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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59화 (59/174)

〈 59화 〉 58화 황후의 상태, 그 이유. 자네가 황후를 치료해줬으면 하네.

* * *

“다들 짐과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을 환영하며…….”

황제가 모인 귀족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내 시선은 계속해서 황후에 꽂혔다.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머릿속으론 그녀가 황제에게 당할 만한 고문들을 떠올렸다.

너무 많아서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짠.

황제의 연설이 끝나고 귀족들이 옆에 있는 이들과 잔을 부딪쳤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 자리의 이름 모를 귀족과 잔을 마주친 나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후의 상태를 보기 위해선 가까이 갈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시여.”

“아, 모리스. 와 주었군.”

“폐하께서 직접 부르셨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하하하, 그 말도 맞다. 아, 저기 보이는가?”

황제가 비릿한 눈빛으로 멀리 영애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올해 성인식을 마친 영애들이라네.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자작가의 딸, 거대 규모 상단의 영애, 백작, 후작 가릴 것 없이 영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옆에 있는 영애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으나, 그녀들의 시선은 나를 쫓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몇몇 영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자네를 점찍고 있다네.”

“저를 말입니까?”

“당연하지. 이 자리에서 혼약을 맺지 않은 가장 잘난 남자가 누구겠는가? 잘난 남자야 황제인 짐이겠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 중 최고는 바로 자네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자.”

류클리드 황제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솔라리온과 맺어지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야.”

황제 역시 황제파인 솔라리온과 혼약을 맺길 바라겠지.

“이미 한 번 파혼한 상대입니다.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지요.”

“명예라……. 중요하지. 세상 모든 귀족들이 얻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 아니던가.”

그의 시선이 다시금 영애들에게 향했다.

“천천히 고민해보게. 그대가 누구와 혼약을 맺든 결국 제국의 마법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압박하는 거다.

결국 황제에게 임명된 마법부 장관이라는 뜻.

내가 그의 손아귀에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리라.

좋은 말로는 자신의 사람.

그러나 실상은.

‘황제의 말일 뿐이라는 건가.’

자신 말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 황제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한 마디였다.

“당연한 말씀이시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들 중에 좋은 혼약 상대가 있다면 내게 말하게. 짐은 언제든 자네의 들러리가 되어 줄 의향이 있으니.”

황제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혼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마법부에 할 일이 태산입니다. 다른 일에 쏟을 여력도 없습니다.”

“그런가?”

황제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아쉽군.”

황제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황후에게 다가갔다.

“태양의 반려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황후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내가 손을 잡자 황후가 흠칫 놀라며 그녀의 손을 잡은 내 손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외간 남자가 잡았다고 한들, 너무나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녀 역시 21세기 한국에서 이 세계로 빙의했던 빙의자였을 터.

‘뭐지?’

황후의 격한 반응에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황제가 옆에서 말했다.

“아, 말하는 것이 늦었군.”

말을 마친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 목소리에 심장이 조이는 건 어쩐 이유일까.

입과 목소리만 웃고 있을 뿐,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아서였다.

“황후는 지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네.”

“그게 무슨?”

“하아, 원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말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군.”

방금까지 웃고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사나워졌다.

“결혼하고 한 달 쯤 지났을까. 황후가 말하더군. 자신은 소설 속 세상에 떨어진 빙의자라고. 이 세계는 소설 속 이야기이며, 바깥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짐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걷어찼다고.”

빙의자.

맞다.

내가 읽었던 소설의 여주였던 그녀는 지금의 나처럼 소설 속에 끌려 들어온 빙의자였다.

소설의 미래를 알고 등장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는 주인공.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사기도 쉬웠고, 그녀의 모든 행동들이 다른 남주들에겐 매력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보다 쉽게 남주들의 마음을 훔쳤고, 여주는 이 피폐물 속에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비밀을 말한 건가.

이제 그녀로 인해 류클리드도 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건방지지 않은가? 감히 짐이 다스리는 이 세계를 소설 속 이야기로 퉁친다는 것이?”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말 속에는 날카로운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카직!

유리잔이 황제의 손 안에서 부서졌고 깨진 유리가 황제의 손을 찔렀다.

붉은 피가 흘렀다.

“폐하.”

그를 옆에서 모시던 집사들과 하녀가 놀라 외쳤다.

황제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나와 세실리아 황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꾸만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하더군. 평생 숨길 비밀을 공유한 거라고……. 짐은 짐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언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네.”

주먹 쥔 황제의 손이 떨렸다.

“그래서 감히 황제를 능멸하고 짐을 농락하려는 저 혀를 잘랐네. 이 세상 밖의 것을 보았다는 눈을 멀게 하고, 이계의 것들을 들었다던 귀를 멀게 했네. 그리고 지하 감옥에 가뒀었네.”

황제의 눈에는 광기가 차올랐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던 황후가 떠올랐던 걸까.

말하는 중간중간 피식거리며 웃었다.

“…….”

이 때문이었던가.

그나마 황제의 브레이크가 되어주던 여주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뱉길래 그녀를 괴롭힐 수많은 고문들을 준비했네. 사지를 묶고 채찍으로 살을 찢어보기도 했고, 날카로운 칼로 살을 찢기도 했네. 몇날 며칠을 굶게 만들기도 해봤어. 그 중 가장 재밌던 건 역시 저년을 근위대들에게 던져줬을 때였지.”

그날을 떠올리는 걸까.

