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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135화 (135/174)

〈 135화 〉 134화 무너진 류클리드

* * *

그녀의 한 마디에 폭풍이 몰아쳤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말만큼은 나오지 않았으면 했건만.

결국 나와버렸다.

류클리드의 입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후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황가의 정통성과 제국의 분열.

내가 수도 없이 고민했던 많은 갈등들.

그걸 막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포기할 건데? 다른 신하들을 불러서 말할 건가? 이렇게 여자가 됐으니, 더는 황제를 하지 않겠다.”

“…….”

류클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일 거다.

“못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내가 황제인데. 내가 못하겠다는데 지들이 무슨 낯짝이 있어서 말려?”

아니었나.

류클리드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주장을 외쳤다.

말하는 꼴이 꼭 여자랑 똑같았다.

“누구에게 주려고? 어떤 귀족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을 수 있을까. 분명 누가 오르던 반발이 생길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럼 나보고 계속 이렇게 있으라는 거야? 아무리 해도 남자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결국 황제로 돌아가도 여자 황제라면서 다들 비웃을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

류클리드가 나를 보았다.

“세실리아가 내게 했던 말도 들었잖아. 그녀의 시선을 봤잖아. 나를 사랑하던 여자도 나를 버렸을 정돈데 그놈들은…….”

류클리드가 내게 더 다가왔다.

“그러니까 나를 생각한다면, 황제를 그만두게 해줘. 제발.”

류클리드의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마음을 찢는 고통을 잊고 싶어서 내게 매달렸다.

이걸 받아준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

아니, 이미 그 반환점은 지나왔나.

한참 전에 늦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 시행했던 계획들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망가트렸다.

내 실수다.

판단 미스였다.

“후우.”

나는 류클리드를 마주보았다.

“그럼 제국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제국……. 이제 제국 따위 내게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황제가 아닐 테니까.”

“너 말고 황제의 왕관을 쓸 사람은 없다. 황가의 사람은 네가 유일해.”

“……그렇게 내가 싫어? 이렇게 변명을 계속 할 정도로?”

류클리드의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실연당한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류클리드가 남자였기에, 황제이기에 등등.

많은 이유가 떠올랐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세리아와 에미르.

두 여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세리아.

류클리드에 의해 상처받았던.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던 악녀.

류클리드를 안았을 때, 세리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감히 떠올릴 수가 없어 끝내 거부했다.

만약 세리아가 생각나지 않았다면 나는 류클리드를 안았을까?

아마도.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안았을 거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설사 남자였던 황제더라도.

그 때 류클리드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댔다.

“봐. 작긴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있다고.”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은 가슴이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나를 보는 류클리드의 눈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보고.

“하아.”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렇게 해도 황제는 내려놓을 수 없다.”

“그럼 모리스 네가 해……. 너도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있을 거 아니야. 너한테 다 줄게. 황제 권한, 정통성 다 내가 줄게. 내가 준다는데 누가 막을 건데?”

류클리드는 필사적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다 포기하기 위해서.

“귀족들이 납득하겠나. 결국 내가 마법으로 너를 최면에 빠트렸다고 생각할 거다.”

결국 똑같은 결말이다.

제국의 내전.

“…….”

“하지만 네가 정말 힘들다면.”

나는 울먹이는 류클리드의 머리를 쓸었다.

“오늘 너와 함께 있겠다.”

전부 그녀의 정신을 다시금 다잡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류클리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분명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래. 널 안지는 않겠다.”

“왜……?”

“안지 않아도 충분할 거다.”

“정말?”

“그래.”

나는 손바닥에 마나를 일으켰다.

우우웅.

마나가 공명하며 낮은 진동음을 냈다.

아까 류클리드에게 걸었던 진정 마법과 더불어 약한 수면 마법을 더했다.

진정 마법과 수면 마법을 함께 사용하면, 서서히 수마에 빠지게 하면서 꼬였던 몸과 정신을 바로잡게 도와줄 수 있었다.

‘세리아나 에미르에겐 안 먹히지만…….’

마법 저항력이 제로나 다름없는 류클리드에겐 확실하게 먹히는 방법이었다.

그 손을 류클리드의 어깨에 감았다.

“기대라.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위로인 거 같으니.”

그 위로 대상이 류클리드 본인을 나락까지 끌어들인 나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도 돼?”

“그래.”

이렇게 안는 건 못할 것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클리드가 몸을 기댔다.

“세실리아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거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세실리아가 돌아오는 걸 바라는 게 욕심이지.”

후회.

“이제는 다시 안 할 수 있는데.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전부 다 알고 있는데.”

반성.

“안되겠지. 이건 욕심인 거겠지.”

그리고 체념.

짧은 시간, 고해성사를 뱉는 류클리드의 말에서 여러 감정이 회오리치듯 몰아쳤다.

나는 어깨를 쓰다듬어줬다.

천천히.

시전한 마법과 마나가 류클리드의 전신에 퍼지도록.

“많이 힘들었나?”

“……응. 정말로 힘들었어.”

“뭐가 힘들었나?”

“그냥 모든 게 다. 황제가 돼서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자리에 오르니까 공허해졌어. 외로웠어. 유일하게 믿었던 사랑이 거짓처럼 느껴졌을 때.”

