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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119화 (119/174)

〈 119화 〉 118화 D­3 변하는 생각들.

* * *

“이렇게 함께 있으니 좋구나.”

세리아는 소파에서 몸을 기울여 자신을 보는 지크프리트를 마주보았다.

예전에도 느꼈던 아버지의 시선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의 아버지는 부성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약점이라도 되는 것인양.

그러나 지금은.

아끼는 딸을 보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좋으신가요?”

“그래. 잃고 나니 소중한 걸 알았지.”

지크프리트 공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세리아의 잔에 차를 따랐다.

천하의 지크프리트 공작이 직접!

뒤에서 보고 있던 머스크가 놀란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다.”

공작은 아직도 하녀복을 입고 있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공작가의 공녀였던 세리아.

그런데 이제는 어떤 공녀보다 하찮은 하녀가 되었으니.

“미안하다. 너를 고생하게 해서.”

“괜찮아요.”

“앞으로 네가 그런 고통을 겪을 일은 없을 거다.”

“고통이었죠…….”

“지금은 아니라는 거니?”

“네. 지금은 아니에요.”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약간의 질투가 고통이라면 느끼고 있는 거지만.

모리스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녀에게 행복이었다.

지금은.

“황제파가 이기고 다시 황제가 복권하면 지금 이 생활도 영영 끝이겠지. 너는 황제 밑으로 들어갈 테고.”

“그건 싫어요.”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우리가 이겨야겠지.”

지크프리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무력은 이 상황에선 이백 프로 먹힐 거라 자신할 수 있었으니까.

한참 침묵이 감돌았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지크프리트 공작은 세리아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아버지,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리스 드미트리, 그와 이미 관계를 가지지 않았더냐.”

“……맞아요.”

그걸 왜 지금?

세리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미간을 구긴 채, 찬잣을 쥐고 있었다.

찬잣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싫었더냐?”

“그건 아니었어요.”

싫었다면 여기까지 살아있지 못했으리라.

약간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그녀 자발적인 것도 있었기에.

그녀 또한 모리스와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았었다.

“이번 일이 좋게 끝나면 너는 지크프리트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어찌할 생각이냐?”

지크프리트로 돌아간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여러 가지였다.

황제를 완전히 폐위시키겠다는 뜻도 되었고.

귀족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가 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지크프리트 공작만이 알리라.

“어찌할 거냐고 물으셨나요?”

이 세계에서 귀족 영애의 길은 간단하다.

정략결혼을 하거나.

수도원에 가거나.

후계가 남아있지 않은 지크프리트였기에 그녀가 후계를 이을 수 있었다.

공작에겐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수도원에서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받진 않을 테고.”

“그렇죠.”

“네가 내 다음으로 지크프리트를 이끄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뇨. 저는 주인……. 아니, 모리스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건 드미트리 가문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냐?”

세리아는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역시 그런가.”

공작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마음이 무거웠다.

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응원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출가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울적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가 모리스님과 결혼하는 걸 반대하시는 건가요?”

“반대하지 않는다. 네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말이다.”

“뭐라도 있다는 건.”

“지금 네가 모리스와 혼약을 맺을 수 있겠느냐? 상대는 솔라리온이다. 당장은 가문과 관계가 나쁘더라도 솔라리온 공작이 좋아 죽는 막내딸이다.”

“제가 모리스님과 혼약하는 건 이 전투를 승리한다는 게 전제가 아닌가요?”

“그렇지.”

“그럼 솔라리온의 딸로 자신의 가문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글쎄.”

공작이 차를 마셨다.

“세리아 네가 봤을 때는 드미트리가 황제처럼 귀족 가문의 딸을 처형시키는 강수를 둘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모리스가 승리한다는 전제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그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일종의 테스트였다.

세리아가 이 나라의 판세를 어떻게 보는지 확인하고자.

지금은 틀려도 좋다.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수정할 줄 아는 유연함을 갖춘다면, 앞으로 그녀는 가문을 이끌어갈 가주로서 더 성장하리라.

“아뇨.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솔라리온의 영애는 자신의 가문을 잃지 않겠군.”

“그……렇죠.”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가문이 없는 세리아와 솔라리온을 등에 업은 에미르. 누가 모리스에게 더 이득이 될까?”

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의 그녀라면 에미르를 온전히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지크프리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솔라리온에게 지는 꼴을 볼 수 없어. 그게 딸의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잠시 말을 멈춘 지크프리트 공작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제국의 판도는 모리스를 중심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우리는 지크프리트야. 그 중심에 항상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 하지만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엔 있을 수 있지.”

죽었던 이리의 눈이 되살아났다.