황제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하아, 근위대들에게 범해지는 세실리아의 모습은참으로 아름다웠네. 내게 모욕을 주었던 여자였음에도 나는 다시 황후를 보며 가슴이 뛰었지. 그 때 알았다네. 빛나는 물건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황제가 몽롱한 눈으로 황후를 보았다.

“물론 건방지게 황후를 범하고 괴롭힌 근위대 놈들은 전부 사형시켰지만 말이지.”

“헌데 왜 공식석상에 모시고 온 겁니까?”

“이런 행사에 황후가 나오지 않으면 의심할 테니 말이야. 그래서 짐이 특별히 죄를 용서하고 데리고 나왔다네.”

“…….”

나는 황후를 보았다.

초점 없이 정면만 보며 억지로 웃는 건 공포 때문이었으리라.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시금 황제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소신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하네. 황후를 치료하게. 원래대로 만들라는 뜻이야.”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아니. 마음까지 무너졌는지 반응이 없어서 재미가 없거든. 뭐든 싱싱한 반응을 가진 장난감이 재미있는 법 아닌가?”

황제의 광기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가능한가? 자네가 최고위급 신관들도 포기했다는 솔라리온 영애를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다들 기적이라고 말하며 놀라더군.”

그럴 줄 알았다.

“…….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얼마나 걸리든 좋네.”

“황궁에선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제 저택이나 요양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상관없네.”

“문제가 있습니다. 황후께서 황궁 밖으로 나간다는 소문이 알려진다면…….”

“그런 추문 따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여주인 황후를 원래대로 돌려놔야만 했다.

오히려 황제가 치료를 부탁한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역시 믿음직스러운 신하를 두니, 마음이 든든하군.”

황제의 입꼬리가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

에미르는 황제의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리스를 보았다.

‘끝내 나를 봐주시지 않는구나.’

파티에서 처음 만나 나눴던 인사가 오늘 대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말 내게 마음이 없으신 거야.’

에미르는 모리스가 저택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솔라리온 공작과의 친분과 관계를 위해서 억지로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말.

처음에는 그 말을 부정했다.

원래는 저런 분이 아니라고, 사연이 있어 자신을 밀어내시는 거라고 믿었다.

그녀가 너무 찾아갔기에, 너무 집착했기에 밀어내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며칠 그를 찾지 않으면 다시 그녀를 찾으리라 믿었다.

허나, 그녀가 아무리 찾아가지 않아도 모리스는 먼저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연통을 보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고, 무엇을 하는지 묻기도 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뭐를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도 말이다.

허나 답장은 없었다.

오히려 봉투도 뜯지 않은 채 돌아온 편지만이 있을 뿐.

그렇게 열병이 걸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감에.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밥도 물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솔라리온 공작이 수많은 신관을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에미르는 그녀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깨어났다.

눈앞에 솔라리온 공작이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그 자리에 모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버려졌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구나.’

절망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정신을 잃고 앓아 눕지는 않았다.

에미르는 환자식을 먹기 시작했고, 조금씩이지만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조금씩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는 다른 이유로 모리스를 생각했다.

‘나를 버린 걸 후회하게 만들 거야.’

에미르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더 멋진 여자가 되어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는 모리스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

파티는 끝이 났다.

황제와의 상담으로 하루는 더 머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미련 없이 나를 돌려보냈다.

파티에서 모든 말을 전했다는 뜻일 거다.

내 옆에 황후는 없었다.

­따로 보내겠네.

절대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저택에 도착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자신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인님, 노예상이 저택에 방문했습니다.”

“노예상이?”

“주문한 노예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

나는 어두운 밤중에 저택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허름한 마차를 보았다.

노예상 하나가 랜턴으로 길을 비추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하, 장관 나으리……. 주문하신 노예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노예를 주문한 적이 없는데.”

“보시면 아실 겁니다요.”

노예상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읍읍.”

눈에는 검은 안대를, 입에는 재갈이 물린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거적데기나 다름없는 허름한 옷을 입은 채였다. 거기다 팔과 다리에는 사슬이 묶여 있었다.

핑크빛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

“허, 그 방법이란 게 이거였나.”

황제의 방식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황후, 세실리아의 목에는 개목걸이가 있었고, 거기에 작은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쪽지를 확인했다.

­자네가 치료할 환자일세. 절대 이 여자가 누군지 발설해서는 안 되네. 노예상을 보냈으니, 그 자는 자네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 믿네. 이 여자가 잘 치료된다면 내가 갈 때까지 자네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아.

자신의 부인인 황후를 이런 꼴로 만드는 황제라.

치가 떨렸다.

나는 노예상을 보았다.

그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대금을 원하는가.”

“그렇습니다요.”

“그렇군.”

나는 노예상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노예상의 머리에 닿은 손에서 빛이 일어났고, 동시에 노예상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으그그극!”

황후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모든 기억을 삭제했다.

후유증이 조금 크겠으나.

‘죽는 것보단 나으니.’

노예상이 멍청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내 저택에는 무슨 일이지?”

“아, 어? 엥? 제, 제가 왜 여기에?”

“빨리 꺼져라. 너 같은 노예상이 올 곳이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멀어져가는 노예상을 확인한 나는 철저하게 묶여 있는 황후를 보았다.

‘에밀리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나는 이 소설의 서브 남주였던 여자를 떠올렸다.

세실리아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그가 이 꼴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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