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144화 폭풍의 전조
* * *
“역시…….”
세리아는 이를 꽉 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서 도둑고양이처럼 비겁한 수를 쓸 줄은 몰랐네요.”
“세, 세리아? 어, 어떻게?”
모리스 위에 올라탄 류클리드가 당황한 얼굴로 세리아를 보았다.
마치 물건을 훔치려다 걸린 도둑 같은 모습이었다.
“혹시나 싶어 왔습니다. 공정한 대결을 위해, 그리고 제가 신분을 되찾았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 했어서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말이죠.”
세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에미르도 그렇고 저 야만족 공주 백설도 그렇고 심지어 저 환락가의 엘프까지도 모리스를 덮치려고 안달이 난 상태지 않은가.
모리스를 노리는 적들이 너무 많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 류클리드가 그를 덮치려고 하지 않던가.
알몸인 채로 술에 잔뜩 취한 모리스의 몸 위에 올라 탄 상태였다.
만약 세리아가 오지 않았다면, 그의 옷을 벗길 기세였다.
실제로 벌써 셔츠 단추가 2개나 풀려있지 않던가.
“그렇게 술을 먹여서 뭘 하려고 그런 거죠?”
“내기를 했거든. 세리아,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
“그 내기가 발가벗고 올라 탈 필요가 있는 종목인가요?”
분노한 세리아는 지금 분노의 상대가 황제라는 것도, 과거에 그녀가 좋아했던 남자였다는 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매혹향이 피어올랐다.
문제는.
지금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닌, 당장이라도 상대를 죽이기 위해 뿜는 기운이었다.
“세, 세리아?”
세리아와 눈을 마주친 류클리드가 움찔거렸다.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세리아가 이렇게 강했다고?’
수많은 강자들의 마나와 힘을 받았던 류클리드였다.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그녀의 강함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지금의 그녀, 아니 원래 류클리드였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요. 알몸으로, 올라갈, 내기였냐고요.”
“그, 그게 말이지. 사실…….”
세리아의 기운에 압도당한 류클리드가 서둘러 모리스의 배에서 내려왔다.
“빨리 옷 입어요.”
류클리드는 순순이 세리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잠시나마 세리아의 기세에 눌렸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녀가 기억하는 세리아 지크프리트는 그저 고집이 센 영애였을 뿐이니까.
‘내가 잘못 느낀 걸 거야.’
입술을 깨문 류클리드가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왜, 왜 온 건데? 분명히 이제 지크프리트니까 모리스의 저택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도둑고양이가 제 귀한 물건을 훔쳐갈 거 같아서요. 혹시나 싶어서 왔는데 역시나…….”
“너, 너 지금 나보고 도둑고양이라고 한 거야?”
“그럼 아닌가요? 지금 하는 짓은 도둑고양이, 아니 발정난 암고양인데요?”
세리아가 옷으로 몸을 가린 류클리드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렇게 주인님께 안기고 싶었나요? 신성한 결투의 규율마저 어길 정도로요? 이제 여자가 다 됐나 봅니다? 황.제.폐.하.”
“이, 이이익! 아까 말했지만 나는 내기를…….”
“설마 진 사람을 덮치려는 내기였나요?”
“아, 아니야!”
“두 달 전까지 남자였던 주제에 이제 여자가 돼서 남자의 사랑이 필요했던 건가요?”
세리아가 쏘아붙이는 소리에 류클리드가 주먹을 쥐었다.
“네가……. 네가 뭘 알아. 고작 두 달이 아니었어.”
류클리드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세리아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겪은 그 지독한 일들을.
남자의 자존심은 물론이고, 정체성까지 전부 다 잃어버릴 정도로 고독하고 괴로웠던 경험이었다.
남자 류클리드는 그 곳에서 죽었다.
“하, 이제야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나봐요? 그 전까지는 전부 다 버린 주제에.”
류클리드를 보는 세리아의 눈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 의해 밑바닥까지 쳐 박혔던 세리아였다.
이제야 모리스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는 상황에 갑자기 끼어든 류클리드.
에미르와 혼담을 취소한 건 고맙지만 그것과는 별개 문제였다.
