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140화 나 안해! 황제 안 해!
* * *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솔라리온 공작이 외쳤다.
경악이 섞인 한 마디.
그도 그럴 것이.
류클리드는 황가의 유일한 황족이었다.
그런 그가 황제를 하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심지어 투정이다!
명령도 아니고 투정!
황제가 투정을 부리다니!
몸이 여자가 됐다고 마음까지 여자가 됐다고?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몸이 여자로 변한 것들이야, 아예 드문 일도 아니었다.
괴짜 마법사들이 발명한 성전환 마법이 존해하니까.
그러나 그런 마법들도 사람의 마음까지 여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몸과 정신의 괴리감을 몇 년이나 느낀다고 하던데.
‘대체 한 달간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솔라리온 공작은 모리스를 보았다.
그는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슨 짓이라니. 저번에 말했듯 나는 황제에게 고문을 한 적이 없다네.”
“감히 황가를 능멸하다니!”
“능멸이라.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황제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네.”
“이걸 믿고 내게 맹세를 한 것인가? 황제 폐하를 다시 복권시키겠다는 그 맹세는 이런 걸 믿고 한 거냔 말이다!”
솔라리온 공작이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후우, 솔라리온 공작…….”
내가 그를 진정시키려고 입을 열 때였다.
“그 입 다물어. 솔라리온 공작.”
류클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몸은 벌벌 떨고 있었지만, 눈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폐, 폐하…….”
“드미트리 장관은 나를 남자로 돌려보내려고 몇 번이고 마법을 썼어. 그런데 돌아가지 못한 거야.”
“그, 그게 무슨.”
“드미트리 장관은 나를 황궁으로 돌려보내겠다고도 말했는데 내가 거절한 거고.”
“폐하, 어째서?”
“하기 싫어. 황제 하기 싫어.”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이제는 지쳤어. 권력 가지려고 아웅다웅하는 것도 지쳤고, 매번 신하들의 배신에 불안해하는 것도 지쳤고 또…….”
류클리드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보다 더 황제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서.”
결국 이거냐.
황제를 하기 싫다던 그녀를 몇 번이나 말렸다.
그럴 때마다 나를 추천하겠다고 말하던 류클리드.
황제가 추천하면 되지 않냐며 떼를 쓰기까지 했다.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그건 안 된다.
“폐하.”
그래서 끼어들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황제 폐하만큼 황제에 어울리는 분은 없사옵니다.”
“뭣?”
솔라리온 공작이 나를 보았다.
내가 이 그를 지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그러니, 그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볼을 부풀리고 턱에 힘을 잔뜩 준, 고집 센 여자 아이가 보였다.
“…….”
잠시 나를 노려보던 류클리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테니 새로이 국서를 맞이해야겠어.”
“폐하, 이미 황후폐하가 계신데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자끼리 결혼은 제국법에도 없잖아? 짐이 여자가 되었으니, 황후가 아닌, 국서를 새로 맞이해야겠지.”
“허나 적법한 황후께서 계시옵니다.”
“이혼할 거야. 이미 세실과 얘기가 된 부분이고.”
“…….”
솔라리온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일이 여기까지 벌어진 건, 황제가 황후를 고문했다는 이야기부터가 시작이었다.
황후와 결혼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인 에미르와 혼담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헌데 국서라니!
‘이런 식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것을.’
이를 악물었다.
이미 지나간 일.
황제가 새로운 국서를 원한다면.
그런 인물을 만들면 된다.
제국에 국서로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 또한, 훌륭한 인물이지 않던가.
“생각해두신 국서 후보가 있사옵니까?”
솔라리온 공작이 물었다.
류클리드의 시선이 천천히 한 명에게 향했다.
굳이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누굴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아챌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모리스 드미트리, 이 자가 내가 생각한 국서 후보야.”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솔라리온 공작은 분노를.
모리스는 침묵을.
지크프리트는 앞으로의 전략을.
