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5화 뭔가 이상한(?) 수업 (1)
* * *
“미안하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두 여자에게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업을 빠지고 말았다.”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을 가르치는 것 역시 중요했으나,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황제군의 수상쩍은 움직임.
언제 터질지 모를 황제의 변덕.
그리고 황후의 존재까지.
모든 걸 해결하기 전에 내 의도를 최대한 숨겨야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옳은 선택이었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두 사람에겐 미안할 뿐이었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나요?”
에미르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질 기세였다.
“검을 배우러 찾아왔는데 모리스님은 계시지 않고, 세바스찬은 따로 말해주지도 않는데다가 소식도 주지 않으셨잖아요. 초조해서 검도 들지 못했습니다.”
“할 말이 없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연락 없이 일을 하고 온 건 내 잘못인데 말이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됐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실 줄만 알고…….”
에미르 역시 최근 수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황제의 군대는 물론이고.
그녀의 아버지, 솔라리온 공작은 동부의 군대를 수도로 불러 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내전.’
귀족파의 수장인 모리스가 어떻게든 움직일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제파의 리더인 솔라리온.
그리고 귀족파의 리더인 드미트리.
그녀가 이곳에 오는 것이 어떤 뜻인지는 그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솔라리온 공작 역시 그녀가 모리스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얼마나 만류하던지.
그러나 에미르는 오늘도 여기에 왔다.
모리스를 보기 위해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은 화가 났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모리스를 미워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것으로 무너졌을 거라면 지금까지 그만 바라보지 않았으리라.
“앞으로 갑자기 연락 없이 사라질 일은 없을 거다.”
“설마 어제 류클리드가 저택에 쳐들어왔었는데 그 때문인가요?”
세리아가 입을 열었다.
황제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세리아의 말에 에미르가 흠칫 놀랐다.
“그래. 허나 너희를 의심하고 따라다니는 첩자가 있을지 몰라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나는 세리아와 에미르를 번갈아 보았다.
두 여자는 모두 입에 한 가득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저를 믿지 못하셨던 건가요?”
에미르가 서운하다는 듯.
“제게는 말씀하셔도 좋았잖아요.”
세리아는 질투 섞인 투정을 말했다.
특히 세리아의 표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수업을 빠졌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왜 며칠간 모습을 감췄는지 알고 있으니까.
나와 함께 사라진 백설.
갑자기 저택을 찾아온 류클리드.
모르는 게 이상하지.
모리스의 예상대로.
세리아는 모리스가 수업에 빠진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류클리드가 저택에 쳐들어오는 걸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찾을 때 얼마나 소름이 돋았던가.
‘나도 황후처럼 만들려고?’
세바스찬이 그런 류클리드를 쫓아낼 때까지 차마 밖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황제와 관련된 일.
그녀로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백설과 함께 북쪽으로 갔다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뭘 했을 지는 뻔하니까.’
모리스와 정을 통한 사이였다.
세리아가 없는 사이, 무슨 짓을 했을 지는 뻔했다.
모리스님을 유혹하고 그랬겠지.
모리스가 먼저 다가갔을 리는 없을 거라 확신하는 세리아였다.
왜냐하면.
‘모리스님은 그리 헤픈 분이 아니시니까.’
그처럼 멋진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옆에 있는 에미르도 봐라.
모리스의 매력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잖은가.
물론, 에미르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그녀 역시 저런 표정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볼을 부풀린 세리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는 첫 수업이었어요.”
목소리에 북부의 냉기가 느껴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다고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전부 내 잘못이다.”
“정말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잘못을 하셨으니 벌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
대체 뭘 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나는 눈을 빛내는 세리아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번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할 때까지 마법을 가르쳐주셔야 해요.”
“그만두겠다고 할 때까지?”
“예!”
그녀의 표정이 살짝 풀린 것 같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그건 안 돼요!”
그 때, 에미르가 끼어들었다.
“왜 세리아만 가르치는 거죠? 저, 저도 헛걸음 했었는걸요?”
아, 그쪽인가?
“저도 가르쳐 주셔야 해요.”
“알았다.”
“대신!”
에미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모르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세요.”
구체적이라.
어려울 것도 없지.
“알았다.”
“무조건 제가 알겠다라고 할 때까지 해주셔야 해요?”
“물론이다.”
이번엔 세리아가 덤볐다.
“저도요! 저도 무조건! 알았다고 할 때까지에요!”
열의가 넘치는 건 좋은 일이지.
“알았다.”