류클리드가 아니어도 취소할 수 있었을 거다.
“전부 다 버렸다고?”
세리아의 힘에 덜덜 떨던 여린 류클리드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니, 난 사랑을 버리지 않았어.”
그 사랑이 잠시 뒤틀려 있었을 뿐.
“그럼 황후였던 세실리아는 왜 버린 거죠?”
“내가 여자가 됐으니까. 제국의 법은…….”
“고작 제국의 법에 밀릴 정도인 거군요. 황제 폐하의 사.랑.은.”
“…….”
류클리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반박하고 싶은 말은 차고도 넘쳤지만 지금 그녀를 보며 매혹향을 불태우는 세리아에게 기세에서 밀렸다.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겁하십니다. 다른 후보들을 전부 저택 밖으로 쫓아낸 뒤에 이런 짓을 저지르시다니요.”
세리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걸 아신다면 어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시지요.”
“네, 네가 할 말이야? 너도 혼자서 모리스를 독차지했잖아.”
"그건 황제 폐하께서 여자가 되기 전 이야기 아닌가요? 그리고 폐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리스에게 세리아를 선물로 보내라고. 이제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 상처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 내쫓고 네가 어떻게 하려는 거 아니야?"
“저는 이 저택의 메이드입니다. 메이드로서 엉망이 된 이 자리를 정리해야 해서요.”
“너는 이제 메이드가 아니다. 저는 지크프리트의 공작 영애야. 그러니 너도 여기서 나…….”
“이제 신분은 상관없지 않나요?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말을 마친 세리아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 나가주시지요.”
“네가 모리스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류클리드가 최후의 저항을 해봤지만.
“어느 도둑고양이처럼 취한 사람을 덮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주인님에게 위험한 사람은 황제폐하 당신이니까요.”
세리아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치잇!”
아를 악물던 류클리드가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세리아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모리스를 어떻게 하려다가 미수로 끝난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거기다가 완력으로 세리아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언제 저런 괴물이 된 거지?
깨문 입술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하아.”
류클리드가 문을 닫고 나간 걸 보고 나서야 세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방 안 가득 채웠던 기운을 회수한 그녀는 소파에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있는 모리스를 보았다.
“세, 리아……?”
그는 정신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지 멍한 눈으로 세리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왜 이리 많이 마신 건가요.”
“하아, 하아……. 내기를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모리스는 지금까지 그녀가 보았던 철두철미한 모습이 아니었다.
반쯤 풀어진 채로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줬다.
살짝 풀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저 단단한 가슴과 쇄골뼈는 물론이고, 술 때문에 올라간 온도 때문에 피부에 맺힌 땀까지.
하나하나가 전부 세리아를 유혹하고 있었다.
서큐버스의 본능이 그를 당장 덮치라고 외치고 있는 걸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런데 어째서, 저택으로 온 거지? 내가 불렀던가?”
“……제가 주인님이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그런가?”
모리스가 세리아를 마주보며 말했다.
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나도, 세리아 네 생각이 났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옆에 없으니 허전하더구나.”
“정말로 허전하셨나요?”
모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허전……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주인님.”
“그러냐……?”
“예.”
“마음이, 통했, 구나.”
미세하게 미소를 짓던 모리스가 눈을 감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취해 잠든 것이다.
세리아는 잠든 모리스의 손을 잡았다.
“늘 사모하고 있습니다. 주인님.”
혹, 그 생각도 통했는지요.
묻고 싶었지만, 이미 모리스는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취해서 잠든 모리스를 보았다.
그녀가 당장 덮쳐도 모를 거다.
꿀꺽.
하지만 참았다.
결국 제대로 끝을 내기 위해선 결투를 통해서 정해야 할 테니까.
이건 반칙이다.
“하아, 정말 손이 많이 가네요. 주인님은.”
투덜거리며 모리스의 자세를 정리하던 세리아는 작게 웃었다.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자꾸만 다른 여자들이 꼬이는 건 짜증이 났지만, 다른 여자들을 자신이 전부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결투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세리아는 다짐했다.
***
“끄으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에 공백이 있었다.
