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70화 신 귀족파를 노리는 황제의 계획
* * *
“하아.”
엘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모리스 드미트리의 저택을 떠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홍련으로 복귀해서 황제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라는 모리스의 명령 때문이었다.
복귀하고 3주간은 다른 임무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반군의 주요 요인을 암살하고 오느라, 황궁 자체를 떠나 있었으니.
그녀가 황궁 밖에 있는 동안 황제가 모리스의 저택을 찾았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황제의 동향을 살피라던 모리스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단 이유로 버림받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어떤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노력하라는 말도, 벌을 내리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엘리스는 초조했다.
혹시 버림받은 건 아닐까.
그렇다고 저택으로 돌아갈 멍청이는 아니었다.
모리스를 배신하고 그를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머저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황궁에 복귀해서 황제와 보다 더 가까운 곳으로 배치되었다.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지만 모리스가 내리는 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엘리스는 생각했다.
그녀의 안을 자비 없이 헤집던 모리스의 물건을.
그녀를 완전히 지배했던 모리스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몸이 달아오르고 아랫도리가 젖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젖꼭지가 빳빳하게 섰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당장 이 허전함을 채우고 싶었다.
만약 모리스를 만나기 전에 그녀였다면.
“고생이 많네.”
라고 말하며 엘리스의 볼을 쓰다듬는 루이스를 보고는 그 허전함이 다소 채워졌으리라.
그녀는 홍련대의 대장이었고, 그녀들의 여왕이었으니.
루이스의 말은 홍련대원들에게 법이었고 진리였다.
다른 대원의 얼굴을 보라.
“루이스님이야…….”
“어쩜, 저리 멋있어지셨을까.”
“그런데 평소보다 머리카락이 길어지지 않았어?”
“그것도 아름다우니 상관없어.”
그녀들은 반쯤 홀린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스는 달랐다.
그녀는 루이스의 쿨한 척, 강한 척 하는 얼굴 밑에 숨겨져 있는 암컷의 본모습을 알고 있다.
모리스 드미트리의 밑에서 암캐처럼 깔렸던.
그 분의 손짓 하나에 평범한 여자가 되어버렸던 루이스를 보았기에.
더는 다른 대원들처럼 루이스를 자신의 여왕으로 대할 수 없었다.
이제 엘리스에게 그저 루이스는, 자신보다 조금 더 늦게 모리스님의 밑에 복종한 노예2호일 뿐이었다.
“대장님, 머리를 많이 기르셨네요.”
“아, 이거?”
“역시 그 분 때문이신가요?”
엘리스의 말에 머리카락 끝을 배배꼬던 루이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는 알고 있었지…….”
주위 눈치를 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홍련대의 여왕으로 위엄을 지키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 모습이 암퇘지처럼 보인 건 왜일까.
“맞아…….”
“역시 그거였나요.”
그 모습을 본 엘리스는 머리가 차가워졌다.
경쟁자다.
루이스는 홍련대 대장이기 이전에, 같은 주인을 섬기는 경쟁자.
그녀보다 먼저 모리스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생겼다.
“이건 모두에게 비밀이야. 알겠지?”
“물론이죠. 대장님.”
루이스가 당부하는 말에 엘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알리겠는가.
홍련대에 여자들은 전부 자신처럼 나사가 하나 빠진 여자들이었다.
루이스에게 지배당하기 좋아하고, 살인하는 것을 즐기는.
루이스를 지배했다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면 그 남자 밑으로 기어들어갈 암캐년들도 많았다.
경쟁자를 늘리긴 싫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희를 다 소집하신 건가요?”
“황제 폐하의 명령이야.”
홍련대는 제국의 황제 밑에 존재하는 여성 암살단.
황제가 내린 명령은 그녀들에겐 절대적이었다.
“근데 무슨 일로 저희를 전부 소집하신 거죠?”
“새로 귀족파라고 선언한 귀족들을 암살하라는 명령이셔.”
“귀족파요?”
“전부?”
“귀족파들 수가 엄청 많잖아요. 그 사람들 전부를요?”
대원들의 말에 루이스가 그 명단을 꺼냈다.
“전부는 아니야.”
“그러면요?”
엘리스의 질문에 루이스가 이름을 밝혔다.
“로널드 백작, 요코넬 자작, 하스폴 자작…….”
대부분 이번에 중립파에서 귀족파로 합류한 귀족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요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인사들.
황제는 대놓고 그들과 적대하겠다고 천명한 거다.
“일은 바로 시작하면 되나요?”
“맞아. 오늘부터 바로 움직일 거야.”
루이스의 말을 들은 엘리스는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제대로 일을 한다면 나중에 상을 주지.
저택을 떠나기 전에 건넨 모리스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어떤 상이든 주겠다는 말.
‘이런 고급 정보라면…….’
모리스님도 충분히 만족하시리라.
잘햇다며 상을 내리실지도.
고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짓밟고 지배할 모리스의 모습에 흥분되었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대장이라는 탈을 쓴 암캐 년이 벌써 모리스님께 보고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이번에 암살단은…….”
엘리스는 루이스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빨리 모리스에게 보고하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리스, 엘리스!”
루이스의 말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너랑 미셸, 레이첼이 로코넬 자작을 암살하러 갈 거야.”
“제가요?”
“그래.”
“전 얼마 전에 파견 갔다가 왔는데요. 또 가는 건가요?”
“지금은 긴급상황이니까.”
그때 엘리스는 보았다.
자신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 루이스를 말이다.
‘저 암캐 년이?’
