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142화 백설의 신청, 흡수의 초월자
* * *
“백설?”
나는 마차에 내리며 물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백설이 나를 노려보았다.
“왜 여기에 있는가? 분명 수도 외곽에서 병사들과 함께 묵는다고…….”
“왜 제겐 말씀하지 않으신 겁니까.”
“들었는가?”
“그렇사옵니다. 저 또한 모리스님과 함께 밤을…….”
나는 다급히 백설의 입을 막았다.
“듣는 사람이 많다네.”
“으으읍.”
백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참여하고 싶다고.
“하아.”
이런 적이 있던가.
제국의 행사(?)에 야만족이 참여했던 것 말이다.
거절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녀를 포함한 야만족들도 제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그녀는 이번 내전의 최대 전공자였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지크프리트였다.
‘장관, 자네 야만족 여자에게도 손을 댄 건가?’
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 했다.
업보라는 것이 대단하는 것이 아니구나.
“직접적인 단어와 행위를 말하지 않겠다면 이 입을 열어주겠다. 동의하는가?”
백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는 그녀의 입을 풀어주었다.
“푸하!”
백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도 자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예도 대결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 크루이 족이라고 못할 건 없지.”
“역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사옵니다.”
말을 마친 백설이 갑옷 속에서 새하얀 꽃을 꺼냈다.
그녀를 닮은 하얀 매화꽃이었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매화꽃은 갓 딴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매화가 나는 시기가 아니었으니.
“제국의 기사들은 장미를 바쳤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크루이 족은 고백할 때 플룸 블라섬, 매화를 상대에게 선물합니다.”
백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백설이 내게 매화를 내밀었다.
“그러니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이옵니다.”
하아.
이걸 어찌해야 하나.
저잣거리와 수도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보고 있었다.
“어머어머.”
“저분 모리스 장관님 아니야?”
“저분을 두고 영애들이 싸운다고 하던데.”
“저 여자도 참여하는 건가?”
“잘생기긴 했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그래도 받겠어요? 야만족인데.”
“아무리 장관이라도 받지 않겠지요.”
“그들은, 외부인이잖아요?”
외부인.
왠지 모르게 나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다른 세계에서 빙의한 나를 놀리는 단어 같아서.
백설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것도, 같은 외부인이라는 약간의 동질감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매화를 받지 않는다면, 결국 크루이 족과 제국의 화합은 불가능하리라.
일이 커지는 거 같지만, 그 또한 내 업이겠지.
나는 백설의 매화를 받았다.
“그 마음, 받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백설이 환하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마치 자기가 우승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이 세계 여자들의 자신감은 무서울 정도로 높군.’
“그럼 내 서신을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고개를 숙인 백설이 돌아가 말에 올랐다.
꽃을 손에 쥔 나는 마차로 돌아갔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참, 인기 많은 남자로군. 이 감정이 질투인지 연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굉장한 구경거리가 있겠어.”
“세리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건가?”
“80프로 정도는.”
“꽤 많이 높군.”
“딸에 대한 믿음이지.”
“나머지 20프로는 누구인가?”
“그게 중요한가? 승자가 지크프리트가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네.”
한 차례 웃은 지크프리트가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황궁에는 왜 가자고 한 건가? 마법사인 자네에겐 최악의 장소일 텐데.”
“확인할 것이 있어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가지. 시간이 많지 않아.”
지크프리트 공작까지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가 다시 말을 몰았다.
저잣거리에 다시 소문이 돌았다.
모리스를 차지하는 결투에 참가자가 한 명 더 늘었다고.
***
오랜만이군. 이주, 아니 한 달은 됐나? 오래 살다 보니 시간관념이 애매해져서 말이야.
황궁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흡수의 초월자.
류클리드를 망가트렸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류클리드의 본성이라고 했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외로워 죽는 줄 알았어. 내 목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잖아? 매번 황가의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곤 했는데 말이지. 내가 수다가 좀 많긴 하지만 이해해. 혼자 오래 있다 보면 대화 할 상대가 필요하기 마련이지.
“네놈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만든 공간이니까. 더 이유가 필요한가?
“그럼 이 공간, 마나의 균열을 원래대로 만든다면 네가 있을 곳이 사라진다는 뜻이겠군?”
그건 얘기가 다르지.
허공을 맴돌던 흡수의 초월자가 내 앞에 날아왔다.
나를 없애고 싶은가?
“없앤다기 보단,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거지.”
류클리드가 이놈에게 홀려 다시금 원래 모습을 되찾는 건 사절이다.
도돌이표일 테니까.
그래서 왔다. 이놈을 쫓아내고 안정을 찾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보낸다라……. 나쁘지는 않은데 어떻게?
“이제 이 세상에서 너를 볼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그러니, 내게 와라.”
호오. 날 감당할 수 있겠나?
“감당이라…….”
재밌는 말이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알 거다. 내가 널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핫!
흡수의 초월자의 웃음소리가 귀를 찢고 머리를 뒤흔들었다.
