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37화 이 아이 모리스의 아이에요.
* * *
“왜 안 되지? 솔라리온과 드미트리 두 가문이 힘을 합하면 제국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질 텐데.”
“황제를 내린 네놈과 손을 잡으라? 말도 안 되지! 차라리 지크프리트에게 가라! 그 놈은 딸년을 자네에게 시집보내려 안달이던데!”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로군.”
“내 딸과 결혼은 나눌 얘기고?”
“당연하지. 이곳은 솔라리온의 저택이 아닌가.”
으드득!
턱에 힘이 들어갔다.
에미르가 뒤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허나 솔라리온 공작은 에미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나 있느냐?”
“알고 있어요.”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장본인이야! 역적의 아내가 되려는 것이냐?”
“황제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그 일에 이유가 있었잖아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끼는 딸이 저 빌어먹을 놈에게 반쯤 세뇌된 꼴이라니.
아버지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싫은가? 눈에 흙이 들어갈 정도로?”
“당연하지!”
“원한다면 흙이 들어가게 해줄 수는 있네.”
“뭐?”
“평화롭게. 공작의 눈에 흙만 넣고 끝낼 수 있는 문제라면 해결 방법도 간단하지 않나?”
“…….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모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식한 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리스라면 할 놈이었다.
황제도 폐위시킨 미친놈이 아니던가.
물론 그 이후에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지만.
폐위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은 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선을 넘은 남자였다.
“나를 죽이겠다면 죽여라. 차라리 그것이 낫다. 솔라리온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킬 것이다. 네놈은 솔라리온이 아닌 에미르랑 결혼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귀족간의 결혼은 가문간의 결혼.
가문의 힘을 키우고 영향력을 늘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게 없는 결혼?
그건 결혼이라고 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모리스라고 한들, 포기할 것이다.
“그게 뭐가 문제지?”
“뭐?”
“솔라리온과 결혼한다. 그리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권력을 만들 수 있다. 그건 공작을 설득하기 위함이야.”
“그게 무슨?”
“나는 에미르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녀를 책임지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지. 솔라리온과 결혼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네.”
“책……임?”
솔라리온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는 자신의 딸을 보았다.
곤란하다는 듯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에미르.
공작은 눈을 감아 버렸다.
“아아,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예, 제가……. 장관님의 아이를 가졌어요.”
대답은 에미르가 대신했다.
“결혼하지 않은 귀족 영애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냐?”
공작의 목소리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오지 않았던가.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책임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군.”
“그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에미르가 아이를 배었다면 결혼을 막을 명분이 사라지는 거다.
이유는 간단했다.
결혼 전 아이를 밴 귀족 영애에게 올 바람은 고요한 것이 아니니까.
솔라리온이라는 방패가 없다면.
“젠장.”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아.”
힘이 풀렸다.
결국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지 않은가.
“화가 나는군.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말이야.”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결혼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마음대로 하게. 내 축사는 기대할 생각은 마.”
에미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의 축사가 없는 결혼식이라니.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모리스가 에미르에게 말했다.
“에미르, 잠시 공작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잠시 나가주겠나?”
“아, 네. 알겠어요.”
에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문을 나서고 나서야.
“나는 에미르가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네.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의 축하는 꼭 필요한 조건이지.”
“해줄 수 없네. 절대로.”
“만약 축사를 해주는 조건으로 황제와 알현을 하게 해주겠다면, 그 거래 조건을 들어줄 텐가?”
“뭐?”
솔라리온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황제 폐하의 알현을 허락하겠다고? 네놈이?”
“당연하지. 애당초 나는 황제가 되려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야.”
“허, 허허. 놀랍군.”
한 차례 진정한 공작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떤가?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행복한 아버지의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데.”
“네놈 때문이야. 내가 한 번 뿐인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지 못하는 건.”
“그래서 하게 도와주겠다는 거잖은가.”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군.”
“성격이 이래서 말이지.”
결국 솔라리온 공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래가 잘 이뤄져서 좋군.”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리스를 향해 물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말은 뭔가?”
“뭐긴. 농담이었네.”
“그게 농담이었다고?”
“그쪽 취향이 아니었나?”
모리스가 웃었다.
***
성공적인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다.
에미르와 헤어지고 저택으로 돌아가니, 문 밖에 레밀리아가 서 있었다.
웬일 인지 차려입은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하나?”
“히익!”
