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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77화 (77/174)

〈 77화 〉 76화 왜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거지?

* * *

“성기사, 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세바스찬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진짜일 거다.

세바스찬이 사람을 놀리기 위해서 헛소리를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대체 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질문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예.”

“이미 솔라리온 기사단의 기사단장에게 검을 배우고 있지 않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겠지요.”

“바트람이 부족하다라. 최근 성기사단에서 그를 능가할만한 기사가 있긴 한가?”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하면서 회피하시려는 겁니까.”

세바스찬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 곧은 눈동자 때문에 나는 한숨을 퍽 내쉬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나 역시 알고 있으니.”

이런 말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아마 나를 잊지 못해서이리라.

그러기 위해서 검을 수련한 것일 거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아예 이뤄지지 않게 성기사에 입단하려는 거겠지.’

성기사를 비롯한 신에 귀의한 모든 이들은 결혼을 하지 못한다.

그건 여자든 남자든 마찬가지다.

신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는 곧 신과 결혼을 의미하기에 인간과 결혼은 불가능했다.

에미르가 성기사단에 가는 것.

자꾸만 가문에 들어오는 혼약신청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자.

그녀가 나를 잊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강제로 결혼을 막으니, 나에 대한 미련을 천천히 잊어가겠지.

‘그것만은 안 된다.’

왜?

결국 에미르 스스로 혼약의 가능성을 차단한 거다.

그녀가 성기사에 입단하면 억지로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나 역시 그녀와 엮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내, 아니 모리스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심장이 뛰고 서클이 진동했다.

에미르가 완전히 떠나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내 몸이 그걸 막으라고 난리였다.

빌어먹을.

‘진심이냐?’

나는 멋대로 두근거리는 내 몸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몸은. 과거에 남은 모리스의 기억은.

여전히 에미르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는 주인님께서 정치적인 이유로 사랑을 포기할까 고민하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습니다.”

세바스찬이 끼어들었다.

“정치적인 이유뿐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갈등 또한 정치에 가깝죠.”

“마음의 갈등이라.”

그렇게도 얘기할 수 있겠군.

허나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로 인해 내가 나로 있을 수 없다는 것.

나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내 고민을 모르니 저런 속편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막지 않으실 겁니까?”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이 당장 에미르를 막으라고 경고하는 듯 했다.

내가 그녀를 막지 않는다면 멈춰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내 개인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혼약을 맺지 않으면서, 나를 잊으려는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가 어렵게 내린 선택을 방해한다니.

쿵쿵쿵!

내 서클은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제멋대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괜, 찮다…….”

“안색도 좋지 않고 느껴지는 마나가 불안정합니다.”

“괜찮다……고 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뒤흔드는 심장의 마나를 진정시켰다.

한참을 집중하자, 내 몸 속을 전부 찢어버릴 기세로 뒤틀리던 마나가 잠잠해졌다.

“하아, 하아.”

이마에 땀이 맺혔다.

거세게 뛰던 심장박동 역시 처음보단 가라앉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맞네.”

“저번에도 느꼈지만, 솔라리온 영애의 소식만 들으면 마나가 흔들리십니다.”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저는 주인님의 집사입니다. 주인님의 건강 역시 제 관리 영역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은 고맙지만, 지금은 아니네.”

“솔라리온 영애에게 한 번 찾아가보시죠.”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지?”

“주인님께선 영애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보입니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마지막 미련을 떨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찾아가 고백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게 주인님의 뜻이라면.”

세바스찬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 몸 상태를 걱정하는 진심어린 충고였다.

내가 봐도 지금 내 상태가 멀쩡해 보이진 않았으니.

나는 벽면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머리에서부터 흐르는 식은땀과 거세게 뛰는 심장 탓에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 거칠어진 숨과 초점이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신에 귀의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가련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세바스찬이 이런 말을 했겠지.

“끔찍한 몰골이군.”

나는 보기만 해도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나약한 모습이었다.

남들에게도 완벽해 보여야 하는 [완벽주의자] 특성이 발동하며 눈살이 찌푸려졌다.

“솔라리온 영애를 찾아가 말리시겠습니까?”

세바스찬이 내게 물었다.

***

황제의 궁궐, 황궁 바로 옆에 위치한 대신전.

과거 마법이 강성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와 버금가는 권위를 지녔던 교황이 거주하는 성지였다.

마법이 강성해지고 황제의 힘이 덩달아 강해진 지금.

신권은 예전만 못했고, 교황의 힘 역시 이전보다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신의 기적이라 불리던 신성력의 위력이 이전보다 약해진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던가.

교황은 여전히 황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제국의 국교가 유일신을 믿는 주신교였으며 제국 귀족들, 심지어 황제까지도 주신교를 믿었으니 말이다.

그런 대신전 앞에 솔라리온 공작은 에미르를 보며 물었다.

“정녕 테스트를 볼 생각인 게냐.”

“예.”

“허나……. 성기사는.”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사랑은, 찢어졌으니까요.”

솔라리온 공작은 사랑을 실패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딸을 몇 번이고 보아왔다.

그녀가 울음을 참는 소리를 듣지 못한 하인이 없을 정도.

그 모든 것이 파혼시켰던 자신의 탓임을 알았지만, 그는 에미르 앞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것이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의 자세였으니.

허나 딸이 세속의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모든 걸 인정해야 하나 수없이 갈등했다.

신에 귀의한 자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후세를 낳지 못한다. 심지어 가문의 유산마저도 성기사에겐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후계에서 한참 밀린 귀족가 막내들이 들어가는 곳이 성기사였고, 주교였다.

파혼을 시켰으나, 에미르를 사랑하고 아꼈다. 자신이 사망하게 된다면 그녀에게 줄 영지도 이미 생각해 놨다.

