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139화 레밀리아의 승부욕.
* * *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오해였다?
뺨 맞기 좋은 변명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둘러댈 수는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레밀리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해지는 것.
나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보는 저 눈빛.
그 눈빛을 볼 때마다.
“하아.”
마음이 약해졌다.
눈물 짓는 엘프의 눈을 보았었는가.
보는 순간 사람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매서웠다.
혹자는 그런 말을 했다.
슬픔에 울부짖는 엘프는 그 어떤 악마의 유혹보다 강렬하고 무섭다고.
그 이유를 한순간에 느꼈다.
굳건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린다고 해야 할까.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망설여졌다.
“말을 해봐. 내가 오해한 거야? 그냥 그런 거야?”
“……그래.”
하지만.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망설이지 말자.
떼어내자.
레밀리아도 아프겠지만, 오히려 길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그럴진데.
“그럼 내게 기회가 없는 거야?”
“뭐?”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레밀리아가 눈물 짓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예전에 인간은 여러 여자를 안을 수 있다고 들었어.”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보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나한테도 기회를 달라고.”
레밀리아가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흉터가 얼굴보다 붉게 달아올랐다.
“기회?”
“그래. 기회.”
“무슨 기회를 말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너 그렇게 눈치 없는 인간 아니잖아. 시치미 떼지 마.”
“못 이기겠군.”
“어차피 그 여자, 고작해야 인간이야. 안 그래? 무력으로나 지력으로나 내가 그 여자들한테 질 거라는 생각 안 들어.”
“그래서 한 번 해보겠다?”
“그래.”
레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저런 의지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이란.
무서운 존재들이다.
동시에 해결법을 찾았다.
레밀리아와 관계를 망치지 않고 그녀의 화를 풀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한다.
레밀리아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온 그 승부욕.
‘기회를 달라는 거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굳이 적을 더 만들 필요는 없으니.
“엘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줄게.”
그 상대가 절반이 초월자라는 걸 안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
“참, 알려주지 않은 게 있는데.”
“뭐야?”
“몇 명 더 있다.”
“뭐?”
레밀리아의 눈썹이 모아졌다.
고운 얼굴이 주름이 지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
“몇, 몇 명이나 더 있는데?”
“2명 더.”
이미 결혼을 약속하기 위해 자리까지 잡았던 에미르.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내려온 백설.
홍련의 루이스나 엘리스는…….
‘애매하지.’
그들은 내 부하에 가까우니.
“세, 세 명이나?”
손가락으로 수를 세던 레밀리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 색골! 변태! 강간마!”
레밀리아에게 이런 대사를 듣다니.
조금.
충격이군.
오히려 주먹으로 팰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엘프는 정조관념이 확실하긴 하지. 인간보다는.”
“진짜 변태…….”
레밀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네가 몇 명이랑 관계를 가지는지 상관 안 해. 어차피 내가 최고가 될 거니까.”
“자신있나보군.”
“당연하지. 그러니까…….”
레밀리아가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 고추 씻고 기다려! 내가 더, 덮칠 테니까.”
“지금 말인가?”
“무, 물론이지!”
지금은 어렵다.
세리아에게 뿌리까지 짜여져 지친 상태였다.
서도 정액은 나오지 않을 걸?
“무드가 없군.”
“뭐, 뭐?”
“나를 유혹할 거라면 조금 더 무드를 갖고 유혹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고추 씻고 기다리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엘프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이 꼴리는 포인트였으나.
“한참 부족하다.”
세리아, 에미르, 아니 백설보다도 훨씬 무드가 없었다.
“이이익!”
나는 분해하는 레밀리아를 벽으로 몰았다.
쿵.
벽까지 몰린 레밀리아의 옆에 손을 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레밀리아가 나를 올려보고 내가 내려 보는 구도가 되었다.
“왜, 왜 이러는 건데?”
“가만히 있어.”
나는 레밀리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레밀리아의 성감대를 천천히 입으로 애무했다.
입술과 혀로 적절하게 간지럽힌 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가 구부러졌고.
그럴수록.
“하악.”
레밀리아의 허리는 휘어졌다.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서로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입술을 마주쳤다.
내 손이 레밀리아의 가슴을 매만졌다.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젖꼭지를 애무했다.
레밀리아의 손이 내 바지를 훑었다.
그리고 손은 점점 더 깊이.
그녀는 홀린 듯이.
내 바지 안 자지를 손으로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레밀리아의 손을 잡았다.
“거기까지.”
“어, 어?”
레밀리아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런 레밀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이게 무드라는 거다. 내가 자연스럽게 너를 건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
“…….”
“무드란 건 이런 거다.”
꿀꺽.
레밀리아가 침을 삼키는 것이 들렸다.
“여, 여기서 끝인 거야?”
“그래.”
나는 미련 없는 척 거리를 벌렸다.
약간 아쉬운 지금 상태.
지금이 딱 좋았다.
“더 원한다면 아까 말했지? 무드를 갖도록.”
