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7화 너를 신의 품에 보내기 싫다.
* * *
“시험은 잘 끝났나?”
“모리스님? 어째서……?”
에미르는 당황한 목소리로 모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까지 그가 먼저 찾아와 그녀를 만났던 적이 있었나?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파혼 이후엔 없었다.
단 한 번도 모리스가 먼저 와서 그녀를 만나려 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아파 병상에 누웠을 때에도.
모리스는 찾아주지 않았으니까.
“성기사로 지원을 했다고 얘기는 들었다.”
“모리스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왜 아니지?”
“예?”
모리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에미르 너의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제게 관심이 있으셨나요?”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말씀은 잘 하시네요. 늘 제가 찾아가는 입장이 아니었던가요? 먼저 찾아오신 적이 없었잖아요.”
신성력 테스트를 받을 때까지 모리스를 생각했기 때문일까.
괜히 입 밖으로 내뱉는 말투가 더욱 날카로웠다.
“성기사가 그만큼 대단한가 보네요. 제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한 번 찾아오신 적 없으셨던 천하의 모리스님께서 저를 먼저 찾아오시다니.”
“큰일이지. 황제파 장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신에게 몸을 맡기겠다는데.”
“제게 농을 하시려고 오신 건가요?”
울컥해진 에미르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높아졌다.
그녀는 시야가 뿌얘지는 걸 느꼈다.
모리스를 잊지 못해 상사병으로 쓰러졌을 때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모리스였다.
그녀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에는 찾아오지 않더니, 이제 모두 잊으려고 노력할 때 눈앞에 나타났다.
‘못된 사람.’
너무나 못된 사람이었다.
그녀를 손아귀에 두고 놓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람.
대체 왜.
자신은 그 손아귀 밖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강해지고 싶어서 검을 다시 들었다고 들었다. 이게 그대의 선택인가?”
모리스가 가리킨 건 대신전의 입구였다.
“예. 이게 제 선택입니다.”
“그대라면 신전의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겠지. 신관들은 신아래 모두 평등하다고 여기니 특별대우도 해주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강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모리스가 한 걸음 세리아에게 다가갔다.
“나는 아니라고 보네만.”
“그걸 어떻게 단정 지으십니까?”
“바트람은 능력 있는 스승이다. 저 안에 바트람보다 강한 이들이 있을까?”
에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교단의 성기사가 약해졌다는 건 제국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바트람 같은 소드 마스터 역시 성기사 중에선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역시 저를 놀리러 오셨군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면서 얕잡아보시고 무지하다고 모욕을 주시려고.”
“분명히 얘기하지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오셨습니까? 제가 교단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싫으신 겁니까? 병석에 있던 저를 찾아오지도 않으시던 모리스님이 몸소 제 앞까지 올 만큼?”
에미르가 이를 갈 때였다.
“네가 교단에 들어가는 것이 싫냐고 물었나?”
나는 인상을 찌푸리는 에미르를 보자,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그녀를 슬프게 만든 것만으로도 심장은 이리 난리였다.
두근두근.
에미르에게 들리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찌푸리느라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사정없이 뛰던 심장이 한결 가라앉았다.
‘이 정도인가.’
이 몸이 에미르를 생각하는 마음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가빠지는 숨을 진정시키고 감았던 눈을 떴다.
치켜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에미르와 눈을 마주치자, 가슴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이제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그녀는 나를 이렇게나 싫어하는구나.
분명 좋아해야 할진데.
에미르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에 좋아해야 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프단 말이냐.
“나는 너를 교단으로 보내기 싫다. 내가 왜 보내야 하는 거지? 거기 들어간다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모리스님의 것이 아닙니다. 교단으로 가는 건 제 선택이에요.”
“강해지기 위해서?”
심장박동이 가라앉은 걸 느낀 나는 한 걸음 더 걸어갔다.
“오히려 수많은 율법을 들먹이며 너의 강함을 통제하려 들 거다. 저기는 그런 곳이니.”
“제 강함이요?”
“방금 창문 밖까지 빛이 새는 걸 봤다.”
“그것만으로 말하는 건 억지에요.”
“그게 현실이다. 교단 내부의 정치싸움 때문에 강한 자를 억제하는 것. 그게 바로 교단의 힘이 약해진 이유지.”
분한 듯 에미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박을 하고 싶지만, 딱히 입이 떨어지지 않은지 그저 입 꾹 다물고 있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를 교단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점점 더 커졌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이보다 더 싫어하게 되더라도.
보내지는 못하겠다.
“강해지고 싶다고 했나?”
“…….”
“차라리 내게 와라. 원한다면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겠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제안을 그녀에게 건넸다.
“설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는 기사를 가르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나라면 저기 교단의 기사들보다 훨씬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거다.
“왜……. 그렇게 못 가게 막는 건데요.”
나를 올려다보는 에미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빛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저를 밀어내고 내치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저를 잡으시려는 겁니까.”
나는 고민했다.
이곳에 온 이유를.
왜 왔는가.
이 몸이 에미르, 너를 보고 싶어 하기에.
아니다.
