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63화 단단하게 굳어진 에미르의 감정, 그리고 백설의 유혹
* * *
“제, 제가 왜요?”
제인은 굉장히 당황한 모양새였다.
아마 그녀의 눈앞에 몇 번이나 오르가즘을 느낀 채로 바닥에 누워 있는 루이스 때문이리라.
“끄으응, 으으읏, 하아아…….”
루이스는 여전히 야시시한 신음을 내며 바닥을 기었다.
그녀는 자신이 흩뿌린 오줌이 몸에 묻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 몸과 정신에 남아있는 쾌감의 잔여물을 마음껏 느끼고 있을 뿐.
“너도 원한다면 알려줄 수 있다. 아니지. 초월체도 섹스는 할 수 있지 않던가?”
쾌감에 자유로울 뿐, 섹스를 배제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닐 터였다.
제인은 대답이 없었다.
“자네도 누구와 섹스는 해봤겠지? 과거 내게 몇 번이고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
제인이 내 눈을 피했다.
“설마……. 처녀는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나, 나도 해봤다고요.”
그러나 말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정말인가?”
“마, 마, 맞아요…….”
내 질문에 대답하는 꼴은 전혀 경험이 없는 처녀 같았지만.
뭐, 자기 입으로 맞다고 하니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겠지. 천 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히, 히응! 그, 그건 장관님이 신경 쓰실 건 아니에요!”
제인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 그리 소리를 지르는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그, 그건!”
제인이 시선을 피했다.
“설마 관음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 한 번도 못해 본 경험을 어떻게든 잊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제인이 볼을 부풀렸다.
내게 릴리스에 대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에 화풀이를 하기 위해 조금 짓궂게 얘기한 감은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아서 괴롭히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바닥에 쓰러진 루이스를 가리켰다.
“이 여자가 왜 내 말을 따르는지 알려줄까?”
“괜찮아요. 대충 알 거 같으니까요.”
“아쉽군. 그대의 관음증을 고칠 수 있을 거라 봤는데.”
“탑에 갇혀있는 제 유일한 재미에요.”
“그 재미가 질리면 말하게. 내 언제든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줄 터니.”
“괘, 괜찮아요. 장관님께 걸리면 진짜 큰일 날 거 같으니까요.”
제인은 내 말에 도망치듯 루이스를 챙겼다.
***
솔라리온의 제 2연무장.
에미르는 홀로 땀을 흘리며 검술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움직임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입은 운동복이 젖어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그 탓에 에미르의 부드러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나다니던 기사들의 시선이 에미르에게 꽂혔다.
“요즘 연습에 열중이시지?”
“연무장에 매일같이 출근하시니까.”
“아무래도 역시……. 드미트리 장관 때문이지 않을까?”
“쉿! 조용히 해. 아가씨가 들으시면 어쩌려고.”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에미르가 모리스 드미트리에게 차인 이후, 매일 연무장을 찾는다는 건 솔라리온 가에 하루라도 사는 사람이면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허나 그 누구도 모리스 드미트리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에미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그 솔라리온 공작마저도 딸 앞에선 모리스의 모자도 꺼내지 않았으니, 어련했을까.
“쯧쯧, 아가씨 불쌍해서 어쩌나.”
“그래도 어쩌면 우리한테 기회가 아닐까?”
“뭐가?”
“솔직히 제국의 꽃이라는 에미르 아가씨지만, 혼기도 조금 늦었고 최근 유망한 귀족들도 없으니, 잘 나가는 기사와 혼약도 얘기가 나오지 않겠어?”
기사들끼리 키득거리던 와중, 솔라리온의 기사단장, 바트람이 버럭 소리쳤다.
“네놈들! 연습 째고 뭐하는 짓이냐! 빨리 연무장으로 안 들어가!”
“히익! 죄, 죄송합니다아!”
솔라리온 기사단에서 가장 엄하기로 유명한 바트람이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기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기사들이 무기를 챙겨 달아났다.
“한심한 것들. 가주님께서 들었다면 니들은 모가지였다.”
바르탐도 기사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 이번 일은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완전군장으로 연무장 200바퀴를 돌려야겠어.’
신분 상승을 원하는 기사들 중 대부분은 준 남작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저들 중 귀족 영애와 연을 맺고 신분 상승을 하는 꿈을 꾸지 않는 기사가 어디 있을까.
모든 기사들이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한 바트람은 제 2연무장 중앙에서 연습에 몰두한 에미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전신에 땀으로 범벅이었음에도 휘두르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하압! 하압!”
“아가씨.”
바트람이 다까이 다가기 무섭게.
후우웅!
에미르가 검을 휘둘러 바트람에게 휘둘렀다.