내 말에 레밀리아가 긴 귀를 펄럭이며 뛰었다.
“평소와 다르게 차려입었군. 어디 여행이라도 가나?”
“여, 여행? 당연하지. 제국 수도에 오는데 잔뜩 긴장하고 와야 할 거 아니야.”
긴장했다고 하기엔 그녀가 지금까지 입었던 적도 없었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꾸미고 나온 여자 같았다.
추위를 막지 위해 모피를 덮은.
잠깐 모피?
“엘프가 모피를 입어도 되나?”
“추운 걸 어떡해.”
“그런가.”
애당초 육식을 하는 엘프였으니까.
“전투할 생각은 전혀 없나 보군.”
“혹시 걸린다고 하더라도 내 명함을 건네면 되니까.”
“헌데 제국을 거닐면서 귀를 숨기지도 않고 온 건가? 대담한데.”
나는 기나긴 레밀리아의 귀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거? 정령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거야. 너 같이 수준 높은 마법사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호오.”
마법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휘저었다.
치이익!
반투명한 초록색 도마뱀이 비늘을 세우며 몸을 들었다.
그러자 바람이 일었다.
“이게 정령인가?”
“맞아. 이게 정령이야.”
“호오.”
나는 손가락에 마나를 이용해서 바람을 일으켰다.
휘이잉.
바람이 정령을 감쌌다.
익숙한 기운에 도마뱀이 적대감을 지웠다.
“신기하군.”
“나는 모리스 네가 더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친해진 거야?”
“그냥. 바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
“아무튼 들어가지. 보는 눈이 많다.”
“아, 알았어.”
혹시 엘프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귀찮아지리라.
근데 얘는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
“주인님, 차를 내왔습니다.”
세리아가 컵에 커피를 따랐다.
그녀는 레밀리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세리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나.
나를 보는 세리아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에미르 문제 때문이리라.
그녀와의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는 걸 세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따가운 시선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나중에 한 번 얘기해요.”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든 분노를 속으로 삭이려는 모습이 표정을 통해 드러났다.
분노, 질투, 박탈감 등등.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내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 말에 세리아가 고개를 푹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 두 분께서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세리아가 나가고.
“네 사용인이야?”
“그래.”
“와, 무슨 하녀가 기세가 저렇게 매섭냐. 암살자인 줄 알았어.”
레밀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암살자가 아니고 하프 서큐버스다. 라고 얘기하면 어떤 반응일까.
“집이 진짜 멋지다. 너 이런 곳에 살았구나. 역시 인간들 중에서 강한 자들은 이런 큰 집에 살고 있구나.”
“그, 그런데 왜, 왜 부른 거야?”
레밀리아가 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우물거렸다.
몸을 배배 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말고.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다리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더라.
“궁금한 게 있다.”
“뭐, 뭔데?”
레밀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천천히 레밀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레밀리아의 귀를 매만졌다.
“이, 이런 건 너무 이른 거 같은데.”
“무슨 소리지?”
“에?”
다시 한 번 손으로 휘리릭.
치이익!
반투명한 도마뱀이 다시 한 번 몸을 비틀었다.
“정령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정……령?”
레밀리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 정령들 중에서 차원을 관리할 정도로 강한 정령이 있나?”
“에?”
“차원을 관리할 정도로 강한 정령 말이다. 정령왕급은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지.”
“불가능하다?”
“어떤 정령왕이 차원을 관리해. 정령왕들도 정령계에 살아가는 하수인일 뿐인데.”
“그래?”
나는 황후가 말했던 정령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차원을 관리할 정도로 강한 정령은 없다. 이말이지?”
“그렇지.”
“자신할 수 있나?”
“나는 엘프야. 이 세상 어떤 존재들보다 정령과 친숙한 종족이라고.”
“……주먹질 하는 엘프도 엘프다 이건가?”
“너 진짜 자꾸 이럴래?”
“농담이다.”
“네 농담은 농담같지 않다고.”
“그런가?”
솔라리온 공작도 그러더니.
아무튼.
“차원을 관리할 정도로 강한 정령은 없다. 이 말이지?”
“맞아.”
레밀리아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알고 싶은 내용은 다 알았다.”
“그게……끝이야?”
레밀리아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쉽다는 눈빛.
약간의 당황스러운 표정.
“아,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하겠네. 방을 내어주지. 하룻밤 묵고 가게.”
레밀리아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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