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69화 세실리아를 향한 에밀리의 마음.
* * *
“세실, 너는 또 그 이름을 부르는구나.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류클리드 그 자식이 뭐가 좋다고…….”
에밀리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작은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는 에밀리의 모습은 서브 남주의 그것 그 자체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고, 상처 받은 여주를 보며 아쉬워하는.
성별이 바뀌었음에도 그 느낌이 진하게 났다.
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 진짜 황제를 부른 것이 아닐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정신적으로 치유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말은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니 마음에 두진 마라.”
“억지로 위로할 필요는 없어.”
에밀리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어차피 결국 세실의 마음은 내게 향할 테니까.”
에밀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류클리드 그 새끼가 무슨 짓을 시켰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아무런 짓도 시키지 않았다고? 그 변태새끼가?”
“시키기는 했다. 내가 거절했을 뿐.”
“역시 그 변태새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황제라는 작자가 황후를 가지고 고문을 시키려고 해? 제국의 품위 떨어진다.”
에밀리가 걸걸한 욕을 뱉었다.
그녀의 얼굴이 황제에 대한 혐오로 일그러졌다.
“신 귀족파의 상황은 어떻지? 잘 되고 있나?”
“하아.”
에밀리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잘 되고 있긴 해. 이번 솔라리온 습격으로 기존 귀족파들과 결속도 잘 되고 있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음 때문에 짜증이 나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가?”
“물론 문제는 하나 있어. 다른 건 내가 해결이 가능한데, 이건 해결이 안 되네.”
“강자의 부재인가?”
“맞아.”
에밀리가 손뼉을 쳤다.
“솔라리온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은 제국에서도 극소수야. 그 중에서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애들은 딱 한 명, 용병왕이 유일하지. 물론 그 친구도 솔라리온의 소드 마스터와 싸우기엔 역부족이야.”
“솔라리온을 제외해도 마스터급 강자들은 황제파에 많이 퍼져 있지.”
“후우, 그거 때문에 골치야.”
내전의 승자였던 황제파의 강자들이 많이 살아남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파 인원들 중에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가?”
“없다고는 못하지. 아마 이 공백이 길어지면 분명 이탈자가 나올 거야.”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언제 합류할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병상에 누운 세실리아를 보았다.
“황후가 전부 나으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한 달이면 된다.”
“한 달이라……. 그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끌어볼 수 있겠네.”
“다행이군.”
나를 보던 에밀리가 세실리아를 내려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굳이 세실을 다 치료한 뒤에 참여하려는 건 설마?”
“너를 통해 황후를 대피시키기 위해서다.”
“……쿠데타라도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다. 황후의 안전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야.”
아직은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정통성 또한 없었다.
내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분명 반발할 사람들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황제가 사망하면 제국은 사분오열. 찢어지리라.
그건 절대 안 된다.
평화롭게 해결해야지.
아주 평화롭게 말이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도.
내가 만들 수 있는 평화 중에 하나일 수도 있겠지.
“세실을 어떻게 도망치게 할 생각이지?”
에밀리가 멍하니 허공을 보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제국 밖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일이 터질 때까지만 피해있으면 그만이야.”
“그런가.”
얘기를 들은 에밀리가 세실리아 손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그런 에밀리에게 물었다.
“만약 세실리아가 널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세실리아는 류클리드를 찾았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에밀리, 아니 이미르는 옆에 있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날 피한다면 강제로 데려갈 거야. 그 미친 류클리드의 손에 남길 수는 없어. 녀석이 황제 자리에 있는 이상.”
세실리아의 손을 잡은 에밀리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에밀리에게도 집착이 느껴졌다.
“알았다.”
최소한 류클리드에게서 세실리아를 떨어트려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했다.
세실리아를 더는 류클리드의 손에 둘 수는 없었다.
아마 내가 이번에 세실리아를 류클리드에게 건넨다면, 이번엔 죽을지도 몰랐다.
완전히 선을 넘겠지.
그렇게는 안 된다.
“한 달이라고 했지?”
“그래.”
“거기까지 세실이 숨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보도록 하지.”
“알았다.”
마지막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세실리아를 보던 에밀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있던 자리가 반짝거리는 건 왜일까.
***
나는 오랜만에 향락의 도시인 레이스 벨커스를 찾았다.
정확히는 레이스 벨커스의 지하에 위치한 서큐버스 릴리스의 아지트였다.
내 저택의 뒷마당과 연결된 포탈을 타고 도착했다.
“여기는 여전하군.”
내가 떠나면서 다른 방과 완전히 격리시켰다.
