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67화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 * *
“네놈이 지금 짐을 능멸하는 것이냐?”
내 목에 닿은 황제의 보검이 부르르 떨었다.
“애당초 소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뭐라?”
“이미 목에 칼을 들이대고 듣는 말에 진심이 있겠습니까?”
나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이미 나를 황궁에 불렀다는 것.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밀리와 회동을 가졌던, 아직 어떤 세력이라 주장하지 않은 내가 어떤 쪽에 붙을지 말이다.
“진정 폐하께서 소신의 말을 듣고자 하셨다면, 황가의 보검을 꺼내시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노려보는 황제의 눈꺼풀이 요란하게 깜빡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목에 검을 대고 있다면, 그대의 충심은 나를 향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충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충성하지 않겠다?”
황제의 검에 베인 목이 화끈거렸으나, 내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말해!”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황제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신은 언제나 제국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제국을 위해라……. 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제국이 곧 황제이며 황제 폐하가 곧 제국이지 않습니까.”
“그 뜻은 황제파의 일원이 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황제가 낮게 웃었다.
“후후후.”
“검을 내려놓고 차갑게 생각하십시오. 신하의 진정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부드러울 필요가 있사옵니다.”
“분명 네놈은 내게 끝까지 충성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고 믿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굳이 믿지 않으셔도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뭐?”
“황후 폐하를 고칠 사람은 이 대륙에서 오직 저 하나 뿐이니까요.”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러나 그대를 죽이고 황후도 죽일 수 있다.”
“그러셨을 거라면 이미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폐하께서 이미 죽일 마음이셨다면, 진즉에 황후 폐하를 죽였을 거란 말입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굳이 망가진 황후 폐하를 치료하라 명령하신 건, 아직 황후 폐하께 볼일이 남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볼일이 남았지. 하지만 실제로 나아지고 있는지 확인은 필요하겠지.”
“실제로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흥미가 황후에게 쏠렸다.
“어떻지?”
“혀가 어느 정도 회복해서 기초적인 단어는 구사할 수 있습니다. 눈 역시 간단한 형제 정도는 구분하실 수 있습니다. 허나 아직 들을 수는 없습니다.”
“금방 회복되었군? 신관들은 하나도 치료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크크크크”
섬뜩하게 웃은 황제가 검을 집어넣었다.
충심을 의심할 신하에 대한 적개심을 죽일 정도로 아직 황후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는 거다.
혹시 몰라 걸었던 도박이 제대로 통했다.
만약 황후로도 부족했다면, 가슴에서 돌아가는 마나 서클을 걸 생각이었다.
마나를 거는 맹세는 마법사에게 절대적인 효과를 지니지만, 마나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황궁에서의 맹세는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굳이 마나를 걸려고 했던 이유였다.
황제가 검을 거둬들인 지금 시점에선 필요 없는 이야기지만.
“충성이 아닌 능력으로 내 검을 집어넣게 만들다니……. 그대는 정말이지, 위험한 사람이야.”
허나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가 필요하니 죽이지 못할 것이라……. 허나 자네가 황후를 다 낫게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 때는 새로운 능력을 보여드리죠. 그건 황제 폐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크하하하하하!”
대전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군. 이리 능력 있는 신하를 죽이려고 하다니. 그대 상처는 괜찮은가?”
황제가 상처 난 목을 손으로 훑었다.
손가락이 상처를 쓸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이지……. 이 모든 신하들이 자네 같았으면 좋겠네. 능력이든 충심이든 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말을 마친 황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와 황제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대를 믿지만, 황후의 치료가 잘 되고 있다는 건 확인이 필요하겠어. 내일 바로 찾아가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만일 황후의 상태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황제가 으르렁거렸다.
“그 때는 그대의 충성심을 진지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을 걸세.”
***
수도에 있는 솔라리온의 저택.
저택의 마당에서 솔라리온이 검을 휘둘렀다.
“997!”
에미르는 생각했다.
마차 안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그녀의 하녀, 미사의 모습을.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998!”
에미르는 생각했다.
감히 솔라리온에게 검을 들이댄 적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던 그녀의 나약함을.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에미르는 생각했다.
모리스를.
그녀는 제압하지 못했던 솔라리온의 적을 가볍게 몰살시켜버린 제국의 대마법사를.
결국 홀로 서지 못하고 다시 모리스의 도움을 받았다.
과거의 자신처럼.
에미르는 약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검을 크게 휘둘렀다.
“천!”
후우웅!
“하악, 하악.”
그녀는 가슴을 달싹거렸다.
숨이 가쁘다.
그날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의 약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한 달로는 부족했던 거다.
손에 굳은살이 박힐만큼 노력했지만, 막상 적과 싸울 때는 제 힘을 쓰지 못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죽였던 적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의 손 안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에미르의 하녀였던 미사의 죽음, 비겁하게 도망치던 자신.
전부 그녀가 약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가씨, 그만하시죠.”
보다 못한 바트람이 에미르의 손목을 잡았다.
“기사단장님…….”
에미르가 자신의 손을 잡은 바트람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고 계십니다.”
“단장님, 저 때문에 미사가 죽었어요.”
