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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117화 (117/174)

〈 117화 〉 116화 차 드시고 가실래요?

* * *

밤길은 추웠다.

그러나 에미르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모리스님의 외투.’

그녀의 어깨를 덮은 모리스의 옷.

옷에 남은 온기와 풍기는 은은한 모리스의 몸 내음이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분위기를 타서 훈련하던 이야기를 계속 말했었는데 혹시 재미가 없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그런데 들리는 말은.

“아름답구나.”

모리스가 그녀를 보고 아름답다고 했다.

에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제국에서 벌어지는 내전.

암투와 전투가 벌어질 이런 상황에서 설렘을 느끼다니.

급박하다는 걸 알지만 에미르는 욕심이 났다.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고.

“모리스님…….”

“왜 그러지?”

“나, 날이 조금 춥네요.”

에미르는 시선을 돌리며 모리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모리스의 어깨가 툭 부딪쳤다.

“손이 좀 찬 거 같군.”

마치 모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에미르의 손을 잡았다.

“아……. 그, 그러게요.”

에미르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손을 잡는 모리스의 단단한 손.

에미르는 그런 모리스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날은 추웠지만, 잡고 있는 손만큼은 따뜻했다.

조금은 거칠었으나.

잡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미르는 머뭇거리며 옆에 선 모리스를 올려 보았다.

모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

계속 보고 있었던 걸까?

“부, 부담스럽네요.”

“내가 보는 게 말인가?”

“시, 싫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부끄러워서요.”

“부끄럽다라. 피차 마찬가지군.”

“예?”

“나도 이렇게 마주보는 게 부끄럽다는 뜻이네.”

“아…….”

두 사람은 밤길을 걸어갔다.

에미르가 머무는 솔라리온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괜찮은가? 원한다면 우리 저택에 와도 되네.”

사용인은 보이지 않았다.

솔라리온 공작이 도망치며 모두 데리고 나갔을 테니까.

저 넓은 저택에 그녀 혼자 있는 거다.

“괜찮아요. 저 도와주는 아이도 있어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아직은 어색한 거 같지만요. 세바스찬 씨가 보내준 아이에요.”

“그런가?”

에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녀가 종종종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오셨어요?”

“어, 왔어.”

에미르는 잡고 있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따라 빨리 나온 하녀가 비웠다.

미련이 남은 듯 아쉬운 눈으로 모리스를 보았다.

“저…….”

“음?”

“밤이 찹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시겠어요?”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그녀는 자기 뺨을 톡톡 쳤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자를 데리고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으리라.

“죄, 죄송…….”

“에미르 말처럼 춥긴 하군. 그냥 돌아가기엔 힘들겠어.”

“아.”

모리스의 말에 에미르가 반색했다.

“그, 그럼……. 들어오시겠어요?”

“안내를 부탁하네.”

에미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미련이 남아 말한 것인데.

이렇게 오시다니.

‘내, 내가 오늘 속옷을 어떤 걸 입었었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에미르였다.

***

나는 에미르의 하녀가 내온 차를 받았다.

“혹시 급한 일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차, 차 맛은 어떠신가요?”

에미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맛있네. 역시 직접 고른 건가?”

“예…….”

얼굴이 붉어진 에미르는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지?”

“예, 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잖은가.”

나는 그런 에미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 그게요…….”

에미르가 시선을 피했다.

“엉큼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천하의 솔라리온 영애가?”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에미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 짓궂으십니다.”

“그럼 아닌가?”

“……그, 그게.”

“에미르, 부끄러움이 많군. 아까 보였던 그 저돌적인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저, 저돌적이요?”

“혼자 있는 이 거대한 저택에 남자를 초대한 것이 저돌적인 것이 아니면 뭔가?”

나는 에미르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내 손가락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촉감을 느끼며 에미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에미르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으읏.”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

오히려 내가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어찌 괴롭히고 싶던지.

나는 질끈 감은 에미르의 옆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뗐다.

“칠칠맞지 못한 거 같아.”

“에, 에?”

맥이 빠진 목소리.

에미르가 입을 살짝 벌리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쉬운가?”

“아, 아니요. 저, 저를 어떤 여자로 보시는 겁니까?”

“혹 따로 원했던 것이 있었나 싶어서.”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그녀가 타주었던 차를 전부 비웠다.

“맛있군. 역시 솜씨가 죽지 않았어.”

“다 마셨습니까?”

나는 모른 척 컵을 들었다.

“아쉽게도. 몸도 충분히 데운 거 같으니 이제…….”

“호, 혹시!”

에미르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다, 다른 차도 있는데 드셔보지 않으시겠어요?”

“다른 차?”

“예.”

어떻게든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어, 어떠세요?”

“궁금하긴 하네.”

나는 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에미르가 탄 새로운 차를 맛 보았다.

“괜찮군.”

“케모마일로 만든 차에요. 진정시키기에 좋은 차거든요.”

“나보다는 그대에게 필요한 거 같은데.”

“마, 마실 거예요.”

에미르가 이제 막 우려낸 뜨거운 차를 한 입에 마셨다.

“아 뜨것!”