“지크프리트는 언제나 그곳에서 빛날 거다.”

세리아는 익숙한 공작의 눈을 보았다.

열정과 야망에 타오르는 귀족의 눈빛을.

“그리고 그 자리를 갖기 위해선……. 세리아 네가 모리스의 정실부인이 되어야 한다.”

“그걸 위해선 지크프리트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래.”

“…….”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전부 맞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녀가 걱정하는 건.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녀는 전혀 모르겠다.

“네가 지크프리트를 갖는 것만으로 모리스에게 힘이 될 거다.”

세리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저는…….”

***

망연자실.

모든 것을 잃었던 류클리드는 화려한 방에서 아직도 오지 않은 소라리온을 생각했다.

“결국 똑같아.”

좋은 방으로 바뀌었지만, 갇혔다는 건 변함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고. 그녀는 이 화려한 방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궁이랑 다를 게 없네.’

그곳 역시 그녀에겐 감옥처럼 느껴졌으니.

그래도 몸은 편했다.

그녀를 괴롭히던 근위병들이 더는 오지 않으니.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기에 여유가 생겼다.

혼자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하루 동안 그녀가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감옥에 갇힌 뒤 수많은 근위병들에게 윤간을 당했던 기억.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아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이 년 봐라. 자기가 무슨 일 당하는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너 황제 아니야. 이 병신 같은 년아.

­너 때문에 죽은 애들이 몇인 줄 알아?

­내 부모님이 네놈 때문에 죽었어.

사방에서 쏟아지던 욕설들.

황제로 있을 때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다시금 그곳에 돌아간 거 같았다.

지하 감옥에서 당했던.

완전히 여자가 되어 발가벗은 몸을 보며 품평하던 놈들의 눈도.

증오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겁탈하는 놈도.

분노와 슬픔 속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놈까지.

그 지옥 같던 일들이 마치 눈앞에서 보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류클리드는 몸을 껴안고 부르르 떨었다.

“핫.”

그녀는 긴 상념에서 깨어나듯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하악, 하악.”

혐오와 고통.

류클리드의 몸을 수없이 쓸어내리던.

과격하게 그녀의 몸을 유린하던 남자들의 손길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개새끼들.”

마치 벌레가 기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 역시 황후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도 이랬을까?

더 심했겠지?

“젠장.”

그때, 류클리드의 머릿속에 모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감각들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짜증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 때문에 안도한다는 것이.

짙은 불쾌감을 주었다.

‘너는 생각하지 않겠어.’

모리스 같은 쓰레기 남자 때문에 위안을 갖지 않겠어.

차라리 더 고통스럽고 말지.

이렇게 좋은 방을 준 것도 다 속셈이 있어서일 거다.

혹여 전쟁에서 패배하면 자신이 그를 살려주지 않을까 하는 같잖은 기대감 때문이겠지.

류클리드는 피식, 조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일어났나?”

모리스가 들어왔다.

그는 쟁반을 든 채였다.

“무, 무슨 일이야?”

“앞으로 네가 먹을 밥은 전부 내가 담당할 거다.”

“왜?”

“하인들을 너랑 마주치게 할까.”

“뭐? 내가 어때서?”

“폭정으로 무너진 황제가 이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 위신이 잘도 서겠군.”

“이이익!”

류클리드가 손을 뻗어 모리스의 멱살을 잡아챘다.

“다 네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

“그래! 나를 이렇게 여자로 만든 것도! 여기에 쳐 박은 것도 네놈이 저지른 짓이잖아!”

“오해를 하는 거 같군.”

모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건 나 때문이 아니다. 너 때문이지.”

“뭐?”

“네가 선을 지켰다면, 나를 건들지 않고 적당히 좋게 넘어갔다면, 세리아의 신분을 내린 상태에서 끝마쳤으면, 귀족들을 압박하지 않고 내전을 기획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일들까지.

“얼마나 많은 귀족을 죽였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냔 말이다.”

“그건……. 그건…….”

류클리드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보려고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겠나? 네가 여기에 갇힌 진짜 이유를?”

모리스가 쟁반을 테이블에 올렸다.

“네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처형당해서 저 거리에 목이 매달려 있었을 거다. 지금 네가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있는 건, 네가 황제였었기 때문이야.”

“…….”

“그리고 나는 그런 널 마지막으로 교육시키려는 거고.”

거짓말.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류클리드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

나는 우두커니 선 류클리드를 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구 죽이려는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군.’

반응이 좋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변할지 보는 것도 재미일 거다.

잘 하면.

‘다시 좋은 황제가 될 수 있겠지.’

내가 과거에 보았던 로판의 남주처럼은 되지 못하더라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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