차라리 다른 걸 조건으로 삼았어야 했어.
***
시작은 에미르였다.
그녀의 검술을 잡아주고, 그 다음에 세리아의 마법을 봐줄 생각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기초는 충분한 에미르였고, 수업 내용 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솔라리온의 검술을 그녀에게 맞게 응용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알았나?”
가볍게 시범을 보여준 나는 에미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
“한 번만 더 보여주시겠어요? 마나를 사용하셔서 제가 따라하기 어려워 보이거든요. 이번엔 마나 없이 부탁드릴게요.”
“음……. 알았다.”
이상하군.
모를리가 없는데.
이런 간단한 것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러 의문을 품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검을 쥐고 휘둘렀다.
솔라리온의 기본 검술에 부드러움을 덧입힌 검술.
마치 부드러운 종이를 쥐고 휘두르듯 막힘이 없었다.
에미르에게 새로운 솔라리온의 검술을 전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막힘없이 흐르는 움직임이 끝나고.
나는 다시 에미르를 보았다.
약간은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집중을 못하고 있는 건가?’
“보았나?”
“죄송해요. 오늘 유독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흠, 알았다.”
지은 죄가 있기에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
“한 번 더 보여주겠다. 잘 보길 바란다.”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1식부터 시작되는 검술.
부드럽게 그러면서 날카로운 힘을 가진 검술을 휘두르던 나는 에미르가 잘 보고 있나 싶어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멍.
에미르가 혼이 나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턱을 괴고 한없이 가벼워진 눈빛으로.
내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었다.
끝까지 검을 휘두른 나는 에미르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풀린 눈을 되돌리지 못한 채였다.
“어떤가?”
“죄송해요. 조금 더 감상……. 아니 배움이 더 필요할 거 같아요.”
“방금 감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잘못 들으셨어요.”
에미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그 태연한 모습이 꽤 무서웠다.
“저는 조금 더 보고 싶은 걸요?”
“내 검을 말인가?”
“그래야 이해가 잘 될 거 같아요.”
“알겠다.”
저지른 잘못이 있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끄응.’
이래서 무조건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라는 조건을 달았던 건가.
검을 들며 에미르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아, 원하는 거라도 있나?”
“없어요. 그냥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요.”
여유롭고 따사로운 미소가 오늘따라 따갑게 느껴졌다.
“……알았다. 오늘은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
나는 검을 들고 다시 한 번 휘둘렀다.
훈련은 에미르가 아닌, 내가 하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보고 싶어요.”
“조금 더…….”
“한 번 더…….”
몇 번을 했을까.
“하악, 하악. 아직 부족한 건가?”
전신에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휘두른 기분이었다.
최강의 마법사라도 인간.
마나를 몸에 실지 않고 움직이면 지치고 무리가 가기 마련이었다.
전신에 흐른 땀이 옷을 적셨다.
하얀 셔츠가 젖어 몸에 딱 달라붙었다.
그 덕분에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근히 비치는 살색까지.
꿀꺽.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미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 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동공이 살짝 풀리고 입이 헤, 벌어진 상태였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무방비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 하하……. 하아, 저, 정말 멋지네요.”
“내 몸이 말인가?”
“예……. 엇? 아니에요! 검술이, 검술이 멋지다는 뜻이었어요!”
“그런 표정처럼 보이진 않네만?”
“아니에요! 맞아요. 헤헤.”
“이제 이해가 됐나?”
“한 번 해볼게요. 좀 봐주세요.”
에미르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떠오르는 상념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후우.”
숨을 고른 에미르가 검로를 이어갔다.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빠르게.
그녀는 내가 알려준 대로 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조금은 서툴었지만, 분명 내가 알려준 검이었다.
“아앗?”
에미르의 몸이 휘청거렸다.
“에미르!”
나는 넘어지려는 에미르의 몸을 덥석 안았다.
“아, 모리스님.”
내 품에 안긴 에미르가 똘망한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발밑을 조심해라.”
“그, 그렇죠? 제가 조금 실수를……했던 거 같아요. 조금 배움이 부족했던 거 같은데…….”
내 얼굴을 보던 에미르의 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아직도 땀에 젖은 내 몸을 보았다.
꿀꺽.
“직접 몸으로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미르가 손가락을 내 가슴에 대고 원을 그렸다.
부드럽게 긋는 그녀의 손가락.
“잠까아안!”
그때, 세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가르쳐 주셔야죠. 주인님.”
웃고 있는 세리아의 등 뒤에.
불꽃이 보이는 건 왜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