류클리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어.”

류클리드의 눈이 점점 감겼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그녀의 몸이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점점 더.

눈이 감겼다.

새근새근.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 류클리드는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

“다 됐군.”

나는 류클리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마법은 류클리드를 악몽으로부터 지켜주리라.

잠들었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건 아니겠지만, 처음보단 훨씬 안정됐을 거다.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겠지.

나는 류클리드를 안아들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방을 나섰다.

“오늘은 푹 쉬어라.”

그리고 그 날.

류클리드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하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었다.

***

“모리스님.”

에미르였다.

그녀는 기사단에서 입는 제복을 입은 채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그녀와 단둘이 수도를 거닐 기로 했다.

이제 수도가 꽤 안정됐기에, 조금은 업무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데이트를 잡았다.

약속을 잡았을 때, 얼마나 좋아하던지.

“얼굴이 많이 좋아졌군.”

“모리스님 덕분에요.”

“아직도 수련은 게을리 하지 않나보네.”

“기사에게 수련은 식사와 같죠.”

에미르가 가슴을 펼쳤다.

그 덕에 기사 제복이 터질 것 같았다는 건 비밀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꽤 길었군.”

“아…….”

에미르가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과거 신에게 몸을 맡긴다며 머리를 잘랐던 적이 있었다.

단발 또한 매력적이었으나, 어느 날부터인가 머리를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그 때가 아마…….

나와 같이 밤을 보냈을 때지.

“긴 머리가 좋다고 그러셔서요.”

“보기 좋군. 아름답다.”

“헤헤.”

에미르가 얼굴을 붉혔다.

“솔라리온 공작과는 잘 지내고 있나?”

“아직 저와 저택에선 말도 안 하고 지내기는 하는데 건강하세요.”

“그런가.”

내가 황제를 돌려놓겠다는 약속 이후, 얼굴이 밝아졌다.

세계 멸망을 보았던 과학자가 백신을 찾은 그 표정과 비슷했다.

“잘 돌봐드려. 그래도 아버지잖은가.”

“예. 그렇죠.”

에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조만간 솔라리온 저택에 갈 거다.”

“저택에요?”

“그래.”

“무슨 일 있나요?”

“이런 저런 얘기할 거리가 있어.”

언젠가 황제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 전에 이야기는 해둬야 겠지.

이대로 보여줬다간, 솔라리온 공작은 혈압 올라서 쓰러질 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기대가 되네요.”

“왜 기대가 되지?”

“오랜만에 저희 저택에 방문해 주시는 거니까요.”

에미르가 얼굴을 붉혔다.

“걷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보여주고 싶은 거요?”

“그래.”

나는 에미르와 함께 수도를 걸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하나 있었다.

백설, 세리아와 다르게 그녀와는 전쟁이 끝나고도 제대로 된 밤을 보내지 못했다.

류클리드 일에 내부 정치, 수도 정리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사죄의 의미로 그녀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여기는 분수대네요?”

“수도 공원에 있는 가장 큰 분수대지.”

이제 겨울이 다가왔음에도 물은 세차게 뿌려졌다.

수도 공방전과 추워진 날씨 탓에, 아직 공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대를 위한 선물이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분수대의 물이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방울들이 모여 작은 동물 모양으로 변했고, 동물들이 허공에서 둥실둥실 떠올랐다.

팡!

내 손짓에 커다란 물방울이 터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햇빛을 받은 물방울이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와.”

내가 준비한 작은 이벤트였다.

오로지 에미르만을 위한 작은 공연.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녀를 위해 나름 고심해서 준비했다.

“어떤가?”

“괴, 굉장해요.”

에미르를 위한 작은 쇼였다.

“기억나나? 예전에 에미르 네가 솔라리온 저택의 분수에서 했던 말.”

“예?”

“네 곁에서 떠나지 말아달라는 말 말이다.”

“아, 네…….”

에미르도 그 때가 떠올렸는지 부끄러워했다.

“혹여나 네 옆을 떠났다고 오해할까 함께 왔다. 솔라리온 저택의 분수는 아니지만, 이곳 또한 운치가 있으니.”

“좋아요. 모리스님과 함께면 어디든 좋아요.”

“그런가?”

“예.”

에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했으면 좋겠다.”

“충분해요.”

말을 마친 에미르가 내게 안겼다.

“정말 좋아해요.”

두근두근.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몸이 그녀에게 반응했다.

나는 웃으며 에미르를 안았다.

“조금 더 걸을까?”

“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대단한 주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에미르는 웃었고.

나 역시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수도의 화려함을 느끼고, 쇼핑의 재미가 이제 지겨워질 때쯤.

“조금……피곤하지 않으세요?”

에미르가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기사인 그녀가 지쳤을 리는 없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큰 호텔이 나와 에미르 앞에 있었다.

“피곤한가?”

“예, 조금……피곤하네요.”

에미르가 헤실거렸다.

“나도 피곤하군.”

오랜만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정말이다.

“그럼……. 쉬고 갈까요?”

말하는 에미르의 얼굴이 딸기처럼 새빨게졌다.

“그러지.”

우리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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