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145화 흡수의 초월자와 첫 번째 만남.
* * *
“그런데 결투 종목은 뭘로 하실 겁니까?”
수도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는 거야 알고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닐 때마다 그 얘기로 가득했었으니까.
이제 그들의 궁금증은 하나.
무슨 종목으로 그녀들이 겨룰까?
사상 초유의 사태에 시선이 모두 모였다.
“이제 슬슬 정하셔야 할 때입니다.”
“알고 있네.”
“정하시지요.”
공평한 대결.
백 프로 모두가 동등한 조건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가진 격차는 좁힐 수 있는 종목을 낼 생각이었다.
“검술. 그 어떤 마나의 사용도 불가능한 채로 싸우게 될 거다.”
“……황제를 의식하신 겁니까? 아니면 에미르 영애를 생각해두신 겁니까?”
로널드의 질문의 의도는 이거다.
오로지 검술만을 가지고 승부를 낸다면 그 두 사람이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류클리드가 가장 불리할 거다.”
그녀는 훌륭한 검술을 가지고 있지만, 타고난 완력은 세리아나 백설이 더 훌륭했다.
그만큼 에미르와 류클리드는 정교한 검술로 싸우겠지.
“토너먼트입니까?”
“아니. 4명 전부 다 한 경기에서 승부를 볼 거다.”
“단판이군요.”
“그래.”
“알겠습니다. 그리 공표하도록 하지요.”
고개 숙인 로널드가 밖으로 나갔다.
“후우.”
내뱉는 숨이 무거웠다.
“어떻게 되려나.”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벌써 황궁에 갈 시간이군.”
흡수의 초월자와 약속한 일주일이 벌써 다 됐다.
총 3번의 방문.
그 첫 번째.
그 전에.
적을 알 필요가 있었다.
“세바스찬.”
“예, 주인님.”
“흡수의 초월자, 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
“그 자가 보이시는 겁니까?”
“그래.”
세바스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좋지 않은 소식이군요.”
“뭐가 문제가 있나?”
“황제가 저리된 것이 저자 때문이라는 건 아실 겁니다.”
“이미 경험해봤다.”
그의 옆에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패닉과 공포.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은 감각이 선명했다.
“사람의 이성을 먹고 광기로 채우는 작자입니다. 사실상 초월체들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그 작자의 탓이지요.”
“그런가?”
“종종 황가에서 미친 황제가 나오는 것이 다 그 탓입니다. 저것이 보이는 이들은 전부 다 미쳤습니다. 역대 황제들은 전부 다 저 황궁 안에만 지냈으니까요.”
“그는 지배자의 운명을 타고난 거라고 했다.”
“맞습니다. 지배자의 운명, 그것이 바로 초월자를 볼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동안엔 왜 안 보였던 거지?”
“아마……. 이미 초월자가 류클리드에게 만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류클리드가 무너지고 숙주를 잃은 초월자가 내게 모습을 드러낸 거군.”
“맞습니다.”
쯧.
여러모로 귀찮은 존재였다.
류클리드를 벗어나, 내게 기생하려고 한다라.
“녀석의 목적은 뭐지?”
“자신을 저 균열 밖으로 꺼내줄 자를 찾는 것이지요. 이미 육체를 잃어버렸으니, 그 밖으로 나가도 멀쩡한 육체를 원하는 겁니다.”
“초월자들의 목적은 한결같군.”
“우리에게 자유란 없으니까요.”
세바스찬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유가 없다라.
“자유를 얻은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셨잖습니까.”
그가 말하는 건 릴리스 이야기일 거다.
“그래도 세바스찬 자네는 멀쩡하잖은가.”
“저 역시 주인님께 귀속된 몸이니 그런 것이지요.”
앞으로 드미트리가를 모시겠다는 그의 약조.
앞으로 평생, 드미트리 가문을 모시는 것이 그가 제정신을 갖고 있는 이유였던 거다.
“재밌군. 초월자라는 것은.”
“황궁을 무너트리는 것은 안 되는 겁니까? 아니면 황궁의 위치를 바꾸는 것도 방법입니다.”
“황궁을 바꾼다라.”
류클리드를 황제로 돌리는 마당에 황궁의 위치를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뭐, 둘 중 하나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어쨌든 물리쳐야 할 존재다. 이놈이 계속 살아 있다면 앞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겠지.”
“없애시려고 하신 거군요.”
“그래.”
“어쩌신 겁니까? 설마 그와 내기를 하신 겁니까?”
“그래. 세바스찬 자네와 했던 것처럼.”
3번의 방문을 할 거라는 것도 말해줬다.
말을 들을 때마다 세바스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허어. 3번이라. 좋지 않군요.”
“내가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10프로 미만입니다.”
“10프로면 많이 낮군. 나는 그보다는 높게 잡았는데.”
