요.”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 말이 다 맞는데.
“에미르, 대체 무슨 소리냐! 다섯 부인이라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버지.”
“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때 세리아가 입을 열었다.
“왜 안 되죠? 제국에서는 황제 폐하가 곧 법인데요.”
“세리아, 네 어찌…….”
“죄송해요. 아버지.”
말을 마친 세리아가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저는 모리스님을 가져야만 했거든요.”
“하아…….”
그 모습을 보던 에미르가 내게 팔짱을 끼웠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단단하기만 하던 솔라리온 공작이 풀썩 주저앉았다.
“허…….”
그러자 류클리드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질 수 없다는 듯 뒤에서 나를 꼬옥 안았다.
“모리스는 내 꺼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 반박은 안 받을 거야!”
아무리 뭣 같은 결정이라도 황제의 결정이라면, 두 공작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제국의 시스템이었다.
꼬우면?
반란 성공시키던가.
“예, 폐하.”
두 공작이 다섯 여자를 옆에 끼고 있는 나를 보며 눈을 불태웠다.
***
결국 류클리드도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네놈이지.”
나는 제국의 망령인 흡수의 초월자를 마주보았다.
약속은 제대로 지키는군. 저번 주에 내가 말한 건 생각해봤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쯧, 재미가 없어.
녀석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소문 들었다. 류클리드 그놈이 다시 황제가 됐다고.
“그래.”
왜 네가 하지 않고? 그놈을 올린 거지? 너도 충분히 그 자격이 되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세상을 한 번 지배해보고 싶지 않나? 절대자의 위치에 서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이미 황제가 내 것인데.”
뭐?
흡수의 초월자에 대해 세바스찬과 함께 연구했다.
의심을 심고 그 의심과 충동을 부추겨서 광기를 불러오는 존재.
사람들의 이성을 뺏고 자신의 멋대로 움직이려 드는 녀석.
의심을 통해 성장한다는 거.
재밌는 방식임과 동시에 위험한 방식이었다.
사람인 이상, 주위를 의심하고 다르게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의심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라니.
문제는.
“말했잖은가. 황제가 내것이라고.”
나는 내 행동에 의심 따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황제가 네 것이라……. 정말 황제를 국서로 맞이한 것인가?
녀석이 키득거렸다.
나를 보는 눈이 범상치 않았다.
결국 다 가졌군? 내 말대로 말이야. 너를 두고 싸우는 그 모든 여자들을 가졌어. 말로는 아니라고 고상한 척을 했지만, 네놈 또한 본능에 휘둘리는 남자라는 거지. 크크큭.
“미안하지만, 내 의지가 아니었다.”
네 의지가 아니었다? 비겁한 변명으로 숨으려는 건가? 네놈 정도 되는 강자라면 충분히 그 여자들을 전부 이길 수 있었을 거다.
“왜 그녀들을 이겨야 하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나 역시 그녀들을 사랑했다.
아끼고 잃고 싶지 않으며 멀리 떨어진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니, 그 것이 사랑이 아니면 뭐겠는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로군.
녀석이 낄낄거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이지?”
분명 좋아야 할 일인데 말이야. 왜 세리아는 너를 혼자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녀라면 다른 여자들을 전부 이겼을 텐데.
“네가 많이 모르는군. 남은 네 명도 만만치 않다.”
크크크, 모르는 건 네놈이다. 절반이라도 초월체다. 초월체가 얼마나 강한데 그것을 인간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녀석이 날아 올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년이 너를 이용하는 거라면? 너를 이용하고 진정한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거라면 어찌할 텐가.
놈의 말을 듣던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를 의심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생각이었다면, 초월자가 진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2개가 있었다.
세리아와 에미르.
그녀들은 절대로 날 의심하게 만들 일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에미르는 내 가문이 무너지고 나서도 그 사랑을 변치 않았고.
세리아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모리스 가문의 하녀로 남았다.
내가 두 사람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몰랐던 건가?
알았는데 말한 거라면 멍청한 거라는 거고.
몰랐다면 이놈의 능력이 형편없다는 거다.
“시끄럽군.”
뭐?
“3번이면 나를 현혹시킬 수 있다는 말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은가?”
지금 본좌를 우습게 보는 건가?
“물론이다.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려고 하는데?”
본좌가 이렇게까지 얕보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그와 동시에 공기가 떨렸다.
녀석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미증유의 기운이 나를 덮쳤다.
힘에 짓눌려 본좌의 위대함을 맛보아라.
‘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초월자의 기운이 약한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균열에서 마나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이 적응했어.’
세리아가 진심으로 나를 홀리려고 사용했던 매혹향에 몸이 적응한 거다.
어지간한 힘이 아니라면 비슷한 힘은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나보다 더 놀란 건 초월자였다.
뭐, 뭐지?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나보지?”
네, 네놈 뭐냐? 대체 왜?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생각보다 너무 별 거 없는 거 아닌가?”
이 자식이!
초월자가 이를 악물고 외치지만 그 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놈은 그저 주먹을 꽉 쥐며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다음은 없나? 설마 여기에서 끝이야?”
본좌를 이렇게 당황하게 하다니,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이렇게 얕보다간…….
삐. 삐. 삐.
시간의 끝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벌써 끝인 거 같은데?”
나는 녀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한 번 남았다. 다음 주에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기길 기대하겠다.”
하하하, 건방진 아해로고.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가 내게 보여준 존재감에 비해서 너무 얕은 공격력에.
차라리 세리아가 나를 유혹할 때가 훨씬 더 위태로웠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마법만 쓸 수 있었다면…….’
아주 가볍게 버릇을 뜯어고쳤을 텐데.
아쉽다.
***
모리스가 떠나고.
초월자는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어째서 통하지 않은 거지?
과거 대마도사라고 불렸던 이들도 자신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복종했다.
그로 인해 제국의 일부가 박살나기도 하지 않았던가.
광기 어린 마도사의 공격에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런데 대체 왜?
저 인간은 멀쩡하냔 말이다.
설마, 릴리스의 딸이라던 세리아 그년 때문인가?
그녀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신계 현혹을 할 수 있는 초월자였다.
그런 힘에 여러 번 노출이 되었다면 저항력이 생기길 마련.
각성한지 몇 달도 되지 않은 녀석이 그런 힘을 쓸 수 있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모리스가 자신의 힘에 저항한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절대 질 수 없지.
그 누구도 자신을 지배하지 못했다.
여기서 모리스에게 진다면, 녀석의 수중 아래로 떨어지는 거다.
인간의 황제 따위는 자신의 발밑에 두던 초월자다.
그런데 한낱 인간의 밑으로 들어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방법은 그거뿐인가?
모리스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던 초월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