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41화 결투를 신청합니다. 수라장, 아수라장
* * *
“하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로널드가 집무실로 찾아와 물었다.
“남자를 두고 영애들끼리 펼치는 대결이라니요.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나도 그렇다.”
결투.
기사들이 영애를 두고 벌이는 귀족적인 행사였다.
승자는 영애를 차지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예전에는 이러한 결투가 많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기사들마저도 쉽사리 시도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요즘에는 집안끼리 결혼하는 일이 잦으니.
굳이 그런 결투를 진행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결투를 꺼낼 줄이야.’
머리가 아팠다.
에미르와의 혼담이 있다고 말한다면 황제로 돌아설 거라고 생각했다.
류클리드의 의지를 너무 얕본 결과였다.
“쯧.”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요? 이게 기사들이라면 마상결투와 콜로세움에서 치러지는 결투라던가 아니면 사냥 같은 걸 할 텐데. 이건 뭐…….”
로널드 백작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뜨개질이나 십자수 같은 걸 결투 종목으로 잡아야 할까요?”
나는 그런 백작을 올려보았다.
“황제가 저래보여도 본래 수준급 이상의 기사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아……. 맞네요. 어지간한 기사들도 다 이겼었죠.”
결투를 신청한 건 그 때문일 거다.
다른 영애들이 그만큼 강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헌데.
‘후보들이 하나같이 무섭단 말이지…….’
세리아, 에미르.
이 둘만 해도 어떤 이들인가.
솔라리온 공작도 쉽게 이기지 못하는 강자가 된 그녀들이었다.
류클리드가 이길 수 있는 라인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후우.”
“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내게 묻는 거지?”
“사실 이게 말이죠. 아시다시피 결투 종목은 보통 결투의 원인인 영애가 정하곤 했습니다만……. 이게 기사가 아닌 영애가, 아니 황제님이지만 어쨌든 여자가 됐으니, 영애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영애가 결투를 신청했으니 종목을 장관님께서 정하셔야 합니다.”
“뭐?”
나보고 종목을 정하라고?
“그렇습니다. 그……. 마상결투라던가 콜로세움 결투라던가 사냥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전부 모리스 장관님께서…….”
로널드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에선.
에미르가 악마 같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아, 그게 말이죠. 솔라리온 영애…….”
“로널드 경에게 물은 거 아닙니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괜히 나서서 한 대 맞은 로널드 백작이 옆으로 빠졌다.
에미르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집무실 책상을.
콰앙!
내리쳤다.
“에미르, 책상 부서지겠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결투라니요. 이미 가문 간에 혼약도 다 맺었습니다. 그 대가로 장관님께서 대가도 지불하셨는데 대체 왜…….”
“세바스찬이 그냥 들여보내주던가?”
“말 돌리지 마세요.”
실패했다.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죠? 왜 그걸 받으신 거예요?”
“어쩔 수 없었다. 그걸 받지 않으면 나를 국서로 만들거나 황제로 만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모리스님이 황제가 되시면 되잖아요. 황제 본인도 모리스님께 주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복잡하다.”
“저랑 결혼하시는 것이 싫으신 건 아니시죠?”
“물론이다. 왜 싫을까.”
나는 책상을 내려친 에미르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그대와 함께 보낸 세월이 있는데.”
“그럼 모리스님께서 싸움 종목을 정하실 때 제게 유리한…….”
그때였다.
“잠깐만요!”
세리아였다.
언제나 보았던 메이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열린 문을 통해서 집무실로 들어왔다.
“왜 솔라리온 영애께서 여기 계신지 모르겠네요.”
“혼담이 오간 정혼녀니까요.”
“그건 황제폐하께서 결투로 취소한 걸로 아는데요.”
세리아가 입은 건 몸의 실루엣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정도로 달라붙는 붉은 계열의 드레스였다.
과거 공작가의 여식답게, 그녀의 옷은 내가 봤던 어떤 드레스보다 파격적이고 화려했다.
“그럼 세리아 양은 왜 드레스를 입었죠? 아직 하녀인 걸로 아는데요.”
일처리가 밀려 여전히 그녀의 신분이 하찮다는 걸 강조했지만.
“저도 결투에 참가할 거니까요.”
“예?”
“결투에 참가하는 건 신분의 제약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 그건…….”
“그래서 왔어요. 결투를 신청할 때는 예복을 갖춰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맞죠? 주인님?”
그 옷을 입고 주인님이라.
뭔가 어색했다.
“……그건 맞지.”
노예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결투였다.
물론 지금껏 어느 노예도 결투에서 이긴 적이 없으나.
참가는 가능했다.
“허.”
에미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진심인가보네요.”
“물론이죠. 어떤 암고양이가 주인님을 가로채가서 화가 잔뜩 난 상태였는데 마침 황제폐하께서 기회를 주셨네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세리아가 에미르를 밀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왼손에 쥐고 있던 붉은 장미를 내게 건넸다.
결투에 참여하는 남자가 영애에게 내미는 상징이었다.
“저 세리아, 정식으로 결투에 참가하는 바에요. 주인님.”
승리할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
내 눈에 에미르가 이를 악다무는 것이 보였다.
“진심인가?”
“물론이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이럴 줄 알았다.
황제가 결투를 신청하면 세리아가 반드시 참여할 거라는 걸.
나는 알았으나.
류클리드는 몰랐겠지.
“하아, 그런데 이 장미는 뭐지?”
“뭐긴요. 결투할 때 장미를 건네는 건 상식이잖아요?”