“강한 정신력을 가지셔야 합니다.”
“흐음, 다른 조언은 없나? 녀석의 약점이라던가.”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상대의 정신을 홀리는 등의 알 수 없는 기술을 쓰는 작자였습니다.”
세바스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 먹은 듯 했다.
“그럼 녀석이 왜 흡수의 초월자라는 이명이 생긴 거지? 릴리스도 있잖은가.”
“그건 아마……. 그자의 능력 때문일 겁니다. 릴리스는 단순히 상대의 정력을 흡수한다면. 그 자는 상대의 이성을 모두 흡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성을?”
“예, 그 자의 이성을 흡수하고 욕망과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괴물로 만드는 것이죠. 인간으로서, 지성체로서 삶을 부수는 겁니다.”
“지성을 흡수한다는 건가.”
“맞습니다. 그리고 부수는 거죠. 그 인간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고 자신의 취향대로 만드는 겁니다.”
“재밌군.”
동시에 무서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성을 부수는 저 거대한 초월자를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많은 준비가 필요할 거다.
첫 번째 만남은 내가 그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알려주리라.
“조심하십쇼. 언제든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하시고요.”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되었다.”
“돌아오시면, 릴리스와 함께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왜 그러지?”
“그녀라면 주인님이 변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이따 보도록 하지.”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는 배웅하는 세바스찬을 뒤로 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
왔군.
초월자가 키득거렸다.
시간에 딱 맞춰왔어. 기계인 줄 알았잖아. 혹시 사람이 아닌 거 아니야?
다시 한 번 키득거렸다.
“시간은 준수해야지.”
꼭 그럴 필요가 있나? 결국 업무의 효율성은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닌, 얼마나 그 일을 알고 있느냐인데. 굳이 시간을 지킬 필요가 있냐는 거야.
녀석이 내 주위를 날며 말했다.
“기본적인 약속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일을 논할까.”
에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시간을 지키는 녀석들도 무능하다면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인데?
말을 마친 녀석이 다시금 키득.
“쓸데없는 소리다.”
뭐, 됐어.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건 아니니까. 정말 얼마나 반가운지 모를 거야. 이런 곳에 사람 하나 없고, 물론 사람은 있지. 날 보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뭐, 그런 곳에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왔는데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수야 없지.
초월자가 의자를 꺼냈다.
“물리력도 가진 건가?”
뭐, 가끔씩. 내 존재를 볼 수 있는 자들 앞에서만. 그러지 않으면 귀신이라고 놀라거든. 굳이 황궁에 괴담 하나 늘릴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의자에 앉았다.
참, 소식을 하나 들었어. 너를 다투고 영애들이 싸움에 붙었다면서? 류클리드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황제 맞지?
“그래.”
대단하군. 그 고집불통을 단숨에 네 여자로 만들다니. 그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아, 그게 아니고.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뭐지?”
왜 굳이 싸워야 하는 거지? 다 네가 좋다는 여자들 아닌가? 어차피 너를 좋아하는 여자들이고 너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다 가지면 그만이잖아?
초월자가 허공을 빙글 돌았다.
“웃기는 소리. 제국에는 법이 있다.”
법이야 있지. 뭐,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어. 다만, 그걸 다 지키고 살지 않는다는 거지. 저 봐. 첩을 들이지 말라, 바람피우지 말라고는 하지만 제국 누가 그걸 지키냐? 너도 그랬잖아. 결혼하지 않은 처자들과 밤을 보냈고 심지어는…….
초월자가 내 배를 뚫고 등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녀석이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임신까지 시켰지.
히죽.
놈이 웃었다.
그런 놈이 제국의 법을 운운한다는 것이 웃기잖아? 심지어 하나가 아니던데? 다른 하나는 릴리스의 딸……. 생각해보니 대단하네. 인간이 하프 초월체의 아이를 단번에 임신시키다니.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 여자가 네게 모든 걸 다 넘긴 거야?
“모든 걸 다 넘겨? 무슨 말이지?”
아 몰랐나? 서큐버스가 아이를 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놈을 보았다.
놈은 진지하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서큐버스가 아이를 밴다는 건 너를 제외한 다른 남자에겐 정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이야. 일종의 맹약이라고. 즉, 네가 그 여자를 버린다면 꼼짝없이 죽는 목숨이라는 거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뭐?”
그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릴리스의 서재 어디에도 없던 내용.
그런 내용이 있었나?
모를 만도 하지. 서큐버스가 인간의 아이를 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릴리스는 다른 남자의 정기를 먹으려고 했었다.”
멍청하긴. 그년이 직접 세리아를 품었을 거 같아? 그리고 너를 품기 위해서 세리아의 몸에 빙의한 걸 잊었어?
그랬던가?
릴리스가 세리아의 몸을 원했던 것이?
