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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109화 (109/174)

〈 109화 〉 108화 지크프리트의 사정

* * *

“꼴이 말이 아니군.”

나는 침대에 누워 쌕쌕거리는 지크프리트 공작을 내려 보았다.

내가 근처에 왔음에도 인지하지 못한 듯, 텅 빈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참이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늘 이런 상태였나?”

“그렇다.”

머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건가?

어리석군.

그 냉철하던 지크프리트 공작이 이 지경까지 되다니.

‘딸을 그리도 아꼈던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전 패배 이후 가문을 살리려면 세리아를 버리라는 황제의 명령까지 수긍했던 공작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리 오랫동안 피폐해질 정도였나.

“우선 얘기를 할 상태부터 만들어야겠군.”

방법은 간단하다.

지크프리트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 그의 무너진 정신을 하나하나 조각하는 것.

운이 좋다면, 예전처럼 총명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직접 정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내 뒤에 있는 에미르와 세리아를 보았다.

“부탁하지.”

“걱정 마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두 사람이라면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숨을 고른 나는, 지크프리트 공작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사아아.

주위의 마나가 흔들림과 동시에.

나는 지크프리트의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리아…….

­미안하다……. 못난 아비가…….

­가문이, 무너지면……. 황제에게…….

여기저기 조각난 기억들과 의식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기억들의 순서가 어긋나 있었고.

의식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깨진 유리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는 이게 전부 지크프리트의 기억이고 의식이었다.

나는 그 중 하나에 손을 갖다 대었다.

주위가 일렁거리며 지크프리트의 저택 안을 비췄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응접실에서 세리아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지크프리트 공작.

한없이 냉철했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황제가 세리아의 신분을 파기하지 않으면 가문을 박살내겠다고 선언한 그 날이었다.

가문이냐, 딸이냐.

그 둘을 선택해야 하는 그 날.

­내 반드시 힘을 길러 너를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지크프리트가 깨문 입술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덜컹.

­공작님, 어서 선택을 내리셔야 합니다.

머스크가 안으로 들어오자, 공작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알았다.

그 뒤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세리아가 신분을 잃어버리고 내게 왔다는 것.

나는 다음 기억의 파편을 집었다.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맞아. 당신과 내 아이야. 어때, 예쁘지?

릴리스와 지크프리트.

암캐로 떨어지기 전의 서큐버스 릴리스였다.

­너와 잔 건 실수였다.

­혹시 서큐버스의 매혹에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원하는 게 뭐지?

­별 거 아니야. 그냥, 이 아이를 키워줬으면 해.

­뻔뻔하군. 감히 날 속이고 영애 행세를 한 것도 모자라 아이를 맡기고 자긴 도망치겠다고?

­그럼 어째? 교회 사람들이 몰려 올 텐데.

릴리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서큐버스답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지크프리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미소 때문에.

하룻밤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그럼 내가 직접 손을 써야겠지.

­흥, 알았다. 이 아이도 지크프리트의 핏줄이니까.

절반은 자신의 피를 타고난 아이였다.

결혼하지 않은 공작의 아이라는 추문?

그런 건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 정도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참, 주의할 게 있는데.

­뭐지?

­이 아이를 너무 아끼지 마. 그러다간 홀릴 수도 있으니까.

­홀린다고?

­서큐버스의 아이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너를 매혹시킬 수도 있어.

­웃기는 소리로군.

지크프리트는 포근한 겉싸개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이름은 뭐로 지을 거야?

­세리아.

세리아를 처음 데려왔을 때였다.

지크프리트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새로 생긴 아이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낯섬.

‘매혹이라.’

그 와중에 릴리스에게 들었던 매혹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어쩌면.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

나는 계속해서 지크프리트의 기억을 읽었다.

세리아가 한 살일 때.

유아기를 거쳐 제 스스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가정교사가 붙어 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자라고 자라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사교파티에 데뷔했을 때.

가면 갈수록 지크프리트의 표정은 풀어졌다.

그러나 딱 하나.

­저는 황후가 되고 싶어요! 황태자 저하 멋있지 않은가요?

물론 황후가 되고 싶다고 밝혔을 때의 표정만큼은 밝지 못했다.

애지중지 키운 딸아이가 엄한 놈에게 시집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아쉬움.

이제 독립해서 출가외인이 된다는 섭섭함.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이리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놀라고 있었다.

­황후, 멋있는 이야기지. 최고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고.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매혹.

나는 그 키워드를 떠올렸다.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었군.’

부성애.

지크프리트가 세리아에게 당한 매혹은 아비로서 사랑이었다.

그녀를 아낄 수밖에 없는.

세리아도 지크프리트 공작도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그녀에게서 시작된 미세한 매혹향이 십 수 년간 지크프리트 공작에게 노출된 거다.

점점 짙어지는 부성애.

릴리스가 경고한 매혹은 그거였다.

결국 이 꼴이 난 것도 그 강하디 강한 부성에 때문이었으니.

‘공작도 대단하군.’

지금까지 매혹향에 노출되지 않은 척,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세리아의 신분 처형을 막지 못한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가문이 무너진다면 결국 같은 결말이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황제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세리아에게 이 모든 사실을 숨긴 것은.

공작으로서 정치적 약점을 드러내기 싫었을 테고.

그리고 그것이.

공작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나는 남은 지크프리트의 기억과 의식을 보았다.

­아, 세리아…….

세리아에게 버림받고 슬퍼하는 공작.

그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지크프리트 공작은 그 자리에 없었다.

딸에게 버림받은 나약한 아버지가 있을 뿐.

나는 복잡하게 꼬이고 얽힌 공작의 기억과 의식을 모았다.

