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47화 다섯 영애들의 결투
* * *
다들 활동하기 좋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검술 연습 때 자주 입는 간편한 옷들을 말이다.
“하, 뻔뻔하네요. 아직도 그렇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다니.”
세리아가 류클리드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잘못 없어. 그날 모리스가 유독 술에 취해 있었을 뿐이야.”
“술에 취했었다고요?”
류클리드의 반박에 반응한 건 에미르였다.
술에 취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폐하, 설마 술 먹이고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가요?”
류클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명예도 모르는 분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요?”
“말했잖아. 오해라고.”
“그건 차근히 들어보도록 하죠. 진짜 오해인지, 아니면 오해인 척을 하는 건지 말이에요.”
에미르가 눈을 빛냈다.
“다들 흑심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리스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저 같이 헌신적인 여자밖에 없지요.”
백설이 미소를 지었다.
“야만족 년은 입 다물고 있지?”
류클리드가 빈정거렸다.
“제국의 황제가 되실 분이 품위가 없사옵니다. 어찌 그런 험한 말을.”
“뒤늦게 참전한 년이 말이 많네.”
“그런 폐하께서는 모리스님과 밤이라도 보내셨사옵니까?”
“뭐?”
“그럼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니! 나는 모리스와…….”
류클리드는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무슨 사이지?
그녀가 좋다고 모리스에게 앵기는 건 맞지만, 정작 모리스는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결국 대답하지 못하시네요.”
에미르가 말했다.
류클리드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인간들끼리 싸우는 꼴이 애처롭네.”
레밀리아가 그런 그녀들을 보며 혀를 찼다.
“엘프는 닥쳐요. 당신도 어차피 이 싸움에 낀 거 아닌가요?”
세리아가 레밀리아의 말을 끊었다.
“나는 모리스가 질 나쁜 여자들에게 당하는 걸 막으려고 온 거야. 모리스의 진정한 처는 나뿐이니까.”
5명의 여자들은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이들을 보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전부 모리스를 독점하기 위해선 다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였다.
이 결투에서 승리하는 여자가 모리스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서로 적의를 불태울 때였다.
뿌우우우!
군악대가 뿔나팔을 불었고, 모리스가 가장 상석에서 우뚝 섰다.
결투 전 축사.
목을 가다듬은 모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투를 위해 이곳까지 온 다섯 영애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하겠소. 모두가 매력적인 여성이오. 내가 아니더라도 남자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허나 이렇게 나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이 고맙고 미안하오. 전부 내 매력 탓이지.”
자조적으로 웃은 모리스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저 결투장에 선 다섯 영애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소. 누구 하나 더 좋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누가 승리하던 나는 승리한 영애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선언하겠소.”
“룰은 간단하오. 지금 손에 쥔 목검을 이용해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면 해당 영애는 탈락할 것이오. 마나와 기 등, 기운을 사용하지 않고 싸워야만 하며, 이를 어길 시 곧바로 실격패 당할 거요.”
후우.
축사와 룰 설명을 마친 모리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뿌우우우!
경기를 시작함을 알리는 뿔나팔이 울렸다.
세리아를 제외한 4명의 영애가 각자의 검술 자세를 잡았다.
에미르는 솔라리온 검술을.
류클리드는 제국 검술을.
백설은 크루이 족의 검술을.
레밀리아는 엘프들의 검술을.
그러나 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세리아는 그저 검을 늘어놓는 것 고작이었다.
허나 그 누구도 그런 세리아에게 접근할 생각을 못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
에미르가 생각했다.
단순히 늘어놓은 것이 고작이지만, 공격이 성공할 거란 자신이 없었다.
잠깐의 대치상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중에.
파앗!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세리아였다.
그녀는 바닥을 박차고 류클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주인님을 덮치려는 도둑고양이!”
콰앙!
“꺄악!”
세리아가 휘두른 검을 막은 류클리드의 몸이 붕 떴다.
이게 사람의 힘이 맞아?
가까스로 착지에 성공한 그녀는 자세를 다잡았다.
그러나.
“흐아아압!”
세리아는 류클리드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쾅!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한 세리아의 공격을 본 다른 영애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투의 시작.
방금 전까지 경계만 하던 긴장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들은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남아 있으면 우승하기 힘들어.’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암묵적인 동맹이 맺어졌다.
류클리드가 세리아의 공격을 받아내는 사이, 레밀리아가 빠르게 접근해 세리아의 빈틈을 노렸다.