자유와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모르겠다.
알지 못하는 정보로 인해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쯧쯧, 이러니 좋은 선생이 필요하다는 거야. 누구든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초월자가 내 몸을 통과해 다시 허공을 둥실 떠다녔다.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네 성격에 세리아가 이기게끔 하지 않겠지. 그래도 방법은 있어. 류클리드가 이기게 만들고 세리아를 첩으로 들여. 아무리 국서라고 해도 첩을 둘 수는 있으니까.
“첩?”
그래. 첩으로 둔다면 굳이 세리아와 밤을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세리아도 굶어죽지 않겠지.
“문제가 있다.”
뭐지?
“내가 국서가 된다면 황궁에 류클리드와 함께 머물러야 하겠지. 아니면 류클리드 혼자서 머물거나. 그렇다면 네가 여기 있다간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거다.”
하하하! 그거 때문에 표정이 그리 썩어 있던 건가?
시원하게 웃던 초월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류클리드는 건드릴 생각도 없어. 그리고 네가 날 이기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네 밑으로 들어가게 해보겠다면서? 그럼 네가 나를 두려워 할 일은 없게 되는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고려사항이 아니다. 네놈을 이길 거라는 100프로 확신을 갖지 않았으니까.”
확신이 아니다라……. 그럼 뭐지? 여전히 불안한 건가? 네가 나한테 질까 봐?
“불안? 불안 따위는 없다. 다만, 아직 내게는 네가 넘어야 할 산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지.”
마법사답군. 지금까지 만난 황제들이랑은 케이스가 달라.
초월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주 만족스러워. 이런 상대를 만났다는 게 말이야. 참, 재미있는 친구야. 너는.
낄낄낄.
웃는 소리가 궁전에 울렸다.
심장을 옥죄는 웃음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한없이 가벼웠던 무게감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웃음소리는 짧았다.
내 심장을 압박하는 기운도 금세 사라졌다.
나는 넘어야 할 산이 아니야. 그저 너와 대화를 하고 싶은 초월자일 뿐이라고. 제인이나 세바스찬처럼 말이야.
“근본부터가 다르다. 그러니 현혹하려고 하지 마라.”
쯧, 이렇게 못 믿어서야 쓰나.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뭐, 한 번에 이야기가 통할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어.
그때였다.
삐. 삐. 삐.
벨이 울렸다.
저런, 시간이 다 됐군. 10분 지났어.
“10분인가?”
그래. 몇 분 만나자는 약속을 맺지는 않았잖아? 첫 만남은 짧고 아쉽게 만나야지. 물론 다음엔 조금 더 길게 만날 거지만.
초월자가 자꾸만 울리는 시계를 껐다.
“별 거 없군.”
말했잖아. 나는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녀석이 손바닥을 위로 뒤집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
그 웃음엔 어떠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 웃음이.
적의가 없다는 것도.
내게 웃는다는 것 자체도.
“이게 끝인가?”
그래 오늘 방문은 이게 끝. 돌아가도 돼. 막지 않을 거야.
“그럼, 가보도록 하지.”
그래. 잘 가라.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첫 방문이 끝났다.
***
초월자는 멀어지는 모리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쿵!
문이 닫히고, 모리스가 나갔다.
크크크크크, 크크크킄킄, 크하하하하하하하!
광포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거 같지만, 어리군. 클클클.
입 꼬리와 눈매가 기이하게 휘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스러움을 자아내는 얼굴이었다.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황제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군.
자신의 말에 의문을 갖는 모리스의 순진한 표정을 보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먹어치우고 싶은 욕망이 단전에서부터 샘솟았다.
당장 그 머리를 잡고 녀석의 혼을 빨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참았다.
아직은 아니야.
과일은 적절하게 익었을 때가 가장 맛있는 법.
그는 그 때를 알았다.
설익은 열매를 따먹는 것만큼 재미없는 건 없다.
심어졌다.
모리스가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고, 의문을 가진 순간 첫 방문은 그의 승리였다.
광기는 별 것이 없었다.
그저 계기를 만들어주면 된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외줄 위에 서 있는 법.
그것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든, 얼마나 오래 산 사람이든, 그 줄 위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줄 위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떨어지는 자들은 저 끝이 보이지 않는 광기에 빠져 허덕이게 되는 거다.
자신은 그저 가볍게 밀면 되는 것이다.
타락은 알아서 되는 것.
그 계기가.
모리스가 자신의 말을 믿고 의문을 갖는 그 찰나의 순간에.
심어졌다.
키키키키. 아주 재밌겠어. 벌써 다음 주가 기대되는군.
점점 자신의 말을 사실처럼 믿고 따를 모리스의 모습을 말이다.
어떻게 미는 것이 좋을까?
광기에 빠진 모리스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 오만한 인간 마도사가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육체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크크크크크크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