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92화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2)
* * *
북으로 제국의 국경을 가르는 거대한 장벽 위.
경비병들이 각자 위치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제 더 추워지네. 시팔. 어째 작년보다 더 추운 거 같냐?”
“그래도 상병님은 곧 휴가 아니십니까?”
“휴가 받아봤자 뭐 하냐. 어차피 집도 가족도 없는 입장인데.”
“그래도 겨울 맞아서 따뜻한 지역가면 몸이라도 녹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좋지.”
“상병님 휴가 가시고 야만족들 쳐들어오면 어쩝니까? 역전의 용사신데.”
상병은 신병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야만족들도 사람이야. 저놈들 겨울에는 절대 안 쳐들어와.”
“왜 그렇습니까?”
“추워 뒤질 거 같으니까. 북쪽 한파가 얼마나 심한지 너 안 겪어 봤구나? 조만간 알 거다.”
“그렇게 춥습니까?”
“너 저기에 있는 초소가 왜 있는지…….”
성벽에 놓인 초소를 가리키던 상병의 눈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저게 뭐야?”
“어? 상병님 저거……. 야만족 아닙니까?”
“이런 미친!”
갑자기 등장한 야만족 무리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무기를 찬 상태였다.
좋은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야만족이 좋은 의도로 찾아온 적이 있던가?
“기습! 야만족의 기습이다!”
상병이 초소에 달린 종을 사정 없이 치기 시작했다.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전원 경계 태세!”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장벽이 소란스러워졌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게 일상을 보냈던 병사들이 무기를 쥐고 제 위치에 섰다.
초소에서 경고를 울리던 상병의 눈에.
“저, 저건 뭐야?”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날아오는 한 사내가 보였다.
하얀 가면.
어깨에 두른 늑대의 망토.
그리고 야만족들이 흔히 입는 복장을 입은 남자였다.
“마법……사?”
크루이 족에 마법사가 있다고?
그러나 상병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푸욱!
“커억!”
얼음으로 만들어진 바늘이 초소를 습격했기에.
“마법사다!”
장벽엔 마법에 대한 방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야만족들은 마법이 아닌, 신체를 강화시키는 주술을 썼으니까.
거기다가.
어느 누가 북쪽에서 8서클 마법사가 나타나 장벽을 공격할 거로 생각했을까.
모리스의 마법에 단단한 장벽이 소란스러워졌다.
쾅! 쾅!
거대한 얼음 마법 한 방에 성벽이 푹 파였다.
“방패를 들어! 어떻게든 버텨라!”
“마격포는 없는가? 빨리 장전 해!”
“다른 영주 성에 비상이라 알려!”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법에 장벽은 소란스러워졌다.
“젠장맞을! 저 마법사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야? 이봐 통신마법사!”
장벽의 지휘관이 다른 영주 성에 통신을 하는 마법사를 불렀다.
“예, 예?”
“네놈은 방어 마법 못 쓰나?”
“그, 그게…….”
“빨리 말해! 꾸물거리지 말고!”
“부, 불가능합니다다.”
“뭐가?”
“제가 아무리 마법을 써도 저 마법을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다.”
“그게 다인가? 그게 네놈이 그 주둥아리로 할 수 있는 최대냐고!”
“죄, 죄송합니다다.”
“멍청한 놈!”
마법사라고 있는 놈이 이 모양이니.
지휘관의 눈이 하늘에 떠 있는 마법사에 향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마법사였다.
야만족들 중에 저런 수준의 마법사를 지닌 존재가 있던가?
그의 기억에는 없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존재란 말인가.”
지휘관은 패배를 직감했다.
장벽을 지키는 1만의 병사들이.
마법사 하나를 견제하지 못해 허둥거리고 있었다.
집단 전에 소드 마스터 열 명보다 뛰어난 것이 강력한 마법사였다.
‘지금은 저 마법사를 견제할 소드 마스터도 없다.’
반란군에 의해 장벽이 뚫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젠 내부에서 열었다는 변명에도 통하지 않는다.
“제국의 운이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그때 지휘관의 머릿속에 한 사내가 떠올랐다.
과거 싸움도 없이 야만족을 장벽 밖으로 쫓아냈던 제국의 마법사, 전쟁 영웅.
모리스 드미트리.
‘그분이 오신다면.’
지금 장벽이 뚫린다고 해도, 다시 놈들을 저 장벽 밖으로 몰아내주리라.
지금 성벽과 병사들을 유린하는 저 마법사도.
모리스에겐 상대도 되지 않으리라.
결국 일개 지휘관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성문을 지켜라! 어떻게든 뚫려선 안 된다!”
이것이 전부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야만족들이 제국 영지를 유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
“역시 금방이네요.”
백설은 포로로 잡은 제국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제국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그들 중에서도 항복한 이들이 많았다.
전투는 너무 쉽게 끝났다.
모리스의 마법 공격에 전의를 상실한 제국군은 상대하기 너무 쉬웠고.
마법으로 박살 난 성문을 뚫은 기병대들은 적들을 한순간에 베어 넘겼다.