세상이 순식간에 한 바퀴 도는 감각이 느껴졌다.
코와 귀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네 밑으로 가라니. 건방지구나. 세바스찬도 그렇게 길들인 건가?
“잘 알고 있군.”
그 충성 멍청이랑은 다를 텐데?
“그럼 내기할까?”
뭘 믿고 그리 자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다. 그 내기 받아들이지.
광포한 웃음소리가 황궁 전체에 울렸다.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였다.
대신 내기 조건은 내가 걸도록 하지.
“마음대로.”
초월자가 손가락을 폈다.
3번, 일주일에 한 번 씩 총 3번 이곳을 방문한 뒤에도 네놈이 제정신이라면 내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겠다.
“제정신이고 아니고는 어떻게 따질 거지?”
너도 나도 모두 잘 알 거다.
녀석이 웃었다.
“좋아. 그 내기를 받아들이지.”
아무래도 준비가 많이 필요하겠어.
크크크크크, 그래. 그 오만한 자신감이 너를 구렁텅이로 빠트릴 거다.
초월자의 웃음소리가 섬뜩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시큰거리는 소리였다.
나는 이 감각을 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잊고 있었던 감각.
바로 공포.
나는 지금, 저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은 초월자인 제인에게도 릴리스에게도 세바스찬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순수한 공포를.
나는 지금 저 초월자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나는 공포를 떨쳐내듯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주에 오지.”
기다리고 있겠다.
키득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만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음에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괜찮은가?”
대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내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지.
나는 아무런 생각도 못했다.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
“역시 그 야만 공주도 참전했나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세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결투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적이 하나 더 늘었다.
갑작스럽게 황제가 벌인 결투.
덕분에 모리스와 에미르의 혼사는 막았지만, 덩달아 새로운 경쟁자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지크프리트 공작이 세리아를 보며 말했다.
“아마 이들이 끝일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후보로 올라온 이들 말고는 감히 도전할 자들이 없어. 다른 귀족가 영애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감히 공작가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겠죠.”
“그러겠지.”
후릅.
지크프리트 공작이 커피를 마셨다.
“딸아, 네가 이렇게 와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저도요. 아버지.”
세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때 깊은 감정의 골을 가졌던 아버지지만, 이제는 모두 해결되어 예전보다 훨씬 더 돈독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온 것은 좋으나 왜 집으로 돌아온 것이냐?”
신분이 복귀된 세리아였다.
이제 모리스의 하녀도 아니었고, 다시 지크프리트의 공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손님으로 저택에 남아있으려고 했으나.
결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은 모리스 저택에서 지낼 수 없다는 게 황제의 명령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었어요. 공정함을 위해 주인, 아니 모리스님의 저택에서 떨어지라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지크프리트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상하지 않니? 황제는 모리스 드미트리의 저택에 신세를 지고 있는데 왜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까?”
“어?”
아버지가 싸움을 앞둔 딸에게 주는 간접적인 조언이었다.
“황제가 너를 이곳으로 보내고 무슨 짓을 하려고? 에미르 솔라리온도 백설이라는 야만족 족장도 모리스 저택에 없어. 그렇다는 건 저택에 있는 건 모리스 혼자라는 거다.”
싸늘했다.
그 간악한 황제가?
순간, 머리가 핑 돌아갔다.
“지금 어떻게 해야겠니?”
“죄송해요. 아버지, 먼저 가볼게요.”
세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려무나. 승리는 네가 쟁취해야 하는 거다. 상황에 걸맞은 작전은 내가 짜고 있을 테니, 너는 황제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거라.”
지크프리트 공작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배웅했다.
세리아는 다급하게 밖으로 달려나갔고 그 뒷모습을 보던 지크프리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청춘이군.”
***
집무실.
“세리아, 목이 마른데 물 좀…….”
서류를 정리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세리아가 매번 서 있던 곳을 보았다.
“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맞다. 돌아갔지.”
신분이 복귀된 뒤, 세리아는 당분간 지크프리트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하녀가 아니니까.
“세리아에게 대접받는 것이 너무 익숙해졌군.”
예전에는 세바스찬이 때가 되면 가지고 오거나, 미리 물을 따라놓거나, 가끔은 내가 직접 마법으로 만들어 마셨다.
그러나 세리아가 오고 나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가 대부분 담당했었다.
“후우.”
나는 물병을 보았다.
비어 있었다.
세바스찬도 오랫동안 세리아가 담당해서 감을 잃은 것이리라.
“생각보다 컸구나. 너의 존재가.”
세리아가 사라지고 생긴 빈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공허했다.
그만큼 그녀가 이곳에 오래 있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내가 그녀에게 적응했구나.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었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마실까 하다가, 그냥 주방에서 물을 따라 마시자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구지?”
“나야, 류클리드.”
류클리드가?
왜?
나는 의문을 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엔.
류클리드가 독한 위스키 병을 쥔 채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