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122화 D2 류클리드 조교(3)
* * *
아아…….
안에서의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다.
아니, 고통이 맞을까?
고통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환상 속의 모리스는 언제나 류클리드를 다정하게 대했다.
근위병들에게 엉망진창 당한 뒤에도
이 모든 것이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모리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서.
“괜찮은가?”
라고 그녀를 격려하는 건 오로지 모리스뿐이었으니까.
“괜찮다. 내가 옆에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내가 있을 때만은…….”
환상 속의 모리스들이 류클리드의 상처 난 몸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셀 수 없이 다정해서.
류클리드는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끄윽…….”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버텼다.
***
류클리드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창백해졌다.
한 달처럼 느껴지는 한 시간.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그라고 하더라도.
“끄으으…….”
남몰래 신음을 삼킬 정도로.
“힘든가?”
까드득!
류클리드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24시간, 1시간에 1달이니 무려 2년이나 버틴 거군. 그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
류클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분노와 공포에 의한 것인지.
자꾸만 시선을 피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봐. 사람이 말하면 눈을 보고 얘기해야지 않겠나.”
“……치워.”
“뭐?”
“그 얼굴 치우라고.”
“여전히 건방지군.”
“이 몸은 황제다. 어찌 감히 황제에게 건방지다고 말할 수…….”
나는 류클리드의 턱을 손으로 잡고 들었다.
“히이이익!”
내가 잡기가 무섭게 류클리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방금 무슨 소리지?”
“그, 그만해…….”
“뭐?”
“그만하라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류클리드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이 맺힌 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냐.”
“흐으으읏!”
내가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자마자. 류클리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응이 이상하군.”
“이상?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흐으읏!”
나는 대꾸하려는 그녀의 뒷목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류클리드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솜털이 바짝 솟은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민감하군.”
“아니야. 전혀.”
효과가 좋았다.
2년.
애초에 쉽게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어느 누가 2년간 똑같은 공간에 갇혀 고통을 이길 수 있을까.
정신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류클리드는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툭 치면 깨질 금이 간 유리잔 같은 상태.
그리고 나는.
그 유리잔을 깨트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류클리드가 입을 꾹 닫았다.
“언제까지 침묵을 유지할 거지? 그렇게 건방지게 군다면…….”
나는 다시 류클리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 아니야. 그러지 마. 말할게…….”
류클리드가 꿈에서 보았던 광경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사실 내용은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류클리드가 내 말을 순순히 들었다는 것.
그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성실한 대답 고맙군.”
나는 착한 류클리드의 머리를 머릿결대로 쓰다듬었다.
내가 쓰다듬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근육이 수축되고 숨이 가빠지는 것.
모를 리가 없었다.
‘느끼고 있나.’
자기편은 없는 고독한 공간.
세실리아를 범했을 때처럼 자신에게 벌어지던 일들.
그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의 편이었던 환각의 나.
몸이 망가졌고 정신도 망가졌다.
‘망가졌다고 봐야지.’
남자로서 류클리드는 말이다.
방어기재.
환각 속의 나, 모리스는 류클리드가 정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방어기재였을 거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쳤다.
“네가 좋아서 솔직하게 말한 거 아니야.”
어느새 말투 역시 여성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럼?”
“환상에 가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 보기 좋군. 하지만.”
“뭐, 뭐야? 왜?”
“아직 부족하다.”
방금 말은 NG였다.
아직도 저항하고 있다니.
그건 용서할 수 없지.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이마에 손을 댔다.
“그럼, 한 달 뒤에 다시 웃는 얼굴로 보도록 하지.”
“자, 잠깐만! 미안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얘기해주면 전부 다…….”
“늦었어.”
툭.
류클리드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
류클리드는 마지막에 보았던 모리스의 미소를 기억했다.
멀어지는 상황에서도 기억나는 건 오로지 그것이었다.
고통스러운 경험과 그 와중에 겪는 모리스.
그러면서 류클리드는.
모리스의 말을 듣지 못하면 다시 이곳에 끌려오리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환각 속에 갇히면서 반성했다.
***
“일어났군.”
“…….”
모리스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잔 할 텐가? 너도 왕년에 좋아하던 차다.”
이 말마저 거절한다면 다시 보내겠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류클리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해질 거다.”
따뜻한 차가 몸 안에 흐르며 긴장되었던 몸이 나른해졌다.
“하아.”
안도의 한숨.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보내……줘.”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 내기가 있었잖아. 약속했던 거. 그걸 보고 싶어.”