그런 자신의 딸이 대체 왜, 종교에 몸을 맡긴단 말인가.

딸을 말리기 위한 수 만 가지의 이야기를 떠올려봤으나 솔라리온 공작의 입에 오른 것은.

“귀족간의 결혼에 어찌 사랑만 있을 수 있겠느냐.”

이라는 형식적인 말 뿐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에 의해 일어난 것이니.

자신이 비밀스럽게 건넸던 혼약마저 모리스 드미트리가 거절한 이상, 이룰 수 없는 약조를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담담하게 신전을 보는 자신의 딸을 내려다 볼 뿐.

“죄송합니다.”

에미르는 고개를 숙였다.

늘 그랬다.

모리스를 잊기 위해서 수련을 해올 때마다.

자신의 약함을 자각할 때마다.

그녀를 지켜주었던 모리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강했다.

그리고……. 분하지만, 멋졌다.

이유도 묻지 않고 도망쳐 왔던 자신을 구해줬던 그 모습을.

처음에 모리스와 약혼을 맺었을 때를 떠올렸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

안하무인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법적 재능만을 믿고 남들을 다 깔보던.

최악의 약혼이었다.

내가 좋다며, 몇 번이고 집적거리던 모습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기밖에 모르던 남자가 주위 사람을 챙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법에 몰두했다.

그 날부터 그는 그녀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모리스의 모습을 에미르는 믿지 않았다.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겉모습을 바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하루, 이틀, 두 달이 넘었을 때. 그녀는 그 남자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이끌렸다.

분명 싫었던 사람일 텐데.

자꾸만 눈길이 갔고, 관심이 끌렸다.

마법을 부리며 연구하는 모습이 멋졌고, 자신의 목표가 확고한 모습에 반했다.

그 즈음 사고가 터졌다.

드미트리 일가가 몰락했다.

아버지가 결혼을 파토내면서 그녀와 모리스의 관계도 끝이 났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혼약이 들어올 때마다 모리스가 생각이 나서 거절했다.

가문의 조건이 좋았던 다른 귀족 자제들도.

외모가 아름다웠던 귀족 자제도.

그 누구보다 미래가 유망하던 기사도.

모리스에 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리스는 에미르의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모리스를 다시 만난 건 세리아 지크프리트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였다.

그는 자신을 구해줬고, 황제파 소속 마법사로 내전에서 활약했다.

그 때 알아챘다.

‘나는 이 남자를 잊지 못했구나.’

지금껏 느꼈던 내 감정이 사랑이구나.

그 때 끌렸던 감정이 아직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에미르가 앞으로 나가는 걸 자꾸만 막고 있었다.

그래서 성기사를 선택했다.

자꾸만 남아있다가는 강해지겠다는 욕심을 잊을 것 같기에.

모리스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래서 선택했다.

“하아.”

딸의 단호한 목소리에 솔라리온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넣는다고 무조건 되는 건 아닐 거다. 신관놈들 고약해서 독한 선별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에미르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자격이 부족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무조건 가능하리라 여겼다.

“가 봐라. 나는 이만 궁궐로 출근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솔라리온 공작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신전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신앙심 테스트를 위한 면접은 여기까지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성기사의 입단 관리관인 주교가 말했다.

에미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 3명의 입단 관리관 앞에서 그녀의 신앙심을 증명하는 면접 자리였다.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니 신앙심은 통과한 것 같다.

“이제 자매님이 신성력과 어울리는지, 저항력은 없는지, 어떤 성물과 어울리는지를 확인해 볼 것입니다.”

“예.”

“신성력이 몸에 맞는다면, 그 힘이 성물과 얼마나 융화가 잘 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통과하시면 자매님은 저희 성기사단에 입단할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끝인가요?”

에미르의 질문에 주교가 고개를 저었다.

“내부 심사가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교황께서 자매님의 기운이 담긴 성물에 축복을 내리실 때 반응을 보고 최종 결정이 있을 겁니다.”

“깐깐하네요.”

“신을 믿고자 하는 이들의 길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자격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시작하시죠.”

주교가 에미르의 몸에 손을 얹었다.

새하얀 신성력이 에미르의 몸을 타고 흘렀다.

몸 안에 흘러 들어온 신성력이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

“좋군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에미르의 몸에 퍼진 신성력을 회수한 주교가 이번엔 교단의 성물을 꺼냈다.

“신의 축복을 받은 검입니다. 한 번 쥐어보시지요.”

“무얼 하면 되죠?”

“자매님께서 생각하시는 신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게 다인가요?”

“예. 그럼 성물이 알아서 반응할 겁니다.”

에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쥐었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신의 이미지.’

신은 언제나 완벽한 존재라고 들었다.

모든 걸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 구원해주며.

외로운 자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해주는.

때로는 잔혹해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신도에게 위협을 가하는 자들에게 한한 것.

이 모든 것을 생각한 에미르의 머릿속에는.

모리스.

모리스 드미트리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에미르가 쥔 성물이 강하게 반응했다.

화아아앗!

“이, 이게 무슨?”

놀란 주교의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그러자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이 검을 감싸고 있었다.

***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심사장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빛이라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관리관인 주교가 설렌 목소리로 외쳤다.

“절차대로 처리하겠지만, 아마 입단이 가능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네.”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는 에미르의 모습에는 어떤 흠도 없었다.

허나 설레며 웃는 주교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잊으려고 왔는데.’

신성력을 증명하는 자리에서마저 모리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돌아 나오는 에미르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신을 떠올리라는 말에 모리스를 떠올린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어떻게든 잊어야만 한다.

잊어야만 해.

그러니까 절대로 모리스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미르는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헛것이 보이는 걸까?’

신전의 입구에 모리스와 비슷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허상이 아닌, 진짜 모리스 드미트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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