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8화 장벽 너머로.
* * *
“황제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나는 추가 보고를 위해 저택에 방문한 로널드 백작에게 물었다.
“실제로 황궁 지하에 실제로 고문실과 기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실제로 근위대들이 실종된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고사로 사망했던 그들이 쓰던 무기가 고문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설마 그게 남아있었나?”
“그렇습니다.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멍청하군.”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조사관도 검집 안쪽에 새겨진 흠집 때문에 알았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겁니다.
“꽤나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는데, 황제는 어떻지?”
“그게…….”
로널드 백작이 말을 주저했다.
“말하게. 이 말이 새어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증거가 나왔음에도 여유롭게 조사관들을 맞이하는 중이랍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군.”
“그런 것 같습니다. 솔라리온 공작이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 중입니다.”
지방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군대를 믿는 걸 거다.
“현재는 황후폐하를 고문했다는 추가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걱정되는 건.”
“뭐지?”
“황후폐하의 안전입니다. 어디 계시는 겁니까?”
“그건 비밀이네. 나와 그 친구만의.”
친구라는 말을 들은 로널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에밀리님이 데리고 가셨군요.”
“맞아.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르지.”
“이왕이면 신중한 것이 좋겠죠. 하지만 황후님의 증언이 없다면…….”
“치명적인 일격을 먹이기는 어렵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황후를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고, 재판 날짜가 걸린다는 것도 있지만.
데리고 올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황후는 당시의 기억을 잃었고 증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황후를 꺼내는 건 조금 뒤.
그녀가 완전히 회복한 걸 확인한 뒤였다.
“때가 되면 내가 데리고 올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장관님.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귀족들에게 병력의 움직임을 주의하라고 경고는 보냈습니다만, 이러다가 진짜 내전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로널드 역시 전쟁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 주저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방법이 있으니까.”
“설마 정말 마법부의 무구들을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드미트리 가문은 현재 병력을 구할 수 있는 영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 또한 아니다.”
“허면?”
“북쪽에 갔다 오겠다.”
잠시 가만히 나를 보던 로널드가 경악했다.
그는 내 집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백설.
북쪽 야만족인 크루이 족의 공주.
동시에 내가 쓸 수 있는 군사 카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설마 야만족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대답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친 선택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을 데리고 온다니요!”
“컨트롤은 가능하다.”
“어떻게 합니까? 저들은 상식이 없는 민족입니다! 약탈은 기본이고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안다.”
그들의 악행을 포장할 생각은 없다.
“헌데 왜?”
“강한 병력을 이용하기 위해선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지.”
정도를 지키지 않는 황제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나 역시 무엇이든 시도해야만 했다.
‘황제라면 흑마법이라도 시도할 놈이니까.’
“그들을 통제할 방법은 있습니까?”
나는 저택 안에 있을 사람을 생각했다.
로널드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구겼다.
“제가 생각하는 그것입니까?”
“잘 알고 있군.”
“무모합니다. 저들이 백설 양의 말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나는 크루이 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은 강한 힘을 원한다.
강자를 바라고.
그런 이의 지도를 받길 원했다.
그리고 나는.
저들 위에 설 자격을 갖췄다.
누구보다 강한 힘과 더불어 크루이 족의 족장인 백설을 데리고 있으니.
“좋습니다. 장관님을 믿겠습니다. 시일은 얼마나 걸리십니까?”
“일을 해결하는데 사흘. 군대를 움직이는 건 일주일이면 될 거다.”
“가장 문제는 국경입니다. 철옹성 같은 성벽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뚫어야겠지.”
무너트리거나, 스스로 성문을 열게 만들어야 할 거다.
반발이 심하겠지.
그러나 믿는 구석은 있다.
로널드가 혀를 내두르며 나를 보고 있었다.
***
로널드를 보내고.
“백설.”
나는 백설을 찾았다.
“아, 모리스님!”
자수를 따던 백설이 나를 보자, 반색하며 반겼다.
“바쁜가?”
“아니에요. 그냥 모리스님께 드릴 선물을 만들고 있었사옵니다.”
아마 따고 있던 자수가 선물이 아닌가 싶었다.
“기대가 되는군.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어떤 거죠?”
“같이 올라가지.”
“어딜 말씀이옵니까?”
“네 고향으로.”
백설의 고향.
차가운 바람과 눈이 몰아치는 곳.
북쪽 방벽 너머였다.
내 말에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어째서입니까? 서, 설마 저를 돌려보내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부족들의 힘이 필요하다.”
“부족들의 힘 말이옵니까?”
“그래서 너를 이용해서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설마 부족장 자리를 노리시는 겁니까?”
“그래야 한다면.”
물론 부족장은 내가 아닌 백설이 앉을 것이다.
제국민인 내가 그 자리에 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분명 너의 아버지인 부족장과 싸울 것이 분명하다.”
“괜찮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녀는 오히려 즐거운 모양새였다.
대체 왜?
“왜 좋아하는 건가? 어쩌면 너의 아버지가, 너의 가족이 부족장의 힘을 잃는다는 것인데.”
“저는 이미 선물로 모리스님께 보내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저는 가족을 잊었사옵니다. 제게 가족은…….”
