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8화 세실리아, 에밀리, 류클리드
* * *
“왜 데리고 온 거지? 아직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걸로 아는데.”
내 말에 에밀리가 고개를 저었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돌아왔어.”
“대부분?”
“그래.”
“어디가 누락된 거지?”
“류클리드의 명령에 근위대들이 자신을 범했다는 것.”
에밀리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런가.”
“그 때를 떠올리면 괴로워해서.”
“그랬지.”
나는 아직도 그 목소리가 선명했다.
오두막 안에서 짐승보다 더 슬프게 울부짖던 세실리아의 모습을.
다시 정신을 잃어 기억을 잃으면 항상 류클리드를 찾았다.
류클리드가 그녀에게 저질렀던 짓을 모두 잊어버린 세실리아가 돼서 말이다.
지금은 그 모습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에밀리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돌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은 괜찮은가?”
“많이 나아졌어. 증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네가 황제가 될 거잖아?”
“내가 말인가?”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내전을 벌일 필요는 없잖아.”
“알다시피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지 않는 이상, 귀족들의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이미 전쟁까지 치룬 사람이 왜 그래?”
“전쟁이 더 커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
“의외네.”
“뭐가?”
에밀리가 입술을 내밀었다.
“너는 부서진 세계라도 가질 남자라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지금 네 행보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에밀리는 말을 마치고는 싱긋 웃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를 감금하고 수도를 점거한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지.”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지. 더 얘기해봤자, 내 머리만 아프겠군.”
“나는 지지할게.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지.”
“고맙군.”
“대신 그 조건만 들어줘.”
“뭘 말이지?”
“여자끼리의 결혼을 법적으로 승인시켜줬으면 해.”
말을 마친 에밀리가 세실리아를 보았다.
그녀를 보는 에밀리의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를 보는 여자의 얼굴.
그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네가 남자로 돌아가면 되는 문제 아닌가?”
“하아, 쉬운 문제가 아니야.”
“뭐지?”
“수술이 어렵기도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에밀 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세실이 남자들을 무서워 해.”
“남자를 말인가?”
“응. 물론 너는 제외야. 이유는 몰라도 너를 보고서는 무서워하지 않더라고.”
“그런가.”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내 마나로 치유된 세실리아였다.
아마 내 마나 파동에 친숙하기 때문이겠지.
마치 막 태어난 애기가 자신의 부모를 인지하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회복시킨 나를 가깝게 느끼는 것이리라.
굳이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남자로 돌아갈 수 없다?”
“맞아.”
여자끼리 결혼하자는 법이 만들어진다면, 에밀리는 세실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힘을 쓰리라.
“알았다. 어찌될 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지.”
“네가 직접 황제가 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밀 리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세실이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대.”
에밀리는 입을 열었다.
“뭐지?”
나는 세실리아를 보았다.
그녀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류클리드를 보고 싶어요.”
“황제를?”
“예.”
“네게 한 짓을 모르지 않을 텐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말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굳건했다.
허나 몸이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괜찮은가?”
“예.”
“혼자 보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나는 옆에 선 에밀리를 보았다.
“혼자 갈 게요.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대를 어떻게 믿지? 류클리드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을 텐데.”
“원하신다면 당신은 와도 좋아요.”
당신이란 건 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됐다. 사랑싸움을 관음하는 취미는 없거든.”
나는 대답 대신 에밀리에게 물었다.
“너는 괜찮은가?”
“에밀리도 허락했어요.”
“에밀리라고 부르는 군.”
“변했으니까요. 저도 에밀리도.”
나는 잠시 세실리아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마법을 시전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흔들림 없이 꼿꼿한 눈빛에 그만두었다.
“알았다. 응하도록 하지.”
“고마워요. 장관님.”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며칠만 기다려주면 좋겠군.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나는 전쟁으로 엉망진창인 수도를 가리켰다.
“기다릴 수 있어요.”