에미르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급히 마신 탓에 입이 다 덴 거다.

“뭐가 그리 급해서.”

나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차가운 물을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에미르가 따른 물을 황급히 마셨다.

차가운 물이 그녀의 입 안을 식혔지만.

왕창 데어버린 입 안까지 낫게 만들 수는 없었다.

“괜찮나?”

“괘, 괜차나요.”

혀와 입 천장을 모두 덴 에미르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급하게 마시지 말지 그랬나. 내 치료를 해주겠네.”

“치, 치료요?”

“이대로 있을 건가?”

“그건 아니지만. 이, 입을 벌려야 하나요?”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에미르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읍?”

에미르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이, 이게 무슨?”

“조용히. 치료하고 있으니까.”

나는 에미르와 진한 키스를 했다.

힐을 이용한 가벼운 치료는 환부에 마법을 직접 대는 것이 효과가 좋다.

손가락을 넣을 수는 없으니.

나는 내 혀에 힐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춘 거다.

나는 에미르의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모, 모리스님…….”

놀라 잠시 저항했던 에미르도 이제는 내 치료(?)를 받아들였다.

혀와 혀가 이리저리 춤을 췄다.

타액과 타액을 나누는 농밀한 키스.

“하아, 하아.”

에미르의 신음이 내 귀를.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모리스님……. 하아, 하아.”

에미르가 나를 껴안으며 키스에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에미르의 입 안은 점점 말끔히 낫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에미르와 내 얼굴이 멀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몽롱해진 상태였다.

붉어진 피부와 흐려진 동공.

에미르와 내 입 사이에 늘어진 가느다란 실까지.

지금 그녀는 어떤 여자보다 유혹적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괜찮나?”

“……아뇨. 잘 모르겠어요. 조금 더 치료해주시겠어요?”

에미르가 내 목을 안았다.

오늘 에미르의 속옷은 붉은색이었다.

***

솔라리온 공작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망그레브 후작을 보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모리스가 화친을 원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겠다는 얘기도 다 이해했소.”

“금방 이해하셨군요.”

“그런데 화친이라니? 천하의 모리스가?”

“귀족파 내부에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황제를 이렇게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수도를 점령했다는 이점이 있는 상태에서 화친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크프리트에 충성하던 귀족이 아니던가.

지크프리트가 완전히 모리스에게 붙어버린 지금,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망그레브가 모리스가 보낸 첩자라면?

그가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면?

솔라리온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돌아갔다.

“믿을 수 없으시다는 걸 압니다. 허나 모리스의 횡포를 더는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모리스를 배신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모리스가 황제 폐하를 구금한 채로 고문을 자행하고 있어서입니다.”

“고문?”

“예,”

“황제를 폐위시킨 명목은 황후를 비롯한 귀족들을 과하게 고문하고 억압해서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

웃기는 소리다.

권력의 맛을 보고 미친 것이라도 한 걸까.

“그래서 배신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현재 저와 함께 하겠다는 혈서를 쓴 명단입니다.”

솔라리온 공작은 망그레브 후작이 내민 종이를 받았다.

수많은 이름들이 피로 적혀 있었다.

귀족파를 구성하는 귀족 중 3분의 1은 적힌 것으로 보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공격을 하면 된다.

“저희가 내부에서 성문을 열겠습니다. 제국군이 들어오면 저희는 다른 귀족들을 포로로 잡을 생각입니다.”

“최소한의 피해만 갖는다?”

“맞습니다.”

성문만 돌파할 수 있다면.

모리스가 변수인 건 맞지만 혼자서 이 많은 병사들을 다 맡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 망그레브 후작을 비롯한 이들이 협력해준다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그러나 너무 잘 풀리는 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뒤에 뭔가 있지 않을까.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리스가 원한 회동 날짜는 5일 뒤입니다.”

“한 주가 시작하는 날이군.”

“그렇습니다. 그간 서로의 합의점을 가지고 오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네.”

“말씀하십쇼.”

“어느 문을 열 생각이지?”

제국 수도는 절대 뚫려선 안 되는 거점이 있다.

동문.

곧바로 내성과 연결된 가장 방비가 강한 성.

그곳이 뚫린다면 모리스가 어떤 전략을 쓰든 대군을 막지 못한다.

그 전에 황성이 점령당할 테니까.

만약 망그레브가 모리스가 보낸 첩자라면 동문만큼은 제시하지 않으리라.

‘서문을 제시한다면 목을 벤다.’

솔라리온은 망그레브를 노려보았다.

“동문과 남문을 열겠습니다.”

“이유는?”

“아시지 않습니까? 동문이 수도의 심장부라는 것을요.”

“남문을 함께 제시한 이유는?”

“모리스의 착각을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알았다. 자네 작전대로 따르지.”

이자는 완전히 믿을 수 있다.

솔라리온 공작은 확신했다.

“에미르 솔라리온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딸아이 이야기는 지금 할 입장은 아닌 거 같군.”

그녀는 전쟁에 승리한다면 언제든 다시 데리고 올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전쟁에서 어떻게 이기느냐.

그것 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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