파문을 일으킨 류클리드는 승리의 미소를.
각자 다른 의미로 침묵을 지켰다.
‘이걸 노린 건가.’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핀 류클리드를 보았다.
황제가 싫다는 말.
그것은 황제를 하는 대신 국서를 맞이하기 위한 협상 카드였다.
그리고 그 국서가 바로 나라면.
‘바지 황제가 되겠다는 건가.’
그러나 류클리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허나 폐하.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이미 드미트리 장관은 솔라리온 영애와 혼담이 잡혀 있습니다.”
이때다 싶어 지크프리트가 끼어들었다.
그의 표정은 밝았다.
드미트리와 솔라리온의 혼담.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화가 났던가.
모리스와 제일 먼저 혼담을 가져야 하는 건 지크프리트여야만 했다.
그를 위해 물밑 작업을 해왔다.
모리스와 함께 반란까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솔라리온 새치기를 하다니.
화병에 흰 머리가 늘었던 지금.
딱 좋은 시기에 황제가 모리스를 국서로 임명하겠다고 나선 거다.
그렇다는 건.
맺어진 혼담을 무효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솔라리온과 황제의 사이에 의심을 심어놓고, 비운 모리스의 옆자리를 지크프리트가 차지한다.
공작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이 났다.
“그게 사실이야?”
솔라리온 공작을 보는 황제의 눈이 차가웠다.
배신보다는 질투에 가까웠다.
자신은 얻지 못하는 모리스를 솔라리온의 영애가 너무 쉽게 채갔다는 것에서 생긴 질투.
그녀는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었다.
모리스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쩌겠는가.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을.
“폐, 폐하 그것은…….”
솔라리온은 아차 싶었다.
설마 모리스 이걸 노린 거냐?
모리스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류클리드를 보고 있었다.
솔라리온이 뭐라고 반박하려고 할 때.
“폐하, 저와 솔라리온 영애의 혼담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모리스가 나섰다.
“이유가 뭔데?”
“……솔라리온 영애가 제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진짜……야?”
“예.”
충격에 류클리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혼담 파기는 불가능합니다.”
“왜 안 되는데?”
“솔라리온 영애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잠깐의 침묵.
“치……. 다 안 된다고만 하고…….”
궁시렁 궁시렁.
류클리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딴에는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해서 내뱉은 거 같은데.
다 들렸다.
두 공작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너희 전부 내가 황제를 하길 원하는 거잖아. 맞지?”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황제의 명은 절대적인 것도 맞고?”
“그렇사옵니다.”
이번엔 지크프리트가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맞습니다.”
솔라리온이 대답했다.
“그럼…….”
류클리드가 나와 솔라리온 공작을 보며 말했다.
“혼담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처음부터 다시……라니요?”
솔라리온 공작의 멍청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그럼 모리스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니, 나도 그 혼담에 끼겠어. 혼담이 취소되면 아직 혼약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맞지?”
“하, 하지만 폐하…….”
“아름다운 미녀를 얻기 위해 기사들이 결투하는 것이 당연한 거라면 반대의 경우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영애들끼리 결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맞아.”
“이런 건 있지도 않은 일입니다!”
“황제의 말을 다 따를 거라며. 그리고 아직 식도 치러지지 않은 건 맞잖아?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허.”
솔라리온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류클리드의 말처럼 혼담만 오가고 식을 올리기 전에 파혼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영애들끼리의 결투가 있던 적이 없었던 것 뿐.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는 겁니까?”
“싫어? 그럼 황제 안 해. 싫어. 절대로 안 할 거야. 제국 무너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지.”
나는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류클리드를 보았다.
그녀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조건 네가 내 국서가 되라는 것도 아니잖아? ‘공정한’ 대결을 하겠다는 거야. 공정한.”
“하아.”
내가 황제를 복권시킬 거라는 걸 확신하고 말하는 거다.