“다 모았다.”

오차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처럼.

“이제 시작하지.”

나는 깨진 공작의 기억과 의식에 마나를 넣었다.

나를 중심으로 의식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

악몽을 꾸었다.

매일 같이 꾸는 꿈이었다.

세리아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모리스 드미트리.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자신의 딸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원흉.

빠드득!

이를 갈았다.

“어?”

공작은 뒤늦게 깨달았다.

평소와 다르게 몸이 가볍고.

의식이 또렷하다는 것을.

세리아가 떠나고 단 한 번도 제대로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몸이 가볍단 말인가.

“일어나셨어요?”

공작은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세……리아?”

세리아가 침대 옆에서 공작을 보고 있었다.

“네가 어찌……? 너는 분명 모리스 그놈과…….”

“나를 불렀나?”

그 목소리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세리아를 데리고 떠났던.

딸을 이용해 자신을 쥐고 흔들었던 그놈.

모리스 드미트리.

“드미트리! 네놈이 왜 여기에!”

“지크프리트 공작이 쓰러진 채로 칩거했다는 소문에 치료를 위해서 왔지.”

“치……료?”

그러고 보니 몸이 가벼웠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상쾌한 감각.

“공작님, 깨어나셨군요!”

한 쪽에 서 있던 머스크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머스크,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그것이…….”

그 때.

“도움이 필요해서 내가 직접 공작을 치료했다.”

모리스가 끼어들었다.

“도움? 황제를 등에 업은 네놈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할 줄은 몰랐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져서 말이지.”

모리스가 상황을 파악 중인 지크프리트 공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는 현재 감옥에 있다. 사유는 황후를 시해하려 했으며 민생을 보지 않고 전쟁만을 계획하고 있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지.”

“……뭐?”

믿을 수 없었다.

황제가 투옥되다니?

그 강력한 힘을 쥔 황제가 왜?

제국 최고의 전쟁영웅이 자신의 편이며 수천의 기사단과 수만의 병사들이…….

공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네 짓인가? 새로이 귀족파의 귀족을 흡수하고 반란을 일으킨 거 같은데.”

“귀신이군.”

“내 도움이라는 건 역시 말을 듣지 않은 귀족파 귀족들을 네 편으로 만들어 달라는 얘기겠지?”

“맞다.”

건방지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서 귀족파를 흡수한 것도 모자라 반역이라니.

공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살기 위해서, 그리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였다.”

“그게 변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공작도 알았을 거다. 세리아가 황제에 의해 내 소유가 되었다는 걸.”

“알다마다.”

까드득!

그 치욕스러운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복수를 위해 계획을 짰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마법사는 그야말로 무적이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세리아를 강제로 범하려고 했다.”

“뭐?”

“결국 자신의 첩, 아니 성적인 노예로 삼기 위해 만들었던 짓이었지.”

“네놈은 그걸 지키려고 했던 거다?”

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파 귀족들을 대상으로 뇌물죄를 씌워 감옥에 가두려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갈 때까지 갔다는 뜻이겠군.”

“그래.”

“성 밖에서 몰려오는 제국 정규군 수십만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고?”

“맞다.”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최소한 귀족들의 단단한 지지를 받으면 가능성은 있다.”

지크프리트는 모리스를 올려보았다.

“너를 도와줘서 내가 얻는 것이 뭐지?”

“간단해. 세리아 신분을 복권하겠다.”

“그게 단가? 설마 고작 그것만으로 나를…….”

“내전에서 패배한 뒤에도 암암리에 세력을 키우고 병사들을 모았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나?”

모두 읽혔다.

‘내가 멀쩡히 깨어나게 해줬다고 했으니…….’

모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었으리라.

이 대마법사에겐 소용 없는 시치미였다.

공작은 세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최소한 경멸스럽다며 내려보던 그 때의 눈초리는 사라졌다.

조금은 상냥한.

과거에 간혹 보였던 그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름다운 세리아.

그의 딸이자, 지크프리트의 꽃.

비록 절반은 인간이 아니지만, 애지중지 키운 자신의 딸이었다.

그녀를 다시 원래 신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한 방에 된다?’

그 한 방을 노리기 위해서는 높은 산을 넘어야 할 것이다.

솔라리온을 필두로 하는 제국군.

“황제의 명령을 취소하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나?”

“이미 반역까지 한 마당에 그걸 신경 쓸 수 있나?”

“애초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군.”

솔라리온이 전쟁에 승리한다면 귀족파들은 자리를 잃을 거다.

이번 일을 가지고 대부분 숙청당하겠지.

아마 자신도 포함일 거다.

의식을 잃은 채였어도 말이다.

“알았다. 망그레브 후작을 설득하고 개인 사병을 내도록 하지.”

“좋은 선택이다.”

모리스는 처음으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

손이 떨렸다.

공작의 의식을 원래대로 돌리느라 대부분의 마나를 사용한 탓에 현기증이 났다.

‘다행이군.’

혹여, 그가 거절할 때를 대비해서 세리아를 데리고 왔다.

공작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거절한다면 세리아의 매혹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쓰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서로 윈­윈한 거다.

“그럼 난 돌아가겠다. 내부 안정은 공작에게 맡기지. 그리고…….”

나는 세리아를 보았다.

처음엔 있기 싫다던 그녀도 내가 보았던 공작의 기억을 보여주고 나서는 표정이 풀렸다.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에요.’

라며 툴툴댔지만, 처음 그녀와 함께 저택에 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오랜만에 아버지랑 얘기 나누고 와라. 쌓인 오해도 풀겸.”

나는 세리아를 두고 저택을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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