“성 밖에 병사들이 왔는지 보고 싶은 건가?”
“응.”
류클리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희망.
혹여나 솔라리온의 병사들이 성벽에 깔려 있다면 모든 걸 끝내겠다는 그 약속.
류클리드가 믿고 있는 마지막 한 수였다.
“아직 하루 남았다. 그런데 지금 보고 싶은 건가?”
“응. 지금 보고 싶어. 어차피 오늘 오지 않았다면, 내일 오지 않겠지.”
“그런가.”
류클리드의 눈은 반쯤 죽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모리스가 차를 마셨다.
츄르릅.
잠깐의 침묵.
“알았다.”
말을 마친 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지.”
“바로?”
“조금 쉴 거라면 쉬어도 좋다.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야. 바로 가자. 어차피 할 거라면 빠른 게 좋겠지.”
“좋다.”
류클리드는 모리스와 함께 방 밖을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뒤에는 세리아가 따랐다.
모리스를 본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류클리드는 처참한 마음을 숨기며 모리스와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 때.
“어?”
류클리드의 눈에 수도를 돌아다니는 경비병에 꽂혔다.
“어어?”
류클리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지? 괜찮은가?”
모리스의 목소리가 순간 들리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시선이 고정된 류클리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으로 턱을 덜덜 떨었다.
“아, 아아. 아아……. 미, 미안해. 죄송해요.”
떨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류클리드.
모리스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봐. 류클리드, 정신 차려.”
이대로 두면 쓰러질 거 같아, 모리스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는 큐어 마법을 류클리드에게 시전했다.
화아앗.
하얀 빛이 류클리드의 주위를 감쌌다.
“모……리스?”
“괜찮은가? 방금 전까지 파르르 떨었는데.”
“아……. 괘, 괜찮아. 미, 미안.”
류클리드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
그 모습이 불안했다.
“피곤하다면 내일 다시 오지. 아니면…….”
“괘, 괜찮아. 잠깐 놀란 것 뿐이야.”
류클리드는 방금 그녀가 보았던 경비병을 보았다.
갑옷을 입은 이들.
그녀를 범했던 근위병과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근위병이 아니었다.
그건 환상이었을 뿐이지 않던가.
그러나.
환각을 통해 그녀의 몸 속 깊숙이 새겨진 남자 공포증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를 보며 휘파람을 부는 기사들도, 멍하니 류클리드를 보는 도시 청년도.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범하려고 수를 쓰는 짐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모리스만이 그녀가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였다.
아마.
그녀의 몸을 보며 욕정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빨리 가지. 해가 지겠어.”
“알겠어.”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저물고 있었다.
우리는 성벽을 올랐다.
동문.
성 밖에는 황제를 구하기 위한 제국군이 끝없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역시…….”
류클리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세리아가 뿜어내는 매혹향이 류클리드에게 다른 환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속임수를 쓰는 것이 미안했으나.
원래 속고 속이는 것이 정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일 뿐이었다.
“오지 않았구나. 역시나.”
말하는 류클리드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한없이 평화로운 평원을 보고 있을 거다.
논밭에는 늦은 시간까지 밭일을 하는 농부가.
뒤늦게 수도에 들어오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상인이.
이제 막 몬스터를 토벌하고 돌아온 용병들이.
아주 평화롭게, 아무렇지 않은 듯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는 말이다.
“실망했는가?”
“아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류클리드가 주저앉았다.
성벽에 주저앉은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나는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그녀는 내 환각에 의해 부하들에게 배신당했다.
이제 곧 무너질 거다.
조만간.
“오래 있었다. 돌아가지.”
“어?”
그러나 류클리드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일어나지 못했다.
힘을 줄 때마다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미, 미안…….”
“됐다. 업혀라.”
“진심이야?”
“곤란한 레이디를 가만히 두는 건 신사가 아니지.”
“내가 업힌 채로 널 어떻게 할 지 모르는데?”
“힘없는 여자에게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
그녀가 내게 업혔다.
류클리드는 자신이 완전히 여자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돌아가지. 오늘은 쉬어라.”
이제 더는 그녀의 정신을 무너트리기 위해 환각 속에 빠트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왜냐고?
내게 몸을 온전히 맡긴 채 내 등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류클리드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방비.
나를 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
놀라운 발전이었다.
‘잘 됐군.’
완전히 조교를 끝마치기 전에.
나는 성 밖에 주둔한 수많은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저놈들부터 일단 제거해야겠군.
회담이 멀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