“어때? 만약에 내가 이기더라도 솔라리온 영애가 후처로 들어오는 건 윤허할게.”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거절해서는 안 된다.
류클리드가 다시 황제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참가를 원하는 다른 영애들도 참여하도록 해주시지요.”
나는 세리아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나만 참여하는 건 너무 독재자 같으니까. 나 말고 다른 영애도 참여할 수 있게도 할게.”
순순히 허락했다.
절대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럼,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직 안 가.”
류클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황궁 싫어. 여기가 더 좋아. 그러니까 대부분의 업무는 여기서 볼 거야.”
“…….”
“대외 활동은 걱정 마. 황궁이 싫을 뿐이지. 조만간 백성들 앞에 나갈 테니까.”
“알겠사옵니다.”
두 공작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생각이 많아진 솔라리온과.
은은한 미소를 짓는 지크프리트를.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시키기 위해 지크프리트와 싸울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류클리드 덕분이었다.
“그럼 다 나가봐요. 피곤하니까.”
류클리드가 손을 휘휘 저었고.
두 공작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폐하와 얘기를 나누고 나가지.”
문을 닫은 나는 류클리드를 보았다.
그녀는 승리의 미소를 짓다가도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더니 불안해 했다.
“화……난 거 아니지?”
“조금 많이 났다.”
상의도 없이 저지른 일이었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쁜 점만 있던 건 아니었다.
“확실하게 황제 일을 하겠다는 거지?”
“물론이지. 나는 약속은 지키는 여자라고.”
그녀가 가슴을 내밀었다.
봉긋한 가슴이 툭 튀어나왔다.
“알았다. 네가 황제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면, 나 역시 그 결투를 받아들이지.”
“좋아.”
대마법사를 차지하기 위한 영애들의 말도 안 되는 대결의 서막이 열렸다.
“이기는 건 걱정하지 마. 내가 무조건 이길 테니까. 모리스만 옆에 있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
솔라리온 공작은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공허하군. 허…….”
“아직도 대세를 모르겠나?”
솔라리온의 중얼거림에 지크프리트가 대꾸했다.
“혼담 얘기는 왜 한 거지?”
“그 얘기를 안 했다면, 당장 결혼하겠다고 밀어붙였을 텐데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나?”
“그거 때문에 곤란해진 건 나요.”
“내 알 바는 아니지.”
솔라리온 공작은 이놈이 싫었다.
매번 정치적으로 다투는 것도 신물이 날 정도로 싫었지만, 그보다 더 싫었던 건 바로 이런 태도.
그것이 화를 부추겼다.
“만약 황제가 지고 우리 가문 중에 하나가 이긴다면 어찌할 생각이지? 황제가 가만히 있겠나?”
“가만히 있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걱정 마.”
“방책이라도 있나?”
“드미트리 장관이 알아서 해줄 거다.”
“믿나보군.”
“그럼. 그 대단한 황제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당사잔데.”
“오늘 황제에게 쩔쩔매지 못한 걸 못 봤나?”
“그 황제가 모리스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건 못 봤나 보군.”
솔라리온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지크프리트 공작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황제가 이긴 거 같아 보이나? 그건 드미트리 장관이 양보를 했기 때문이야.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더 큰 것? 그게 뭐지?”
“거기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지.”
지크프리트는 이 멍청한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황제파의 거두가 되어 제국을 이끄는 대단한 작자인 것은 맞으나.
시류를 읽는 능력만큼은 너무나 하찮았다.
검을 잘 쓰면 뭘 하나.
결국 정치를 이기지 못해 밀려나고 있는데.
모리스가 저렇게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원하는 거?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것.
온전한 제국.
‘욕심이 대단해.’
그런 남자여야 따를 맛이 있는 법이지.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크프리트는 최강의 가문 중 하나가 될 테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솔라리온 공작을 두고 떠났다.
바빠질 거다.
세리아가 모리스를 둔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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