바트람은 검집 채로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퍽!
에미르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많이 날카로워지셨군요.”
“아, 역시 바트람 경이네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무리였어요.”
“아니요. 굉장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의 검은 방금 웬만한 검사보다도 날카로웠으니까요.”
바트람은 바닥에 떨어진 에미르의 검을 주웠다.
그녀가 얼마나 수련에 진심이었는지, 검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손잡이는 낡아서 닳아 있었고, 검날은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매일 잠을 줄이면서까지 수련에만 몰두하는 걸로 알았는데.
‘이리 열심이셨던가.’
그는 내심 놀랐다.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동작이 깔끔하고 매섭단 말인가.
소드마스터인 자신조차 순간 놀랐을 정도로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역시 주군의 피를 이은 분.’
바트람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며 에미르의 검을 내밀었다.
“연습도 좋습니다만, 그리 연습하시다간 몸이 상하십니다.”
“상관없어요.”
“아가씨께서 병상에서 일어나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도 최대한 안정을…….”
“바트람.”
“예, 아가씨.”
“나는 한 달 전에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허나……. 공작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알아요. 하지만 난…….”
검을 쥔 에미르의 손이 떨렸다.
“아직 잊지 못하신 겁니까?”
“아뇨. 잊었어요. 완전히 다. 그 남자에게 가졌던 마지막 미련까지.”
“헌데 왜 아직도 검을 연습하고 계십니까?”
에미르가 바트람을 바라봤다.
“그 남자를 이기려고요.”
“어려운 일입니다. 소드마스터인 저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혼자서가 어렵다면 여럿이서 덤비면 되죠.”
“왜 싸우려고 하십니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잖아요. 언제든 우리 솔라리온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셨습니까?”
바트람이 어깨까지 자른 에미르의 금색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한 금빛 머리카락이 자랑이었던 그녀였다.
“맞아요. 검을 수련하려면 최대한 편해야 하니까요.”
“……. 진심이시군요.”
“맞아요. 진심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아니 공작님께서는 자꾸 제게 검을 놓으라고 하시네요.”
바트람이 가만히 에미르를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예. 아가씨의 검이 날카롭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바트람 경이 도와준다면 든든하죠.”
“허나 수련할 때는 오로지 제 말만 따르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그럼. 검을 드시지요.”
바트람은 정말 오랜만에 에미르 아가씨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저 표정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드미트리 장관의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였지.’
바트람은 지금 짓는 아가씨의 의욕을 끝까지 불태우겠노라고 다짐했다.
***
“소녀 모리스님의 아이를 임신하고 싶사옵니다.”
업무를 마치고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백설이 말했다.
“내 아이를 임신하고 싶다고?”
“예, 저희 고향에서는 가장 강한 이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이라 말하고 있으니까요.”
“내 아이를 품고 싶다라…….”
잠시 같은 말을 되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왜 그렇사옵니까?”
“나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몸. 아이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 또한 제국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한 뒤 태어난 아이만이 가문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요. 허나 제 아이가 모리스님의 가문에 속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강한 아이를 낳고 싶을 뿐이옵니다.”
“네 마음은 알지만 불가하다.”
“설마 제가 고향으로 도망갈까봐 그렇사옵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왜 안 된다고만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백설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가 정부이건 크루이 족의 선물이건 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 또한 우리 가문에 넣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혼전 임신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겐 두 가지의 미래가 있다.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귀족임을 숨기고 살거나.
부정하게 낳은 아이라는 불명예를 지고 노예로 사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백설이 말한 가문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백설이 크루이 족이 내게 보낸 조공 비슷한 거라고는 하나, 일국의 공주였다.
그런 여자의 아이를 노예로 만들라니.
내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녀를 생각해주신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백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국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이 대목에서 어디가 그녀의 얼굴을 붉히고 부끄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허나 백설이 내 말에 만족해했다면 성공한 것이 아닌가.
“저……, 저기.”
“말하라.”
“오늘은 안전한 날이옵니다. 그러니…….”
백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밤을 보낼 수는 있사옵니까?”
나는 백설와 눈을 마주쳤다.
촉촉한 눈망울이 반짝거리는 것이 매혹적이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건가?”
“한밤중에 남녀가 함께 방을 쓰고 사랑을 보내는 것이 제국의 언어로 유혹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맞사옵니다.”
“그런가?”
“아니됩니까?”
오늘따라 유독 길게 뻗은 은색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어필을 해 보거라.”
“어필……. 말씀이십니까?”
“네가 내게 안기고 싶다고 어필을 해보란 말이다.”
내 말에 백설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곧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소녀, 오늘 하루 모리스님, 아니 서방님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싶사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