“나를 귀족 영애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영애는 아니지만……. 달리 괜찮은 선물도 없잖아요. 헤헤.”
“하아.”
내가 이 장미를 받으면 세리아 역시 결투에 참여하는 거다.
에미르는 받지 말라는 눈짓을.
세리아는 빨리 받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두 여인의 기운이 집무실에서 맞부딪쳤다.
파직!
불꽃이 튀었다.
“히끅!”
로널드는 저 옆에서 두 여자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거기까지 하도록. 로널드 백작이 힘들어 한다.”
말을 마친 나는 장미를 받았다.
“공정한 결투를 위해 이 장미는 받도록 하겠다.”
“모리스님!”
에미르가 소리쳤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세리아는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미 받았으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럼 두 영애는 잠시 나가주겠나?”
나는 로널드를 가리켰다.
“아직 볼일이 남아서.”
결국 두 영애는 동시에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세리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에미르는 분노를 가득 담고.
쿵.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종목은 뭐로 정하실 겁니까?”
“그건 나중에 정하도록 하지.”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이게 인기남의 고뇌라는 건가요. 부럽군요. 낭만입니다. 하하하.”
“농담은 거기까지. 원래 용무가 있지 않았나.”
“아, 맞습니다. 그, 세리아 지크프리트 영애의 신분을 복권하는 문제 말입니다.”
“귀족들의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입니다.”
“솔라리온도 인정했나 보군.”
“안건을 낸 건 황제였으니까요.”
“후우, 다행이야.”
처형된 신분의 복권.
역사상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랬기에 황제의 윤허는 물론,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모든 절차가 이제 막 마무리되었다.
“어려운 일이 끝났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걸로 지크프리트에겐 빚을 하나 지운 셈이지요.”
“그런가.”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세리아 지크프리트의 복권.
마음대로 일을 저지른 류클리드에게 받은 대가였다.
나는 그녀의 신분을 이전 공작 영애로 되돌려주기를 청했다.
꽤 격한 반대에 부딪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리스, 네가 원하는 거면 좋아.’
쿨하게 내 제안을 받았다.
‘어차피 그녀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때 나를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지.
“어디에서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이젠.
마법이 효과가 너무 좋아도 문제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황제가 여자로 변했다는 소문과.
모리스를 두고 3명의 여자가 결투를 벌인다는 소문이 수도 각지에 퍼졌다.
거기에 세리아 지크프리트 공작 영애의 신분 복귀까지.
내전의 후처리가 끝난 수도는 새로운 소식으로 다시금 뜨거워졌다.
“황제 폐하께서 여자가 됐다지?”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가……. 어이구.”
“거 모리스라는 분은 그 분 아니야? 반란의 수괴.”
“이 사람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목이 달아나고 싶은 거야? 권력을 잡은 사람이니 분명 정치적 결혼이겠지.”
“지크프리트는 운이 좋네. 처형당했던 여식이 다시 신분을 되찾다니 말이야.”
“세상에 그랬던 적이 있었나?”
수도 거리마다 연달아 터진 소식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별 얘기가 다 나오는군. 이러다가 쓸데없는 소문까지 퍼지는 거 아닌가 싶네.”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도시를 거닐던 지크프리트 공작이 말했다.
“그런 소문들은 저잣거리에만 맴돌 뿐이지.”
나는 그런 공작에게 대꾸했다.
“크크, 그렇겠지. 감히 지크프리트와 드미트리의 명예를 흠집 낼 작자는 없을 테니.”
공작이 낮게 웃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지?”
잠시 창밖을 보던 공작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진심인가?”
“뭐가 말이지.”
“황제가 되지 않겠다는 말 말이네.”
“물론.”
“야심이 크군.”
“제국의 평화엔 고난이 따르는 법이지.”
“크크, 자네도 능구렁이야. 이런 자가 고리타분한 마탑에 갇혀 있었으니, 터질 게 터진 거지.”
잠시 마차가 조용했다.
“자넨 누굴 택할 건가.”
“자꾸 뜬구름 잡는 질문만 하는군.”
“내가 묻는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
“결투는 내 소관이 아니야. 그녀들의 실력에 달린 거지.”
“미래의 백작부인이 될 여식들이네. 한 명은 정해두지 않았나? 종목도 그에 맞춰 할 테고.”
“마음을 떠보려고 부른 건가?”
“비슷하네.”
정면돌파라.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노파심이 들었다고 생각해주게.”
“딸이 아니라, 가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전이라면 가문이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딸이 우선이네. 물론 가문 또한 중요하지.”
세리아로 인해 한 번 크게 망가졌던 그였다.
저 말은 진심이리라.
“한 가지만 말해주지. 최대한 모두에게 공정한 종목을 정할 거다. 누구 하나를 편애해서 유리한 종목을 고를 생각은 없어.”
“그게 단가?”
“물론. 그게 설사 내 마음을 떠보려는 아비를 가진 딸이라도 나는 공정하게 대할 거네.”
직접적인 경고였다.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무섭지만, 믿음직하군. 내 딸이 자네가 만든 대결에서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류클리드는 이미 대상에서 빠진 건가?”
“황제는 남자였을 때 대단했지만, 지금은…….”
지크프리트 공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잖은가.”
그가 말을 내뱉은 순간.
끼이익!
“히이이잉!”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냐!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지크프리트가 고성을 질렀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그가 마부를 노려봤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체 무슨…….”
그리고.
“모리스니이이임! 소녀 백설이옵니다!”
여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그만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북방의 두꺼운 갑옷을 입고 마차를 막은 채로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