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146화 새로운 참가자 레밀리아.
* * *
“멍멍!”
돌아가자, 릴리스가 나를 반겼다.
아니, 반기려고 했다.
“끼이잉.”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친 릴리스가 달려오는 걸 멈추더니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매번 알몸으로 내게 덤벼서 곤욕을 치르게 했던 릴리스가 말이다.
마치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릴리스.”
“멍멍! 크르릉!”
릴리스가 이를 드러냈다.
평소와 다른 반응.
‘심어진 건가.’
나는 몸을 내려 보았다.
심어졌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심었다는 건가.
‘어떤 트리거가 있던 것도 아니었어.’
공격을 한 것도, 특정한 주문을 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녀석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대화 사이에 녀석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놀랍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녀석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릴리스가 주인님을 거부하다니, 위험하군요.”
세바스찬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외눈 안경을 치켜 올렸다.
“얼마나 위험한 거지?”
“릴리스는 주인님께 절대적인 충성을 약속한 존재입니다. 그만큼의 정력을 줘야 하는 거지만 말이죠. 무튼, 주인님의 상태에 가장 민감한 릴리스가 주인님을 경계한다는 건 주인님에게 큰 변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세바스찬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 힘이 변했다는 겁니다.”
“이게 시작이겠군.”
“아마 그렇겠죠.”
나는 세바스찬을 보았다.
“그럼 시뮬레이션을 하도록 하지.”
“시뮬레이션, 말씀이십니까?”
“그래. 세바스찬 네게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거 같군.”
“흠,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럼 초월자를 만난 부분부터 다시 복기하도록 하지.”
“그 전에 릴리스를 진정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래, 나도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
세바스찬과 시뮬레이션은 간단했다.
그날 초월자와 했던 대화를 바탕으로 그가 무슨 짓을 했고, 왜 이변이 심어졌는지 유추하기 위해서였다.
첫 시뮬레이션이 끝나기가 무섭게.
“역시…….”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로 인해 의심이 심어진 겁니다.”
“의심이라. 놈 때문에 고민했던 찰나의 순간에 말인가?”
“예. 사람을 광기로 빠트리고 그 이성을 흡수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녀석의 장기이니까요.”
“재밌군.”
“의도하신 겁니까?”
“뭐가 말이지?”
“녀석과 대화했을 때, 일부러 녀석이 말을 많이 하도록 의도하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보였나?”
나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왜 그러신 겁니까? 만약 대화의 주도권을 주인님께서 가져가셨다면 의심이 심어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떤 녀석인지 알기 위해서는 상대가 말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방법이지.”
“알 것 같으십니까?”
“어떻게 초월자를 상대해야 하는지?”
“예.”
“당연하지.”
세바스찬과의 시뮬레이션으로 확실히 느꼈다.
녀석이 어떤 놈인지 말이다.
잠시 나를 유심히 살피던 세바스찬이 빙긋 웃었다.
“다행이군요. 주인님께서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항상 엄청난 일이 일어나곤 했지요.”
“그랬나?”
“예.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하셨을 때도 딱 그 표정이었습니다.”
“재밌군.”
그 때도 지금과 같았다니 말이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주게.”
“걱정하지 마십쇼.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책임지겠습니다.”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이제 사흘 뒤면 결투가 시작됩니다만……. 준비하신 건 있으십니까?”
“준비라니?”
“그, 원래 기사들끼리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애가 축사를 건네곤 합니다.”
“굳이 영애들 싸움에 축사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정통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절차이니까요. 절차는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번거롭군.”
“하하, 일을 만드신 건 주인님입니다.”
“그래. 내 업이긴 하지.”
후우.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축사라…….”
뭐라고 축하를 해야 하는 거지?
아니, 애초에 축하를 할 일인가?
한 명의 남자를 두고 4명의 여자가 싸운다는게.
오히려 저주의 단어를 내뱉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건 또 아니지.’
그러라고 만든 자리는 아니었으니.
“고민을 해봐야겠군.”
“보통 영애들이 자신의 마음이 가는 기사를 응원하는 것이 축사의 기본이긴 합니다만…….”
세바스찬이 잠시 내 눈치를 봤다.
“주인님께서 누구 한 명을 응원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이제 놀리기로 작정한 건가?”
“가끔은 이런 날을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늘 주인님께서 부려먹는 집사도 즐길 필요가 있어 보이니 말이죠.”
세바스찬이 너털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우당탕!
저택의 마당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음? 무슨 일이지?”
“잠시 제가 확인을……. 호오?
상황을 파악하려던 세바스찬이 창문을 가리켰다.
“음?”
고개를 돌려 세바스찬이 가리킨 곳을 보자.
“하악, 하악. 내가 늦지 않은 거 같은데?”