원래라면 한 번 암살을 마친 대원은 한 달간은 암살 임무를 맡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그녀를 일부러 어려운 임무에 넣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저번 암살 임무도 설마?’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저년도 엘리스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자, 그럼 해산한다.”
루이스의 말에 모든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스는 굳이 루이스에게 따지지 않았다.
따지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을 알기에.
황급히 탑으로 달려간 엘리스는 전서구의 발에 쪽지를 묶었다.
황제가 중립파 귀족들을 암살하기 위해 홍련단을 보냄. 주요대상 : 로널드, 요코넬 등.
전서구가 깃털을 흩뿌리며 하늘 높이 날았다.
***
레이스 벨커스에서 돌아온 나는 서큐버스의 방에서 구했던 마법서를 연구하는 데에 집중했다.
환각 마법의 정수가 담긴 마법서.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실제로 마법을 익힐 때마다 주위에 이상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응접실의 책들이 갑자기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던가.
별안간 성욕이 터져 자지가 빳빳하게 서버린다던가.
땅이 뒤집어지고 문과 창문의 위치가 바뀐다던가.
대부분 마법을 익히며 내가 보는 환각들이었다.
역시 초월체의 마법일까.
마법을 시전 하는 이에게도 현실과 별다를 것 없는 환각을 보여줬다.
‘조심해야겠군.’
내가 익힌 환각 마법은 릴리스가 만든 마법 중에서도 기초 중의 기초였다.
첫 스무 페이지의 마법들만 익혔을 뿐인데 이 정도…….
만약 이보다 더 강한 마법을 익힌다면.
그 파급력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해.’
한 번에 몇 천 명을 속일 수 있는 환각 마법을 배워야만 했다.
“후우.”
거듭된 환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강하게 쥐었다.
‘10, 9, 8…….’
속으로 숫자를 세고 다시 눈을 뜨자, 방금 전까지 내 눈을 어지럽히던 환각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왔다.
“어렵군.”
마법의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거듭되는 환각이 어려운 것이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주인님, 저 세리아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세리아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능숙해진 그녀였다.
“무슨 일이지?”
“황후 폐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실 시간이십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황후의 치료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미리 대피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빨리 황후를 완치시켜야만 했다.
“알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그, 주인님…….”
“무슨 일이 있나?”
“오늘 밤에도 혼자 주무시려는 겁니까?”
“그럴 거 같다. 마법 연구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뭐 때문이지?”
세리아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요 며칠 저를 안아주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호,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모리스님의 밤 시중을…….”
“괜찮다. 아직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세리아의 아랫배에 새겨진 음문의 진행도를 보며 말했다.
최근 음문의 진행이 꽤나 더뎌졌다.
이건 그만큼 세리아가 그 행위에 만족감을 강하게 느낀다는 뜻.
굳이 급하게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될 거다.
보다 급한 일이 산재해 있으니.
“그, 그런가요? 그렇죠. 아무래도 주인님께서도 업무가 있으시니……. 마냥 밤을 보내실 수는 없, 겠죠?”
세리아가 짐짓 실망한 듯 몸이 축 쳐졌다.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잇던 세리아는.
“그러니 오늘은 불가하다.”
“알겠습니다아.”
내 말에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어깨가 내려갔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여서.
“허나, 이틀 뒤라면 가능하겠군.”
나도 모르게 여지를 남겼다.
“이틀 뒤 말씀이시죠?”
“그래.”
“기,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는 기뻐하는 세리아를 뒤로하고 황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회복실을 찾았다.
그녀는 쌕쌕거리며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보이는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다.
문제는 아직 신경들이 제기능을 할 때까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황후의 몸에 세포 재생을 가속화시키는 주문을 다시 한 번 걸었다.
‘멍청하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빙의자라고 고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빙의자가 해서 안 되는 금기 중 하나였다.
그만큼 황제를 사랑했기에 비밀을 밝힌 것이겠지만…….
동정하나 그뿐이었다.
황후가 황제의 신임을 잃고 무너졌고, 황제 또한 기댈 곳을 잃어 망가졌다.
그 때문에 나 역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고.
허나 이거 하나만큼은 고마웠다.
‘덕분에 명분은 하나 챙겼다.’
귀족파의 수장이 되어 황제와 상대할 때, 그 탄탄한 정통성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 말이다.
나는 주문이 제대로 작동하는 걸 확인하고는, 회복실을 나왔다.
문 밖에서는 백설이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모리스님!”
“쉬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모리스님을 보고 싶어서요. 하녀와 얘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녀는 세리아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무슨 일이지?”
“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같이 수도를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겸사겸사 모리스님과…….”
그러나 백설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갑자기 날아든 전서구 한 마리가 내 손가락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음?”
나는 전서구의 발에 달린 종이를 펼쳤다.
황제가 중립파 귀족들을 암살하기 위해 홍련단을 보냄. 주요대상 : 로널드, 요코넬 등. 엘리스.
‘생각보다 빠르군.’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백설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은 어려우니, 다음에 하도록 하지. 급한 일이 생겨서.”
“아…….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급한 일이 생겨 조금 걸릴 거다. 이번 주는 어려울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기다리겠사옵니다.”
나는 곧장 자리를 떴다.
***
“뭐가 그리 바쁘신 건지.”
백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을 거다.
아직도 모리스와 보냈던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으니 말이다.
“이번 주는 주인님께서 많이 바쁘신가 봐요. 백설님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 백설은 뒤를 돌아보았다.
백설의 뒤에 선 메이드, 세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듯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