백설이 나를 힐끗 바라봤다.
“모리스님이 전부입니다.”
“……그런가?”
“예.”
“크루이 족의 관습은 이해하기 어렵군.”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리스님은 그냥 이기는 것에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한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설은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설마 바로 가십니까?”
“혹시 안 되는 건가?”
“아니에요. 가능해요.”
“그럼 가도록 하지.”
나는 백설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녀에게 따뜻한 모피를 입혔다.
보온마법까지 걸린 물건이라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북쪽으로 가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예정이다.
허나 마탑에 있는 걸 쓴다면 행적이 들킬 테니.
쉽게 조사할 수 없는, 뒷마당에 있는 포탈을 이용할 거다.
본래는 서큐버스 던전과 연결된 이 포탈을 바꿀 생각이었다.
연결 지점은.
북쪽 방벽 근처에 위치한 거점.
“그럼 이동하겠다.”
“예, 준비됐어요.”
백설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내 손을 잡은 백설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절대 놓지 마라.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
“네. 알겠어요.”
우리는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거점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노후화돼서 아무도 쓰지 않는 거점.
망가진 물건들이 이곳저곳 너부러져 있었다.
“와, 이런 곳이 있었군요.”
살을 에는 차가운 눈보라에도 백설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예전에 크루이 족의 진출을 막았던 거점이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데 왜 버려진 건가요?”
“보다 높고 단단한 성벽을 지었으니까.”
나는 저기 멀리 솟아 오른 거대한 성벽을 가리켰다.
지금 크루이 족과 제국을 갈라 놓는 거대한 방벽이었다.
“아.”
백설은 납득한 듯 보였다.
“그럼 이동하지. 거리가 있으니 꽤 오래 날아가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나는 백설을 안고 크루이 족의 마을을 향해 날았다.
하늘로 날아가자, 내 품 안에 꼬옥 안긴 백설이 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얼마나 날았을까.
나는 백설과 함께 크루이 족 마을에 도착했다.
“어? 공주님이다.”
“공주님이 왜?”
“제국으로 가신 거 아니었어?”
“성공하신 건가?”
“멍청아,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남자잖아. 제국의 전쟁영웅 모리스.”
“그럼……. 실패한 거야?”
“설마.”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향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백설을 보았다.
수군수군.
뭐라고 자꾸 떠드는 목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그들을 무시하며 지나가, 족장의 천막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걸어감에도 감히 내 앞을 막을 놈은 없었다.
내 얼굴을 몰랐던 놈도 백설과 함께 있는 걸 본 순간, 말없이 길을 비켜줬다.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벤단크루.
크루이 족의 족장이 나를 보며 턱을 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무슨 일로 왔지? 정식으로 혼약을 맺으려고 온 거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내 딸도…….”
그의 시선이 백설에게 향했다.
“자기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다니, 멍청한 것.”
그가 혀를 찼다.
“그런 말은 삼가지? 백설은 그대의 딸이긴 하나, 내 사람이다. 내는 내 사람을 욕보이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
그러자 벤단크루가 입을 다물었다.
“제안을 하나 하려고 왔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뭐지?”
“나를 도와 제국의 황제와의 전투에 참여해줬으면 한다.”
“반역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지. 황제가 먼저 칼을 뽑을 테니까.”
“너희가 야만족이라 부르는 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선택을 민심이 받아들일까? 제국은 그게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민심 중요하지.”
“방책이 있는가?”
“그래.”
“뭐지?”
벤단크루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내 해결 책이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북쪽 야만족을 정벌한 마법부 장관에 의해 교화된 이들이라면 반대 의견이 굉장히 줄겠지.”
“……설마?”
“도전하러 왔다. 크루이 족 전체의 족장 자리를 걸고 신성한 대결을 하려고 한다.”
그 말에 벤단크루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감히 외지인이 신성한 대결을 입에 담다니! 아무리 그대가 내가 인정한 강자라고 해도 이런 무례는 용서할 수 없네!”
“내가 왜 못하지?”
“뭐?”
“내겐 그대가 선물한 백설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정통성을 가진 크루이 족의 공주 아닌가?”
벤단크루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는 백설을 노려보았다.
“네년, 설마?”
“나는 백설의 대리인으로 나오는 것뿐이야.”
“백설! 그게 사실인가?”
벤단크루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음에도 백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 저는 제가 가진 권리를 주장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모리스님은 제 대신 싸워주실 겁니다.”
“허. 부족의 번영을 위해 보냈던 아이가 부족을 망치러 오는구나.”
“아니요. 모리스님의 밑에 있으면 우리 부족은 더 강해질 수 있사옵니다.”
“하! 웃기는 소리! 강하다 한들, 따뜻한 양지에서 살다 온 놈이 어떻게 우리를 이끈단 말이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천하의 크루이 족 족장이 혀가 길군. 설마 겁 먹었나?”
“겁? 내가 겁을 먹었다고? 웃기는 소리!”
쾅!
벤단크루가 자신이 앉아있던 왕좌를 내리쳤다.
손잡이가 우득! 한 방에 부러졌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상대해주지.”
벤단크루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기대하지.”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