“좋다.”
말을 마친 세실리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아, 세실리아.”
“예?”
나는 그런 그녀를 불러 세웠다.
“황제와 만나고 나서, 나와 개인적으로 얘기를 좀 하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나와 같은 빙의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았다.
뒤돌아 본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여자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물러나는 세실리아.
그 모습을 보던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황제를 여자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어.”
“잘도 알아냈군.”
“골드 상단의 정보력은 제국 제일이니까.”
“세실리아에겐 말했나?”
“아직, 그녀가 직접 보기 전까진 말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류클리드와 만나는 걸 허락한 건가? 비참해진 그를 보고 세실리아가 비웃도록?”
“아니.”
에밀리가 고개를 저었다.
“세실이 류클리드와 만나는 걸 허락한 건 그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녀가 잊었으면 좋겠어서지.”
“참사랑이군.”
참으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미련한 거지.”
에밀리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썼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내가 막으면, 세실이 나를 싫어할 거 같아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 뿐이야. 이번 기회에 미련을 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
아픈 사랑이다.
에밀리는 소설 속에서 봤던 이미지와 지금 이미지가 똑같은 유일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정이 들었고, 안타까웠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나는 입에 담았다.
“이번엔 뺏기지 마라.”
“걱정 마. 이번엔 세실리아를 절대 류클리드에게 넘기지 않을 거니까.”
에밀리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
류클리드는 문을 닫고 무릎을 안은 채로 고개를 파묻었다.
“훌쩍, 훌쩍.”
그의 모습을 다른 신하들에게 얘기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못했을 거다.
천하의 미친 황제가 이렇게 무너져 있다는 것.
누가 믿을까.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던 미친 황제 류클리드가 가녀린 여자처럼 혼자서 울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오지 않았어.’
그녀는 제국군을 보지 못했다.
절대적인 정통성을 가진 그녀였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상처 입은 류클리드의 마음에 쐐기를 박은 거다.
그날 이후, 하루 종일 집 안에 박힌 채 나가지 못했다.
충격적인 사실을 잊기 위해서 커튼을 치고 문을 잠갔다.
그를 찾는 건 이 저택의 주인인 모리스와.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군요. 이건 치우겠습니다.”
달그락.
가끔 모리스를 대신해서 식사를 가져오는 세바스찬 뿐.
“모리스는 오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선 일이 바쁘십니다.”
“그런……가요.”
“원하신다면 조만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됐어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음식을 테이블에 놓은 세바스찬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침묵할 뿐.
그녀가 왜 끌려왔는지.
어떻게 끌려왔는지.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주인의 명령에 충실할 뿐.
“이봐요.”
류클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세바스찬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세바스찬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거죠?”
“주인님께 충성하는 거 말씀이십니까?”
“예, 내가 왜 이렇게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아뇨. 궁금할 이유가 없지요. 주인님의 선택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겠지요.”
“그게 다인가요?”
“예. 주인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별 게 있습니까?”
“모리스 드미트리의 뭘 믿고 충성하는 건가요?”
“그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지요.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가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
“가끔 합니다만, 그럼에도 따라야지요. 그것이 집사 된 도리이니까요.”
류클리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부러웠다.
이런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하가 있는 모리스가.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의 어떤 점 때문에 저 노인이 모리스를 저리 따르는지를.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모리스 드미트리가 커다랗게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세바스찬은.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길.”
최대한 정중한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쿵.
닫히는 문을 보며.
류클리드는 생각했다.
‘모리스 드미트리, 너는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그가 가진 힘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이 남자가 생각나는 걸까.
분명 이 지옥에 그녀를 끌어들인 건 모리스일진데.
그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드는 것일까.
“모르겠어.”
그녀는 다시 한 번 쭈그려 앉았다.
음식이 식어가고 있음에도 류클리드는 그릇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은 생각의 심연으로 파고들었다.
깊이, 더 깊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