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4화 함정에 걸린 근위대장
* * *
필립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모리스 드미트리가 그들과 함께 캐롤베리에 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연치고는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거기다가.
동굴에는 사람이 산 흔적조차 없었다.
황후가 이곳에 납치되었다면, 그에 관련된 증거 또한 있어야 할진데.
‘함정이다.’
사무실에 있던 그 보고서는 전부 조작된 증거였다.
황제를 이곳으로 부르기 위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드미트리 장관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필립스는 침착함을 가장하며 미소를 지었다.
“근위대장, 내가 먼저 물어본 거 같은데?”
“황제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폐하께서 이 먼 땅까지 근위대장을 보낼 일이라……. 중요한 일인가 보군?”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사람 하나 없이 척박한 케롤베리에 말인가? 이상하군.”
“그럼 장관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나 말인가?”
모리스가 씨익, 웃었다.
“찾을 물건이 있어서 말이야. 이곳에 중요한 보석이 있다는 첩보를 들었거든.”
“그……렇습니까?”
“헌데, 이렇게 직장동료를 만날 줄은 몰랐군.”
모리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저희는 찾는 물건이 없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간다?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수한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저희가 찾는 것이 없군요.”
“그러한가.”
톡. 톡. 톡.
드웨인이 발끝을 까딱거렸다.
“나는 찾은 거 같은데.”
“예?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느껴졌다.
필립스가 몸을 옆으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쾅!
“커헉!”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쳐 박혔다.
그대로 사망.
벽에 쳐박힌 기사의 목숨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언제까지 모르는 척을 해줘야 할까?”
“…….”
모리스의 기세에 필립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그대들을 돌려보낼 거 같은가? 감히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잠입한 놈들을 말이야.”
“근위대를 공격하다니 제정신이십니까?”
“정신줄은 놓은 건 그대 아닌가? 죽을 각오는 하고 왔을 텐데.”
“이건 반역입니다!”
“애당초 황제는 재판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 같던데?”
“장관!”
“말이 너무 길었다.”
그때, 모리스가 주먹을 쥐었다.
으저적.
“끄아악!”
함께 온 다른 기사의 비명이 들렸다.
더는 안 된다.
“전원 돌격!”
필립스는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검을 들고, 마법사의 심장을 노린다.
절대 방심은 안 된다.
마스터 두 명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마법사였다.
‘싸움이 길어지면 안 된다.’
부하를 몇 명이나 희생시켜서라도 첫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승리를 장담할까 말까.
“하아압!”
“어리석다.”
쾅!
막강한 두 기운의 충돌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먼지 구름 속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필립스가 공격하면 모리스가 막았고.
모리스의 마법을 필립스가 어렵게 튕겨냈다
필립스의 전신에는 모리스의 마법에 생긴 상처들이 점점 늘어났으나.
“이게 다인가?”
모리스는 상처 하나 없이 필립스의 검을 막았다.
에너지가 충돌하고 있어 머리카락은 휘날렸지만, 그게 전부.
함께 공격했던 부하들은 이미 멀리 나가떨어진 지 오래.
무력감.
검을 겨루며 처음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렇게 압도적일 정도로 힘의 격차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 어떻게?”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너무 약하다.”
그와 함께 한줄기 섬광이 번쩍거렸고.
필립스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과거 벌어진 내전에서 보여줬을 때보다 훨씬.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그는 검을 놓았다.
아마 이 남자는.
인간으로선 닿을 수 없다던 9서클의 벽을 넘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필립스의 머리는 아래로 떨어졌고.
쿵.
제국의 소드 마스터 한 명이 전사했다.
***
“아쉽군.”
나는 필립스의 시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황제까지 전부 왔다면 일이 쉽게 끝났을 텐데.
원래는 황제를 낚기 위한 정보였다.
그가 최대한 황궁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며 적었던 보고서.
황제파의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고, 귀족파와 야만족까지 움직이고 있는 마당이지만.
어떻게든 내전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 벌인 작전이었다.
그럴듯한 계획과 정보들을 수없이 취합해서 적어 넣은 적절한 함정.
황제가 가장 원하는 황후, 세실리아의 정보라면 그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부족했나.’
황제는 대신 근위대장을 보냈다.
이 역시 예상범주 안이었다.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황제파의 소드 마스터를 죽였고, 근위대의 정예 중 일부를 미리 처리했다.
작은 왕국급의 전력인 소드마스터의 부재라면 앞으로 전황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리라.
‘정말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자세히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정보들 투성이었다.