퍽!
“크윽!”
세리아는 사각에서 접근하는 레밀리아의 목검을 튕겨냈다.
백설의 검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가능하다고?”
경악하는 레밀리아를 지나친 에미르가 세리아의 가슴을 노리며 검을 찔렀다.
“성가셔.”
파악!
세리아가 그녀의 검을 튕기고는, 다시 류클리드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류클리드부터 떨어트리겠다는 목적이 눈에 훤히 보였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류클리드가 외쳤다.
솔직히 억울했다.
싸움에 참가한 여자들 많잖아.
그런데 왜 굳이 나만 노리는 거야.
설마 술 한 번 먹였다고?
그래, 모리스랑 기정사실을 만들려고 한 건 맞다.
그런데 나 빼고 여기 여자들은 다 했다면서. 나한테만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분명 세리아가 자극될 테니.
“크윽!”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녀가 많이 바뀌었다는 건 이전에 알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강할지 몰랐다.
“적당히 해!”
류클리드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웅!
닿지 않았다.
세리아는 그런 류클리드의 빈틈을 노리며 검을 내리찍었다.
정교한 검술의 교리따윈 없는 단순한 일격.
닿는 모든 것을 부술 것 같은 공격이었다.
따악!
그러나 세리아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백설이 끼어들어 막았으니까.
“괴물 같은 힘이옵니다. 사람이 어찌…….”
“비켜.”
“이런 지크프리트 영애를 혼자서 어찌 이길까요.”
“비키라고 했어.”
“미안한데 아직은…….”
그러나 백설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검을 맞댄 그녀의 몸이 붕 떴기 때문이었다.
세리아가 검 째로 백설을 튕겨냈다.
백설도 힘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믿었었는데.
“헙!”
쿵.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니, 저게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닙니까?”
“마나라도 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검을 맞댄 상대를 그대로 내팽개치다니요.”
“헌데 모리스 장관은 아무말이 없지 않소? 마나를 썼다면 모를 리가 없지.”
“지크프리트를 원해서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겠소?”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 중 어느 것도 결투장에 있는 영애들에게 닿지 않았다.
“주인님은 누가 뭐래도 내 꺼야. 그분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세리아는 지금 이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 화가 났다.
‘주인님은 내가 지켰어야 했는데.’
저 수많은 도둑고양이들이 주인님을 현혹하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그녀가 힘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이가 갈렸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만든 류클리드부터 박살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왜 다른 영애들은 이를 필사적으로 막는 건지.
‘다 황제 편이야.’
모두 그 도둑고양이에게 홀려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잔뜩 흥분한 세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리스를 보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녀들을 보는 모리스.
어쩜 저리 멋있으실까.
다른 여자들이 홀리는 건 당연했다.
그와 동시에.
“하압!”
에미르와 레밀리아가 동시에 세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소용 없어!”
세리아가 그녀들의 검을 받아치려고 휘두른 순간.
홱!
에미르가 세리아의 공격을 흘렸다.
“어?”
세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에미르를 보았다.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어요. 지크프리트 영애.”
“이익!”
에미르의 말에 세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한 힘으로 부순다.
라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을 때.
파악!
이번엔 레밀리아가 그녀의 검을 받아쳤다.
“저를 무시하지 마시죠.”
“니들 전부?”
두 사람과 한 엘프가 싸우는 도중.
백설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참전하죠. 두 분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검을 챙겨서 세리아를 공격하려고 할 때였다.
퍼억!
“아악!”
목검이 백설의 배를 강하게 후려쳤다.
류클리드가 방심한 백설을 공격한 거다.
“백설! 탈락!”
사회자의 외침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경쟁자는 제거해야지.”
“이, 이런 비겁한!”
백설을 마무리 한 류클리드가 검을 챙겼다.
그녀에겐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모리스.
그를 갖고 싶은 욕망.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걸 자신할 수 있었다.
절대 못 넘겨.
어줍잖은 이를 국서로 데리고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황족이라고 부를 이가 류클리드만 남은 상태에서 앞으로 황실을 이룩하기 위해선 훌륭한 유전자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나 아무리 그 욕망과 기세가 대단한들, 타고난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꺄아악!”
레밀리아와 에미르 그리고 세리아의 삼파전에 낀 류클리드는 머지않아 탈락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도무지 승부가 정해지지 않는 싸움이었다.