“백설 부족장님 만세!”
“부족장님 만세!”
승리에 도취된 병사들의 환호성이 장벽에 울려 퍼졌다.
출정 전까진 의심에 가득하던 족장들도 이미 반쯤 홀린 듯 백설을 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스스로 연 것도 아님에도 희생 하나 없이 장벽을 돌파했으니.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이지?”
“제국민을 제 손으로 죽이신 거잖아요.”
“괜찮다.”
“뭔가 생각이 있으신가 보네요.”
수상한 마법사와 함께 장벽을 뚫고 내려온 야만족들.
그 마법사를 격퇴하고 야만족을 교화시켜, 그들을 장벽 아래에 살게 만든다.
귀족파 내부에서도 반대는 있겠지.
그렇다고 황제의 군대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귀족파들을 설득할 명분은 생각해 뒀다.”
“저는 무엇하면 좋겠사옵니까?”
“여기서 주둔하면서 넓은 평원이 있는 볼케 라인까지만 전진해라. 하지만.”
“하지만?”
“민간인을 피습하거나 약탈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백설이 내게 몸을 기댔다.
“오늘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서부와 남부에서 움직이는 황제군의 병력도 살펴야 했고.
“이건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너를 지켜 줄 물건이다.”
나는 백설에게 머리띠를 건네주었다.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가 제작한 머리띠였다.
마법을 담을 수 있는 재질로 만든 머리띠.
어떤 공격이든 막을 수 있는 매직실드와 나를 호출하는 알람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이었다.
“잘 차고 있어라.”
“아……. 고마워요. 소중하게 여길게요.”
백설이 머리띠를 품에 꼭 안았다.
“소녀, 떠나시기 전에 부탁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립지 않게…….”
백설이 몸을 배배 꼬며 내게 달라붙었다.
“지난밤에 그렇게 했는데도 부족한가?”
“그게……. 모리스님이 워낙 절륜하셔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나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군.”
나는 백설을 데리고 장벽의 가장 화려한 방을 찾아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설의 신음이 울렸다.
***
마탑에 위치한 모리스의 사무실.
갑자기 쳐들어온 병사들에 제인이 잔뜩 경계해 외쳤다.
“폐하! 지금, 이러시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마탑에 병사를 이끌고 들어오는 건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중 하나였다.
“킥, 제국에서 태양이 비추는 곳은 전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다. 감히 초월체 따위가 제국의 크큭, 태양을 막을 생각은 아니겠지?”
“이건 고대부터 이어진 맹약을 깨시는 겁니다.”
“그런 잘난 마탑의 주인인 마법부 장관도 제국의 황제가 히잇! 임명한다는 걸 모르는가?”
“황제 폐하! 그것 역시 맹약으로…….”
“맹약이라……. 이제는 잊혀진 역사에서 적힌 글귀 몇 개로 감히 나를 옭죄려고 한다면 곤란하지.”
제인은 눈앞에서 억지를 부리는 황제를 보았다.
병사들 속에 숨은 황제는 며칠은 먹고 자지 못한 듯 초췌한 상태였다.
붉게 충혈 된 눈과 깊게 패인 눈. 푸석거리며 누렇게 뜬 피부.
거기다 말을 하는 중간에 발작하듯 움찔거리며 웃어대는 모습까지.
이 사람이 과거에 제국의 위엄을 내 보이던 황제가 맞는 건가, 의심까지 들었다.
“빨리 찾아라! 감히 황후를 납치한 마법부 장관의 사무실을 수색하는 걸 허하겠다!”
“황제 폐하!”
제인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지만, 그뿐이었다.
초월체인 그녀였음에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물리력을 가질 수 없었다.
관찰의 초월체.
그녀는 과거 초월체끼리 벌어진 전투에서 육체를 잃었다.
맞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그녀였다.
지금은 과거 초대 마탑주와의 계약으로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않은 채, 마탑에 묶인 것.
그랬기에, 사무실을 뒤지는 병사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는 폐하께서 바꾸실 마법부 장관의 임명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킥!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잖아.”
“뭐라고요?”
“네년이 모리스랑 붙어먹는 거, 어림짐작해서 알고 있었어. 네년을 믿으니 히힛, 모리스 그놈이 감히 내게 덤볐겠지.”
“…….”
제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제국의 정보망을 우습게 보지 마. 크, 크큭.”
실실 웃은 황제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여길 뒤지려는 것이 설마.’
마법부 장관의 비밀을 캐서 그가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밝히고 물러나게 하려는 셈?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관님 빨리 오셔야 해요.’
힘이 없는 그녀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대체 모리스는 어디로 간 거란 말인가.
“찾았습니다!”
한 병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그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폐하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호오, 그래? 어디 보자.”
황제가 체통도 잊고 병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엔.
황후의 도주 보고서.
에밀리.
황후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데려갈지 상세하게 적힌 보고서가 있었다.
“크큭! 모리스, 에밀리 이 개 같은 새끼들……. 크큭, 다 죽었어.”
황제의 광기 어린 웃음에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