신에게 귀의하려는 너를 말리고 싶었으니까.
대체 왜?
너를 좋아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 몸이 너를 좋아한다.
이리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몸이 그렇다.
그러나 내가 아닌 모리스의 몸이 너를 잊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걸 말할 수 없으니,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너에게 전할 수도 없을 테지.
수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그대가 납득할 수 있을까.’
내 말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첩이 있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 저를 거부한 건 모리스님이십니다. 대체 왜…….”
말하는 에미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서야 저를 붙잡으시는 겁니까.”
내가 온 것만으로 그녀에게 상처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돌이킬 수는 없다.
에미르의 눈을 이렇게 오래 마주보았던 적이 있을까.
그러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름다웠다.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른 이에게 뺏기기 싫을 정도로.
허나 내가 빙의자라서 생기는 몸과 의식의 괴리감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이 빙의자라고 밝힌 황후가 어떻게 됐는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그저.
“전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지.”
“고작 그거 때문입니까?”
내 진심을 숨기고 거짓을 말할 뿐.
“허나 네가 내게 배우는 것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신전은 맞지 않는다. 내게 배우지 않겠다면, 차라리 바트람에게 배워라.”
수련의 과정은 고통스러울 거다.
“모리스님은 몰라요. 모르십니다. 제가 왜 신전까지 들어가려고 하는지.”
“왜 들어가는 거지?”
“말할 수 없어요.”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눈가가 붉어질 뿐, 말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라.”
그녀 역시 나와 같았다.
서로 말하지 못하는 진심.
그렇게 진심을 터놓을 수 없는 사이.
이게 그녀와 나의 거리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찾아오지 마셨어야죠.”
“그래도 한때 약혼을 맺었던 사이다. 약혼녀가 인생을 결정할 선택을 하는데 찾아와야지.”
“그래서 검을 가르쳐주시겠다는 건가요?”
나를 보는 에미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모리스를 잊고 싶어서 신전에 들어간다는 말을.
그렇기에 옆에 당신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입술을 꽉 깨문 에미르는 모리스를 지나쳤다.
각오를 다졌다.
신전에 들어간다.
그게 에미르가 내린 선택이었다.
설사 모리스가 찾아왔어도, 그를 잊겠다는 목표를 놓지 않았다.
“그러한가.”
에미르의 뒤에서 모리스의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역시 에미르를 붙잡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것이 마지막 인내심이었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보낼 뿐.
고작 이럴 거라면.
‘왜 내 앞에 나타나서 마음을 흔드는 건가요.’
에미르는 모리스가 자신을 붙잡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여전히 모리스를 붙잡고 싶었으나, 지금까지 당했던 상처들이 그녀를 막았다.
모리스에게 다가가면서 느꼈던 아픔들을 다시 겪을까 두려웠다.
돌아가는 에미르의 가슴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
“하아.”
나는 마탑에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지?’
보내기 싫었다.
원래는 막는 시늉만 해서 몸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던 것인데.
에미르를 보고 나니까 신전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내기 싫다고?
저 교단의 기사들보다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흥분에 취해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었다.
검사와 마법사는 엄연히 가는 길이 다르거늘.
웃기는 얘기였다.
‘나와 에미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만약 에미르를 습격한 귀족파의 암살자들이 내가 보낸 이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는 나를 저주하리라.
나로 인해 자신의 하녀가 죽었고.
나로 인해 죽을 뻔 했으니.
‘그런데 옆에 두겠다고?’
그 자리에서만큼은 진짜 그러고 싶었다.
‘점점 모리스의 몸에 잠식되는 건가.’
곤란했다.
이래서는 곤란해.
나는 눈 사이에 위치한 콧대를 꾸욱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모리스의 몸은 에미르를 제대로 붙잡지 못한 것을 탓하기라도 하는 듯.
두근두근.
심장이 자꾸만 조였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모리스를 보았다.
잘생긴 얼굴. 차가운 매력이 느껴지는 쌀쌀맞은 표정, 그리고 죽죽 뻗은 기럭지까지.
정말이지 겉모습만큼은 완벽한 미남이었다.
“모리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자꾸 나를 이리 괴롭히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한숨이 퍽 나왔다.
그때였다.
“장관님.”
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초대장이 왔습니다.”
“어디지?”
“솔라리온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황제의 인장이 꽂혀 있습니다.”
“무슨 이유지?”
“솔라리온 영애를 구출한 기념 파티라고 합니다.”
“파티?”
“예.”
귀족파의 음모를 황제파가 틀어막았단느 걸 어필하기 위한 파티였다.
웃기는 소리다.
귀족파의 음모는 황제나 황제파가 막은 게 아니라. 내가 막은 거니까.
그것도 내가 기존에 잡았던 계획대로 들어맞은 것 뿐.
황제파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황제 네가 원하는 거라면.’
어울려주지.
그냥 어울려주진 않을 거다.
“알았다.”
나는 세실리아를 떠올렸다.
이제 슬슬 그녀를 대피시켜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가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때.
나는 환각 마법으로 세실리아를 수도 밖으로 보내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