“아가씨 때문이 아닙니다.”
“아뇨. 제가 더 강했다면……. 미사는 죽을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게 왜 아가씨 때문입니까. 감히 솔라리온의 깃발에 칼을 들이댄 놈들 때문이죠.”
검을 놓은 에미르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굳은살이 찢어져 손바닥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흘러내려 검을 적셨다.
“단장님, 저는 왜 약하죠?”
“이제 검을 든지 얼마 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지키지 못했어요.”
“모두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달랐어요.”
“모리스, 말씀이십니까?”
에미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구해준 남자였고, 제국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예. 그 사람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이 늘 있는 일이었다는 듯이 해냈어요.”
“모리스의 강함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그 남자의 도움 없이요.”
“가능하실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쉬십쇼. 무리한 훈련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예…….”
에미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입에 담지 못했다.
자신을 구해주던 모리스가 자꾸만 머릿속에 생각난다는 걸.
적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부리던 그의 듬직하고 거대했던 뒷모습이 떠나질 않는다는 걸.
***
“뉴……글니, 으?”
병석에 누운 세실리아가 황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제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뱉은 단어였다.
류클리드.
형체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어두울 텐데도 류클리드를 알아보고 말했다.
“확실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군.”
황제는 그런 황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감은 역시 실력에서 오는 거였나?”
“자신감은 확실한 결과에서 나오는 겁니다.”
“크크크, 참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어.”
잠시 나를 보던 황제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 거 같나?”
“두 달, 이르면 한 달도 가능할 겁니다.”
“한 달이라……. 그 안에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황후를 살피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아름다워.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자네가 황후를 조교했으면 하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이건 무슨.
대충 예상은 했다.
세리아를 조교하라는 명령을 하던 황제였으니.
그런데 황후?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내가 대답이 없자, 황제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를 조교하라고 했다. 네 멋대로 해도 좋다. 네가 황후를 조교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
“뉴……글니으.”
황후가 옆에서 황제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분명 황후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고 말하는 거였다.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들은 나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내가 좋아했던 소설의 주인공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이런 끔찍한 장면은 볼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황명이라도 그건 불가합니다.”
“뭐?”
“신하된 자로써 어찌 황후의 옥체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그 명령은 거두어주시옵소서.”
“황가의 일원이나, 황제의 명령이다. 수행하라.”
“불가합니다.”
빠직.
황제의 머리에 힘줄이 솟았다.
“다시 한 번 말하라.”
“불가합니다.”
내 말은 같았다.
“치료하라는 말은 받들겠습니다. 허나, 이런 명령은 불가합니다. 어찌 황후 폐하를 건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세리아는 되고?”
“세리아는 미천한 여자입니다. 허나 고귀한 분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지요.”
“황가에 대한 충심이 나에 대한 충심보다 높은 건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류클리드가 끔찍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네놈이 내게 법도를 들이대다니. 즐겁게 조교하고 고문하는 것이 네놈의 특기 아니더냐!”
“소신에게도 선이 있습니다.”
“네놈, 나에게 거짓말을 했군. 내게 충성한다는 그 말도 모두 거짓이었어!”
황제가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소신은 언제나 폐하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허나,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을 받는 것 또한 충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크흐흐흐흐, 빌어먹을 자식.”
황제가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황후가 안 되고 세리아는 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럼, 세리아를 죽여.”
이를 거절한다면 다시 트집을 잡으려고 할 것이다.
순간 살심이 끓어올랐다.
이 자리에서 황제를 죽일 수는 없을까?
허나.
내가 지금 황제를 죽인다면.
귀족파 황제파 모두가 내게 칼을 들이댈 거다.
제국 황제의 암살.
어느 누가 반기려고 할까.
나는 솟아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말했다.
“불가합니다.”
“지금까지 자네가 잘 하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갑자기 같잖은 동정심이라도 생긴 건가? 그런 거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지금 죽이기엔 아까운 년이 아닙니까?”
“뭐?”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어서일까.
황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처녀인 여자입니다. 제국 제일의 미녀, 그런 여자가 처녀를 잃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지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
황제는 모른다.
이미 그녀와 내가 몇 번이고 정을 통했다는 걸.
“아아…….”
그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방금까지 잊었던 장난감을 찾았다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잔뜩 올라간 분노가 가라앉았다.
“아니면, 직접 취하시겠습니까?”
황제의 시선이 세리아에게 향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세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되었다. 나는 품격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할 생각이 없어. 그저, 지켜볼 뿐이지. 그것이 망가지는 걸.”
황제는 거절했지만,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졌다.
분노로 가득했던 그의 표정에 흥분이 가득 들어찼다.
‘이런 남자가 내가 즐겨보던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이라니.’
슬프고 아팠다.
허나 내 진심을 숨기는 건 이 몸으로는 너무 쉬웠다.
“그렇다면 보시겠습니까?”
“나를 만족시킬 장면을 선사해줬으면 하는군.”
“물론입니다. 그럼 방을 옮기시지요.”
나는 황제와 세리아를 데리고 회복실을 나갔다.
“뉴……글니으.”
뒤에서 류클리드를 부르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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