릴리스의 방에는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는 마법적 자료들도 많았으니.
나는 릴리스의 방을 가로질러 벽면에 붙은 책장에 다가갔다.
책장에는 수많은 책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중에 한 권을 꺼냈다.
환각마법 저자 릴리스.
환각하면 서큐버스였다.
그것도 성에 관련된 거라면 가장 으뜸.
과거 리자드맨의 진액을 이용해서 환각을 보게 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에 플러스.
특별한 비법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 이 서큐버스의 방을 찾았다.
‘황제도 눈치 챌 수 없도록. 멀리서 나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속일 수 있는 환각이 필요하다.’
황후를 피신시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만 했다.
정확히는 황제와 황제의 기사들 모두.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읽었다.
남은 시간은 한 달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서큐버스의 환각 마법을 모두 익혀야만 했다.
나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
바람이 숨 쉬는 곳.
릴리스의 방에서 마법서를 찾은 나는 엘프들의 창관을 찾았다.
“너, 너 연락도 없이 왜 왔어?”
창관에 들어가자, 레밀리아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고기를 뜯고 있었다.
나를 본 레밀리아는 고기를 뜯던 손을 황급히 숨겼다.
“저번에 공략했던 서큐버스 던전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왔다.”
“그, 그래? 미,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레밀리아는 당황해 하며 내 눈을 피했다.
흉터가 새겨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리 연락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서큐버스 던전 수익을 들으러 왔는데.”
“그, 그거 때문에 온 거야?”
레밀리아의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그렇지. 미리 연락하지 않아서 실망한 건가?”
“그, 그건 아니야.”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장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잘 되고 있어. 사랑을 이뤄준다는 소문도 잘 퍼지는 거 같고.”
“다행이군. 돈은?”
“하아. 잠시만.”
카운터에서 돈을 꺼낸 레밀리아가 내게 돈뭉치를 내밀었다.
“총 3500 골드. 우리가 가질 수수료 뺀 가격이야.”
“좋군.”
수입이 생각보다 쏠쏠했다.
레밀리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진짜 오랜만에 와서 그게 전부야?”
“나는 일이 바빠서.”
내가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려고 할 때였다.
“모, 모리스!”
뒤에서 레밀리아가 불렀다.
“나, 나 뭐 달라진 거 안 보여?”
나는 레밀리아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펑퍼짐하고 활동성에 강조시킨 애교 없는 셔츠였다면.
지금은 몸매 라인이 살짝 드러나는 셔츠였다.
마음의 변화가 있는 건지, 스타일이 바뀌었다.
가장 다른 건 역시 얼굴이었다.
“열이 있는 거 같군. 얼굴이 붉다. 건강관리를 잘 해라. 엘프라고 대충 먹고 그러지 말고.”
“그, 그게 다야?”
레밀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래. 난 이만 간다.”
“야, 야! 모리스!”
***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레밀리아는 눈물을 꾹 참았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데도 부하들이 앞에 있어 차마 울 수 없었다.
이게 실연이라는 걸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던데.
‘아니잖아. 가슴이 타들어가는 거 같잖아.’
울고만 싶었다.
“대, 대장님, 먼저 퇴근하시겠어요?”
그걸 보던 매니저 엘프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될……까?”
“예, 들어가서 쉬십쇼.”
레밀리아는 눈을 훔치며 건물 밖을 나갔다.
그때였다.
“뭐 때문에 그리 우는가?”
모리스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솟아오르는 눈물 때문에 눈앞에 뿌옇게 보여서 잘못 보는 걸까.
“어디 아픈 건가? 전장에서 얼굴에 피가 철철 흘러도 울지 않던 여자가 놀랍군. 얼마나 아프길래.”
목소리는 분명 모리스였다.
그의 손에는 레이스 벨커스의 유명 고깃집의 로고가 적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
“뭐, 뭐야?”
“아픈 거 같아서 약이랑 네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왔다.”
“뭐?”
“그거 때문에 울고 있던 거 아닌가? 아플 때는 많이 먹는 것이 좋다.”
“…….”
“건강 챙기라는 말은 진심이다. 나는 오래 함께 했던 전우인 너를 오래 보고 싶다.”
“멍청아. 내가 일찍 죽어도 엘프야. 너보다 몇 배는 더 산다고.”
“그럼 잘 됐군. 죽을 때까지는 볼 수 있으니.”
모리스는 레밀리아의 손에 고기가 담긴 봉투와 약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빨리 나아라. 일이 다 해결되면 그 때는 같이 근처 산책이라도 하지.”
레밀리아는 눈물을 훔치며 멀어지는 모리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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