“이게 전장에 들어갈 조건이라는 거네.”
“그런 셈이지.”
예상대로 레밀리아의 승부욕이 불탔다.
“이제 알았나?”
“그래. 잘 알았어. 네가 얻기 어려운 남자라는 거잖아?”
“매력적인 꽃을 따는 건 어려운 법이지.”
“말은 잘 하네.”
“마법사 특징이지.”
나는 레밀리아의 옷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모르겠다면 너희 창관에서 일하는 부하들에게 배워 와라. 거기까지는 허용하지.”
레밀리아가 사장으로 있는 창관은 제국 최고 창관 중에 하나였다.
그곳에는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았다.
여자 엘프들 말이다.
“말 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그럼 기다리고 있지.”
“두고 봐. 그 년들 전부 다 재끼고 널 가질 테니까.”
“출사표 좋군. 그럼 지금은 갈 건가?”
“……그럴 거야.”
정령으로 귀를 숨긴 레밀리아는 돌아갔다.
산, 넘긴 거 맞지?
맞겠……지?
어쩐지 새로운 산을 만든 기분이었다.
***
“그러니까……. 황제가 어떤 모습이어도 놀라지 말라는 건가?”
“그래.”
“처참하게 만든 것은 아니겠지?”
“그러지는 않았지만, 보는 시선에 따라 처참할 수도 있지.”
특히 보수적인 솔라리온이라면 그것이 더 심할 거다.
“대체 무슨 꼴을 만들었길래 그 말을 하는 것인가.”
지크프리트도 함께였다.
그를 데리고 온 건 간단했다.
솔라리온과 지크프리트의 균형을 위함이었다.
황제를 한 쪽만 알현한다면 다시 저울이 기울어질 것이 분명.
그래서 데리고 왔다.
“흠, 황제의 팔 다리가 멀쩡히 붙어 있으면 좋겠군.”
지크프리트 공작의 표정은 편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갑자기 솔라리온과 혼담이 오갔으니 말이다.
자신이 소외된 기분일 테지.
아직 세리아의 신분이 원래대로 돌아오지도 못했으니, 배신당한 기분일 거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편한 말에도 태클 걸지 않았다.
세리아의 신분 회복은 곧 일어날 거지만.
말을 아꼈다.
“그럼, 열도록 하지.”
말을 마친 나는 문을 두드렸다.
“폐하, 솔라리온과 지크프리트가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 아닌가?”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불안해하는 솔라리온을 안심시킨 뒤, 문을 열었다.
끼이익.
“히이익!”
나와 들어온 솔라리온과 지크프리트 공작을 본 류클리드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폐하! 신 솔라리온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지크프리트가 제국의 태양을 뵈옵니다.”
두 공작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류클리드는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솔라리온이 내게 외쳤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폐하께서 이리 겁에 질려 계신 건가!”
분노에 가득찬 일갈.
반면 지크프리트는 황제의 이불을 유심히 보았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모습이 솔라리온 공작의 이미지를 깎아 먹기 좋을 때였으니.
“진정하게. 천천히 말할 테니까.”
“감히 황제 폐하께 손이라도 댔었다는 증거라도 나왔다간! 네놈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솔라리온 공작이 마나를 분출했다.
지금 그는 장인이 아닌, 정적 솔라리온 공작으로 서 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하자는 건가.
그런 거라면 받아주지.
“솔라리온 공작, 자네가?”
나 역시 기운을 뽑아내 맞받아쳤다.
험악한 기운을 중화했다.
수준이 몇 수나 앞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위였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가?”
“이 개자식!”
내 말에 솔라리온 공작이 이를 갈았다.
나는 공작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황제파의 거두 솔라리온 공작입니다. 늦어버린 황제파의 신하에게 얼굴을 드러내시죠.”
“…….”
류클리드는 말이 없었다.
지크프리트의 눈빛이 변했다.
“폐하, 설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류클리드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걷었다.
여자 류클리드가 두 공작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경들 오랜만이에요.”
순진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
“어, 어째서? 폐하!”
솔라리온은 경악을.
“…….”
지크프리트는 나를 보며 관찰을.
나?
나는 류클리드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폐하, 폐하께서 황궁으로 복귀하길 원하는 솔라리온 공작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솔라리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모리스 드미트리 장관 역시 동의한 안건입니다. 돌아가셔서 제국의 안녕을 위해 치세를 다스려야…….”
“싫어.”
“…….”
류클리드의 한 마디.
폭탄 같은 한 마디에 두 공작은 상반된 표정을 보였다.
솔라리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고.
지크프리트는 최대한 미소를 숨기고 있었다.
“폐, 폐하 바, 방금 뭐라고…….”
“싫다고 했어.”
“예? 무엇이 싫……. 드미트리 장관이 싫다는 말씀이십니까?”
“황궁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예?”
고집 많은 여자아이처럼 말하는 류클리드의 말에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절대 안 돌아가.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황제도……. 안 해.”
충격 발언이었다.
'후우.'
나는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