내 사무실을 뒤진다는 것. 내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촉박한 시간 속에서 그리 자세히 따져보고 결정을 내릴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테지.
미리 정답을 정한 상태로 사건을 강제로 끼워맞췄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나는 혀를 찼다.
망가졌어.
그 총명했던 황제가 무슨 연유인지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제대로 된 판단마저 하지 못할 정도로.
그게 단순히 내게 느낀 배신감 때문일까?
‘황후를 잃은 상실감이 그렇게 컸다?’
가능성이 있는 말이지만, 모두 추측이었다.
알 수는 없지.
직접 만나보지 않는 이상.
나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철마저 단숨에 녹여버리는 지옥의 화염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소드마스터였던 시체마저 한순간에 녹아 없어졌다.
모든 증거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나는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
“세실, 이제 괜찮아?”
“이미르…….”
제국의 작은 시골.
자연의 싱그러운 공기가 충만한 루테온 마을.
에밀리는 오늘도 세실리아의 손을 꼭 잡고 산책을 나섰다.
처음에는 류클리드를 찾겠다며, 그를 부르라며 울부짖던 세실리아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내가 떠오른 일들이 정말 사실인 거야? 류클리드……가 내게 정말로…….”
“억지로 떠올리지 않아도 돼. 지금은 다 잊어. 신경 쓰지 말고.”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하나하나 돌아오며, 세실리아는 조금씩 그 때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끔찍한 과거에 고통을 겪으며 몸을 떨 때마다 에밀리는 그녀의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힘든 기억이면, 이제 다 잊어도 돼.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이미르…….”
잊었던 과거의 이름이 세실을 통해서 꺼내진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 잊겠다 다짐했던 옛 기억들이,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세실…….”
에밀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류클리드 그놈은 이제 잊어. 앞으로는 내가 너의 옆에 서 있을게.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린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하자.”
“……그 말 진심이야?”
“당연하지.”
“나, 류클리드에 의해서…….”
“괜찮아. 나는 다 받아줄 수 있어.”
에밀리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녀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난, 언제나 너를 보고 있었어. 류클리드랑 결혼한 너를 잊으려고 이렇게 바뀌었지만……. 지금도 너만 원한다면.”
“……좋아! 나는 정말 좋아. 이미르.”
해맑게 웃으며 에밀리의 손을 잡은 세실리아.
그런 그녀를 에밀리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혼을 허락한 세실의 말에도 그녀는 기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럼 바람도 다 쐤는데 들어갈까?”
“그래! 헤헤, 결혼하게 되면 누가 정장을 입어야 할까? 아무래도 이미르가 입는 게 낫겠지? 이미르는 남자였으니까.”
“그러자. 세실리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슬픈 미소를 짓던 에밀리는.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 잠시 볼일이 있어서.”
“알겠어. 금방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게.”
세실리아를 먼저 집으로 들여보낸 에밀리는 입술을 깨물며 마당 밖으로 나갔다.
“되찾은 건가?”
울음을 참는 듯, 마당 밖으로 나간 에밀리 앞에 모리스가 나타났다.
“아, 모리스…….”
“세실리아가 기억을 되찾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울상인가?”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에밀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래. 계속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그런가? 결혼은 그래서 꺼낸 거로군.”
“최대한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어서. 소용은 없었지만.”
어깨를 늘어트리는 그녀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슬퍼 보였다.
“어떻게 할 건가?”
“뭐를?”
“나중에는 세실리아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야 한다. 계속 이렇게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알아. 하지만, 어떻게 그래.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든 돌려놔야 한다. 아니라면 강경 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
“그래도…….”
“황제가 내 사무실을 뒤졌다. 미리 쳐놨던 함정에 놈들이 군사를 보냈어. 오래지 않아 여기도 찾을 수 있다.”
“나만 믿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나는 잠시 에밀리를 보았다.
“믿고 있겠다.”
“걱정 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꺄아아악! 류클리드, 어디 있어요!”
기억을 잃고 비명을 지르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오두막에 울려 퍼졌다.
“잊어버린 건가.”
“맞아.”
슬픈 반복이다. 얼마나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가.
그런 에밀리의 감정은 얼마나 더 마모됐을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가 봐라. 일이 더 진행되면 얘기하러 오지.”
“그럼.”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에밀리의 뒷모습을 본 나는 텔레포트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
“오늘 수업을 시작하겠다.”
수업 당사자인 세리아와 에미르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도 없이 며칠 밀렸던 것이 화근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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