세리아가 공격하면 에미르와 레밀리아는 피했고.
에미르와 레밀리아의 공격은 세리아에게 닿지 못했다.
결국 똑같은 공방의 반복.
그 수준이 너무 대단해 지루하지 않을 뿐이지, 세 사람의 구도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고착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3시간.
무려 3시간이나 진행된 기나긴 결투.
모리스라는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세 여자의 싸움.
그 대립과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때, 레밀리아가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싸워야 해?”
“그게 무슨 소리죠? 이제 이기기 겁이 나시나?”
세리아의 날카로운 대답과.
“엘프라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싸움은 우리들의 명예가 걸린 싸움입니다. 그리고 모리스님이 달렸고요.”
에미르의 똑부러진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 꼭 모리스를 승자 혼자 차지해야 하냐는 얘기야.”
“예?”
레밀리아의 난데없는 질문에 두 여자가 눈썹을 구겼다.
“빠지고 싶으면 빠져. 나는 이겨야 하니까.”
“어차피 다 모리스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그럼 차라리 공평하게 다 모리스의 아내가 되면 되는 거잖아.”
“엘프는 그런가 보죠?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갖는 것이.”
“엘프는 오로지 한 명과 관계를 맺어. 인간과 다르게. 하지만 내가 아는 인간들은 한 남자가 혹은 한 여자가 여러 이성을 거느리는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레밀리아는 늘 그런 걸 봐왔다.
여러 아내, 여러 남편을 데리고 있는 인간들을 말이다.
“모리스라고 그러지 말라는 이유가 있나?”
“엘프라 몰라서 그러는데 그것도 정실 부인과 첩이 나뉘어져…….”
“그럼 다 정실이 되면 되잖아? 너희는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 아닌가? 너희가 하자면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어 보이는데.”
레밀리아의 말은 그럴싸했다.
모두가 정실이 되자.
제국의 법은 그걸 용인하지 않지만, 이 결투장에 선 일원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공작가의 영애 둘, 제국의 황제, 엘프의 대장과 야만족의 여왕.
이 대륙에서 끗발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하자고 하면 못할 것이 없을 직위를 가지지 않았던가.
“틀린 말은 아니네요.”
에미르가 수긍했다.
물론 모리스를 독점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세리아를 온전히 이길 거란 자신은 없었다.
반은 초월체.
그것도 서큐버스.
힘으로도 매력으로도 그녀를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더 길게 싸워도 승부는 나지 않을 테니.
그녀가 완전히 차지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같이 차지하는 것 또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같은 정실이 된다면?
이 문제로 질투할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고민하는 에미르를 보던 레밀리아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통했다.’
레밀리아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단순했다.
저 세리아를 이길 수 없을 거 같아서.
설사 세리아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에미르라는 여자를 이길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내뱉은 말이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끄으응.”
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역시 이 고착 상태를 깨기 위해 여러 수단을 사용해보았다.
그러나 에미르와 레밀리아의 협공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싸운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옅어질 즈음.
레밀리아의 제안이 귀에 들어온 거다.
모리스를 다른 여자들과 공유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저 년들을 모두 처리하고 그녀만이 모리스를 독점할 수 있는데 대체 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내가 실수라도 해서 진다면?’
영원이 다른 여자의 손에 모리스가 놀아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모리스를 공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거기다가.
‘내 매력으로 주인님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
세리아는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쳤다.
싸움을 더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 저기 탈락한 두 사람은?”
“저들도 포함해야지요. 결국 같은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이니까요.”
“흥.”
세리아의 눈에 황제, 류클리드가 들어왔다.
짜증나는 여자인데다가 속셈이 훤히 보였으나 어쩌겠는가.
레밀리아의 제안이 성공적으로 먹히려면 황제는 꼭 필요했으니까.
“좋아.”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르도 동의했다.
탈락한 두 여자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만장일치네요?”
모두가 검을 내려놓았다.
그녀들이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
갑자기 결투를 멈춘 여자들이 나를 보았다.
‘뭐지?’
결투장에서 이야기하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보는 여자들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마치 내 몸이 다섯 조각으로 찢겨지는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옆에 선 로널드가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여기에 있다가는 큰일이 날 거라는 걸.
나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널드.”
“예?”
“뒤를 부탁하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텔레포트를 썼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린.
텔레포트로 몸을 옮기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싸움을 멈춘 영애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다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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