진실게임을 하고 내가 진 것까지 기억이 났다.
‘류클리드가 나를 덮치려고 덤볐던 거랑, 세리아가 들어왔던 것까지.’
그런데 그 뒤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류클리드가 나를 좋아하다는 얘기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어떻게 된 거지?
거사를 치룬 건가?
그녀가 내 몸 위에 올라탄 것까지는 생각이 났으니.
나는 몸을 살폈다.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멀쩡했다.
뭔가 이질적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걸지도.
“후우, 앞으로 술을 과하게 마시면 내가 개다.”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류클리드는 없었다.
“목이 마르는군.”
메마른 목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세리아가 들어왔다.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가 손에 쟁반을 들고 물을 가지고 왔다.
“어?”
“주인님, 드세요.”
“세리아 네가 왜 여기에?”
분명 지크프리트 저택으로 돌아갔던 그녀였는데?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뭐가 말이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피가 차갑게 식었다.
“저택에서 일을 해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랬다고?”
“예, 제가 없어 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말까지 했나?”
“네.”
환하게 웃는 세리아의 얼굴에 괴로워졌다.
대체 술 마시고 무슨 말까지 한 건가.
분명 허전하긴 했는데.
‘그걸 진짜 말했다고?’
미쳤지. 미쳤어.
나는 세리아가 건넨 물을 마셨다.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공작가의 영애를 이렇게까지.”
“아뇨. 제가 원해서 하는 걸요. 그리고 주인님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제가 없을 때 몹쓸 짓을 하려던 저 도둑고양이 때문이죠.”
그녀가 말한 도둑고양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황제보고 도둑고양이라, 괜찮겠는가?”
“뭐 어때요? 이미 본인 앞에서도 말했는걸요.”
“그런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 밖에서 류클리드가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밖에서 몰래 보지 말고 들어와.”
내 말이 끝나자, 류클리드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녀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 눈치가 아니라, 세리아의 눈치를 말이다.
내가 취한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미, 미안……. 내가 어제 과했었어.”
뭔 일이 있긴 있나보다.
그 류클리드가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을 보면.
“괜찮다. 서로 합의 하에 있었던 일이니까. 혹, 내가 실수한 건 없었나?”
“응? 어, 없었을 걸?”
“그렇군.”
류클리드가 자꾸만 세리아의 눈을 피하며 움츠러들었다.
“저는 그럼 잠시 문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세리아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류클리드를 한 번 쏘아보고 나갔다.
쿵.
문이 닫히고 나서야.
“후우.”
류클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문 쪽을 보며 물었다.
“쟤 왜 이렇게 세?”
“몰랐나?”
“당연하지. 세리아 지크프리트는 그냥……. 평범한 영애였잖아.”
“몰라서 결투를 건 거로군.”
“……이건 반칙이야.”
“뭐가 말이지?”
“저런 괴물과 결투라니, 있을 수 없잖아.”
“네가 만든 룰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류클리드가 볼을 부풀렸지만, 어쩌겠는가.
그녀의 선택인 것을.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최소한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종목을 짜진 않을 테니. 전부 공평한 조건에서 싸울 거다.”
“네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참, 어제 내기는 내가 이겼어. 그건 기억하지?”
“알고 있다.”
“소원을 들어줘야 해.”
“말한다면 언제든 들어주지. 국서가 되어달라는 것만 빼면.”
“좋아. 그 말이면 돼. 네가 기억하고 있나 물어보러 왔어.”
말을 마친 류클리드가 웃으면서 방을 나갔다.
“하아.”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폭풍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리스를 두고 네 여자가 싸운다는 소문은 점점 더 크게 퍼졌다.
수도를 중심으로.
더 넓게, 더 넓게.
저 지방 한직까지 소문이 퍼졌고.
그 소문은.
“뭐어어어어어?”
레밀리아에게까지 들어갔다.
무드를 배우기 위해 다시 창관으로 돌아왔던 그녀.
“대장, 어디 가십니까?”
“어디긴! 수도로 가야지!”
“무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무드? 무드 배우다가 다 뺏길 수는 없잖아.”
그녀는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