엘프 대장, 레밀리아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레밀리아, 어쩐 일이지?”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너를 두고 4명의 여자가 싸운다고.”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이미 딴 년들이 먼저 너를 가지고 니꺼다 내꺼다 할 수 있냔 말이야.”
레밀리아가 으르렁거렸다.
“절대 그렇게는 못 두지. 너는 내 남자야. 다른 년한테 절대 못 뺏겨.”
“레밀리아. 이건 인간의 문제…….”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나도 너랑 뜨, 뜨, 뜨거운 바, 밤을 보냈는데…….”
힘차게 외쳤던 레밀리아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주인님?”
세바스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일이냐고.
해명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엘프에게까지 손을 대신 겁니까? 제정신이십니까?”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레밀리아, 너도 알잖느냐. 우리가 던전에 갇혀서, 그것도 하룻밤을 보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방에서…….”
레밀리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엘프들에게 같이 보낸 하룻밤이 얼마나 귀중한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말씀은 아닐 테지요?”
세바스찬이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책임을 지라는 말이었다.
그는 내게 직접적으로 잔소리를 넣을 사람이 아니었다.
세바스찬에게 이 정도의 잔소리는 분노 섞인 일갈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인간은 망각할 수 있지만, 엘프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세바스찬, 그리 일일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된다.”
“영웅은 호색한이라는 얘기가 유명하지만, 주인님께서 이 정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바스찬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무슨 소문이 돌지 모르겠군요. 이미 4명의 영애가 싸우는 것으로 주인님은 세상 천지에 없는 쓰레기가 되셨는데.”
“쓰레기? 어떤 놈이 감히 내게 쓰레기라 칭하는가.”
“소문을 모르셨습니까?”
“듣긴 했다.”
“많이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별 소문이 다 있습니다. 숨겨진 애가 있다. 애를 배게 했는데 일부러 낳지 못하게 마법을 걸었다. 부럽다. 거기는 작겠지. 최면 마법으로 영애들을 홀리게 한 거 아니냐 등등. 저잣거리에 악의적인 소문들도 꽤 많습니다.”
“모리스가 그럴 리 없다! 어디 헛소문을 퍼트리는가!”
레밀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한 듯 했다.
“감히 내 모리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진정해라. 레밀리아. 너무 흥분했다.”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나와 세바스찬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후우, 아무튼!”
숨을 고른 레밀리아가 빛을 비춘 유리처럼 빛나는 한 송이의 꽃을 내밀었다.
엘프들의 보물.
세계수의 꽃.
줄기를 꺾어도 죽지 않으며 물만 준다면 평생 산다는 희귀한 꽃이었다.
한 송이만으로 성 하나를 살 수 있다는 보물.
이걸 어찌 모를까.
세리아가 처음으로 마나에 민감하다는 걸 알게 해준 녀석인데.
“나도 신청하겠다. 인간들의 행사에 나도 끼겠다는 뜻이다.”
“이 결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내 질문에 레밀리아가 받아쳤다.
“모리스, 너도 엘프들의 하룻밤이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뒤늦게 알았지.”
“그럼 책임을 져.”
“……알았다.”
나는 맹렬한 눈으로 나를 보는 레밀리아의 꽃을 받았다.
골치 아파지겠군.
세리아랑 에미르가 분명 한 소리 할 텐데.
“결투는 사흘 뒤다. 준비하도록.”
“이미 준비는 다 끝났어.”
“그럼 무드는 배웠나?”
“무, 무드?”
“날 유혹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긴 했는데…….”
다시 한 번 레밀리아가 내 눈을 피했다.
“설마 배우지 않은 건가? 그래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거, 걱정하지 마. 그 결투에서 이기고 진심으로 널 유혹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겠다.”
나는 레밀리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은 그런 모리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리 끼를 부리시니 여자들이 주위에 꼬이지.’
레밀리아의 표정을 봐라.
좋아 죽으려고 한다.
눈도 못 마주치고 배배 꼬는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게 익어 있었다.
“하아, 저것도 죄라면 죄겠구나.”
그는 너무 잘난 모리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
엘프마저 결투에 참여했다는 소문.
당연히 퍼질 수밖에 없는 이슈였다.
세리아와 에미르 백설과 류클리드가 난리를 피운 건 나중 얘기.
“5명이 한 남자를 두고 싸운다니, 미친 일이군.”
“능력이랑 외모가 되니까.”
“진짜 최면이라도 건 게 아닐까?”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고, 머지않아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제국 중심부, 거대한 콜로세움.
전례 없던 영애들의 결투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맞는 건가.
잠시 생각했다.
허나 방법이 없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이 말이다.
“운명의 신이 점지해주시리라.”
생각을 마친 나는 콜로세움의 가장 상석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저 아래, 콜로세움 경기장엔.
다섯 명의 여자가 한 자리에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